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 론
1) 건국설화를 통해 본 백제의 형성
2) 비류건국설화
3) 비류.온조 건국설화 혼용의 의미
2. 부여족 공동 시조신화로서의 동명신화
1) 부여의 동명신화와 고구려 주몽신화의 별개성
2) 부여족 공동 시조신화로서의 동명신화
3. 백제본 동명신화의 재구
1) 동명과 구태
2) 구태와 비류
3) 백제본 동명신화로서의 비류설화
4. 결 론
1) 건국설화를 통해 본 백제의 형성
2) 비류건국설화
3) 비류.온조 건국설화 혼용의 의미
2. 부여족 공동 시조신화로서의 동명신화
1) 부여의 동명신화와 고구려 주몽신화의 별개성
2) 부여족 공동 시조신화로서의 동명신화
3. 백제본 동명신화의 재구
1) 동명과 구태
2) 구태와 비류
3) 백제본 동명신화로서의 비류설화
4. 결 론
본문내용
台는 동명의 후예인 북부여 왕 解扶婁의 庶孫이며, 어머니 召西奴는 졸본 사람 延 勃의 딸로 처음에 우태에게로 시집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이가 비류이고 그 다음이 온조이다. 그녀는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홀로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해 남쪽으로 탈출해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으며, 고구려 건국과정에서 공이 큰 소서노를 맞이해 왕비로 삼았다.
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낳은 禮氏의 아들 琉璃가 찾아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니 후에 유리가 왕위를 잇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류는 유리에게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아우 온조와 함께 동류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남하하여 浿水를 건너 帶方의 옛 땅에 처음 건국을 하였다. 그 후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4. 결 론
본고는 백제의 건국신화에 대한 再構를 목적으로 하였다. 주지하듯이 백제는 부여족이 분파하면서 세운 고대국가이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에서 숭앙되어졌을 건국신화에는 어떤 식으로든 부여의 신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으며, 본고는 이러한 전제 하에 백제본 동명신화라고 할 수 있는 백제의 건국신화에 대한 재구를 시도하여 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사서인 『양서』·『수서』·『북사』 등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선조가 부여의 동명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부여의 동명신화가 당시 부여족 공동의 시조신화로써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볼 때,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분명 부여의 동명신화가 그 기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백제 건국의 시조에 대한 확립을 시도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던 시각에서 탈피하여, 설화상으로 온조의 형으로 설정되어 있는 비류를 시조로 확립하여 보았다.
『삼국사기』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왕실에서는 두 가지 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동명제의'와 '구태제의'가 그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부여의 동명신화가 부여족 공동의 시조신화로 기능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의 '동명제의'를 통해서는 부여의 동명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구태제의를 통해서 숭배된 시조 구태가 누구인가가 문제가 된다고 하겠는데, 필자는 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구태를 비류와 동일인물로 파악하였다.
결국 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가 아닌 비류이며, 따라서 백제의 건국신화는 온조설화가 아닌 비류설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부여의 동명신화가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삼국사기』의 비류설화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부여 동명신화를 참고로 하여 백제의 건국신화인 비류설화의 본래적 모습에 대한 재구를 할 수 있었다.
본고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는 시각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온조를 시조로 보는 시각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입장인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없이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백제 건국신화에 대한 확립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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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唐書』, 『新唐書』, 『通典』, 『三國志』, 『後漢書』, 『續日本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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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 론
본고는 백제의 건국신화에 대한 再構를 목적으로 하였다. 주지하듯이 백제는 부여족이 분파하면서 세운 고대국가이다. 따라서 백제의 왕실에서 숭앙되어졌을 건국신화에는 어떤 식으로든 부여의 신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으며, 본고는 이러한 전제 하에 백제본 동명신화라고 할 수 있는 백제의 건국신화에 대한 재구를 시도하여 보았다.
이를 위해 먼저, 부여의 건국신화인 동명신화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중국의 사서인 『양서』·『수서』·『북사』 등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선조가 부여의 동명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부여의 동명신화가 당시 부여족 공동의 시조신화로써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여 볼 때,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분명 부여의 동명신화가 그 기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겠다.
다음으로, 백제 건국의 시조에 대한 확립을 시도하여 보았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던 시각에서 탈피하여, 설화상으로 온조의 형으로 설정되어 있는 비류를 시조로 확립하여 보았다.
『삼국사기』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왕실에서는 두 가지 제의가 행해지고 있었는데, 바로 '동명제의'와 '구태제의'가 그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부여의 동명신화가 부여족 공동의 시조신화로 기능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백제의 '동명제의'를 통해서는 부여의 동명신화가 전승되었을 것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구태제의를 통해서 숭배된 시조 구태가 누구인가가 문제가 된다고 하겠는데, 필자는 사적인 고찰을 통하여 구태를 비류와 동일인물로 파악하였다.
결국 백제의 건국시조는 온조가 아닌 비류이며, 따라서 백제의 건국신화는 온조설화가 아닌 비류설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백제의 건국신화에는 부여의 동명신화가 기저를 형성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삼국사기』의 비류설화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부여 동명신화를 참고로 하여 백제의 건국신화인 비류설화의 본래적 모습에 대한 재구를 할 수 있었다.
본고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를 온조로 보는 시각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온조를 시조로 보는 시각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의 입장인데도 많은 학자들이 이에 대한 철저한 고증이 없이 그대로 수용한 결과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백제 건국신화에 대한 확립이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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