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의 전생애와 대미자주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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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드골의 전생애와 대미자주외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연표
Ⅰ. 개인사
1. 군인 드골
2.영국으로의 망명과 저항운동
3. 파리 해방 후 드골의 역사적 신념과 비전
4. 드골의 정계 복귀 - 위대한 프랑스의 재건
5. 사임 후 죽음까지

Ⅱ. 드골의 대미자주외교
1. 드골의 대미자주외교의 기반
(1) 드골의 대미인식과 골리즘
(2) 1956년 수에즈 운하: 미국과 영국 vs 프랑스
2. 드골의 대외정책
(1) 핵 개발
① 드골와 덜레스
② 케네디와 드골
(2) NATO 탈퇴
3. 드골과 유럽재건 ․ 통합
(1) 국가중심주의
(2) 영국과 유럽경제공동체의 가입문제
(3) 프랑스 ․ 독일의 협력과 유럽의 재건
4. 드골과 데탕트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또 유럽주둔연합군최고사령부(SHAPE: Supreme Headquqrters Allied Powers Europe)을 벨지움으로 이동시키고, 중부유럽사령부도 네덜란드로 이전시키기로 결정하엿다. 한편 프랑스를 제외한 14개 동맹국들이 1966년 1월에 NATO의 민간참모본부인 각료회의의 본부도 벨지움으로 이전할 것을 확정함으로써 대서양동맹조약과 그 산하기구에서의 프랑스 이탈이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에서 자신들이 이용하던 군사기지를 어절 수 없이 모두 철수하게 되었고 NATO 역시 유럽의 군사대국이자 유럽공동체를 이끌던 프랑스의 탈퇴로 인해 그 위상이 추락하게 된다. 이는 냉전기 미국과 소련간의 이념대결이 치열하던 가운데 민주진영의 균열로 비쳐져 서방세계를 이끌던 미국에게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
드골의 나토 탈퇴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의 방위전략 변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미국은 1953년 이후 덜레스(John Foster Dulles)에 의해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을 나토의 기본 방위전략으로 채택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전략은 1962년 케네디 행정부가 들어서고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국방장관에 의해 ‘단계적 보복’(flexibel response)의 전략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핵무기의 사용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소련공격에 대한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고, 핵무기의 각국 소유에 따른 핵민족주p화(Nationalization of Nuclear Weapons) 경향을 막기 위한 것이 그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의 안보전략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독자적 방위능력과 완전한 주권회복을 강조한 드골의 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3. 드골과 유럽재건 통합
드골은 프랑스의 국제적인 위상과 독립을 위해서 전후 유럽을 재건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유럽협력의 장래에 몰두하였다. 기본적으로 유럽 내에서 실추된 프랑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놓은 것은 프랑스라는 국가를 중심으로 재건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있다.드골은 당시의 유럽이 지리적인 조건에 의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소간의 합의라는 얄타협정에 의해서 임의적이고 상황적으로 정해졌다고 보고 양극구도를 넘어서 ‘유럽만의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이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에서 제3세력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고, 단결된 유럽은 소련의 위협에 대비하는 동시에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도 자주성을 획득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드골이 생각하는 유럽의 재건에 대한 상은 미, 영의 대서양주의에 대항하여 유럽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럽중심주의적인 맥락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국가를 기본단위로 놓는 국가중심적인 맥락 하에서 그려진 것이다.
(1) 국가중심주의
드골은 국가들이 구성요소가 되고 국가들의 독립을 엄격하게 존중하는 국가 연합적 조직을 기본으로 유럽협력을 구상하였다. 국가의 독립과 안보를 가장 중요시했기 때문에 통합이나 초국가성에 기초하여 유럽을 통합하고자 한 어떠한 움직임도 거부하였다. 미국이 서독을 군사적으로 재무장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시키려고 하는데에 대한 반발로 서독에는 독자적인 참모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유럽국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유럽군 창설하려는 플레벵계획이 나오고, 이를 토대로 52년에 유럽방위공동체(EDC)조약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드골은 프랑스군의 지휘권을 초국가적인 유럽군에게 넘겨주어야 했기 때문에 유럽방위공동체에 반대했다. 서독의 재무장을 막는 것보다 프랑스군을 초국가적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초국가주의적인 통합이 핵심적인 가치로 본 프랑스의 주권을 저해한다는 판단을 한 드골은 군사, 안보영역에서의 국가 간 주권에 대한 엄격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전후 유럽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유럽국가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56년에 경제부문에서 구체적인 분야로부터 점진적인 통합을 시작해야 한다고 보고 6개국 사이의 무역장벽을 줄이는 공동시장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유럽경제공동체(EEC)가 설립되었다. 드골은 적극적으로 유럽공동시장을 통한 경제통합에 참여하였다. 정치적인 부문에서 유럽의 통합에 대해 드골은 정부의 원수 혹은 행정부 수반들로 구성되는 정규적인 회동이라는 19세기 유럽협조체제적인 방식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드골의 생각을 반영하여 61년 2월에 푸셰가 외무장관들의 주기적인 회합을 위한 정치적 기구를 만들어서 회원 국가들의 유럽정치를 조정하고 통일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점진적으로 연합 속에서 기존의 유럽공동체들을 이에 집중시키는 기구를 구성할 것을 골자로 하는 안(을 발표하였으나, 다른 국가들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2) 영국과 유럽경제공동체의 가입문제
히스(Edward Heath)를 단장으로 하는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을 위한 협상들은 1961년 10월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협상개시 15개월 후인 1963년 1월 14일 드골 대통령은 마침내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프랑스는 영국이 유럽경제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에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발표하였다. 드골은 영국의 태도와 전통은 특이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프랑스나 독일과 달리 영국은 여전히 미국과 영연방 사이에어 독자적인 외교적 역량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여건 속에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la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적인 외교적 생존전략을 모색하는 가운데 영국은 미국의 안보우산 속에서 평화를 보장받으며 영연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협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는 영국이 프랑스, 독일 등 통합을 주도하는 유럽대육의 국가들과 달이 유럽통합에 대해 느긋한 태도로 관망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영국이 과연 영연방에 대한 모든 기득권과 영연방 국가들과의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농업에 대한 특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자국의 무역체제를 포기하고, 유럽의 무역체제에 순응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면서 드골은 ‘영국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아직 분명하게 대답할 준비가 되어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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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7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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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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