가야금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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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금 연주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가야금 4중주단 “여울” 공연을 보고...
1. 가야금(=가얏고 ․ 伽倻고 ․ 伽倻琴 gayageum, twelve-stringed zither)에 대하여...
2. 국악 크로스오버와 퓨젼
3. 가야금 4중주단 “여울” 공연을 보고...
Ⅲ. 마치며...
** 참고자료

본문내용

가야금 4중주단 “여울” 공연을 보고...
(우리 소리 靑春에 고함- 11월 28일 한국문화의 집 KOUS 공연)
과목명
교수명
학 과
제출자
학 번
제출일
가야금 4중주단 “여울” 공연을 보고...
(우리 소리 靑春에 고함- 11월 28일 한국문화의 집 KOUS 공연)
Ⅰ. 들어가며...
광고 중에 고 박 동진 선생께서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외치는 광고가 있었다. 고령의 선생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던 그 소리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한 켠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의 것이라 함은 우리의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문화는 무엇인가? 그저 이 땅에서 널리 행해지고 불리고 입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문화를 누리는 것은 어차피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며 그들을 통해 형성 되는 것이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문화라고 불릴 수 있으려면 최소한 동시대의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고 그들의 사상과 가치, 의식 등이 담겨져 있어야 하며 그것이 정착하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이유로 문화는 생성되었다가 금방 소멸되기도 하고 오랫동안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고, 삶에 영향을 끼치며 보존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문화에 대한 정의와 정체성을 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들은 음악이 소위 우리의 음악인 ‘국악’이기 때문이다. 소위 우리의 음악이라고 말하는 ‘국악’, 그렇지만 정작 잘 알지 못하고 들으려 하지 않는 음악, 이젠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을 것 같은 음악, 이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 나는 ‘우리의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타의에 의한 공연감상과 감상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의 음악인 국악을 돌아보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전통을 거치며 내려져 온 것인지, 우리의 정서와 감성에 맞는 음악이며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재산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Ⅱ. 가야금 4중주단 “여울” 공연을 보고...
1. 가야금(=가얏고 伽倻ㄱ고 伽倻琴 gayageum, twelve-stringed zither)에 대하여...
(1) 가야금의 역사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사기 악지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은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서 가야금을 만들었다. 가실왕이 이르기를, ‘여러나라의 방언(方言)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단일화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성열현 사람인 악사 우륵에게 명령하여 12곡을 짓도록 하였다. 나중에 우륵은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서 악기를 가지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의탁하니, 진흥왕이 그를 받아들여 국원에 편히 살도록 하고서 곧 대나마 법지와 계고 그리고 대사 만적을 보내서 그 업(業)을 전수시켰다....(중략)...
에 의하면 ‘가실왕이 당의 악기(쟁)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가야금은 비록 쟁의 제도와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하다.’ 고 한다. 두 악기는 상자 모양의 공명통위에 기둥을 세워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걸어 연주를 하지만 공명통의 제작방법이 다르고, 가야금에는 양이두라는 특별한 부분이 있다. 양이두는 가야금의 줄을 공명통에 걸어 매도록 고안된 것으로 줄을 갈거나 조일 때 아주 편리하다. 그런데 이런 양이두는 중국 일본 등지의 지더(zither)류 악기에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변진(弁辰)에 고라는 악기가 존재했었고, 1997년에는 기원전 1-2세기경의 고대 유적지에서 고대 현악기로 추정되는 가야금과 닮은 모양의 유물이 잇달아 발굴되어서, 그것이 가야금의 원형일 것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므로 가실왕이 가야금을 중국의 쟁(箏)을 본떠 가야금을 만들었기보다 중국의 쟁을 참고로 가야금을 ‘개량’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겠다.
가야금의 역사는 이제 가야에서 신라로 옮겨지게 된다. 우륵에게 악·가·무를 배운 법지·계고·만덕은 우륵에게 배운곡들이 ‘번차음(繁且淫)하기 때문에 아정(雅正)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께 배운 열한 곡을 다섯 곡으로 줄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우륵은 화를 냈지만 연주를 듣고서는 ‘낙이불류(樂而不流)하고 애이불비(哀而不悲)한 음악이라고’하면서 감탄했다고 한다. 그 결과 가야금의 음악은 신라 궁중의 대악(大樂)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가야금은 궁중의 향악 연주에서 거문고·대금·피리·해금·장구 등의 향악기와 함께 신라 삼현삼죽(三絃三竹)의 전통을 이었고,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문고가 문인들의 풍류문화를 이끄는 주도적인 악기로 부상한 것과 달리 조선시대에 가야금 전승사는 거문고에 가려져 있었다. 악학궤범에서 거문고를 중심으로 기술한 후 가야금의 해당 부분에서는 ‘무엇 무엇은 거문고와 같다’고 한 예라든지, 성현(成俔, 1439~1504)이 거문고 연주를 위한 합자보를 만들고 이 악보를 응용하면 가야금 연주도 할 수 있다고 부언한 것, 그리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대부분의 악보들이 거문고보로 되어 있는 점 등은 당시 음악 애호가들의 가야금에 대한 관심이 거문고에 밑돌았음을 보여준다.
그런 중에도 가야금으로 이름을 낸 이들은 더러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나 김안로의 용천담적기 같은 산문집에서는 황귀존, 김복산, 정범, 허오계, 이승련, 서익성, 조이개 등을 가야금 명인으로 손꼽았다. 그리고 졸옹가야금보의 저자는 영조 무렵에 맹인 가야금 연주자 윤동형이 가야금과 노래로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살고 있는 흥양까지 창아가 음악을 기록해 귀한 가야금보를 남겼다. 또 조선 중기·후기에는 홍대용, 윤선도
윤선도가 산중신곡(山中新曲)에서, 조선시대 가야금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로 애송되고 있다.
렷던 가야고 줄 언져 노라 보니
청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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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4
  • 저작시기2006.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8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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