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A. 그의 성장과정
B. 기독교 입신까지
C. 길선주의 목회활동
D. 3.1 운동이후 그의 삶
B. 기독교 입신까지
C. 길선주의 목회활동
D. 3.1 운동이후 그의 삶
본문내용
교회에서 길선주의 부흥회가 개최되었으며, 8월에는 의주에서 사경회가 인도되었다. 이처럼 평양의 장로교, 감리교 연합 부흥회와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통해 평양은 부흥운동의 발원지가 되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곧 ‘백만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영계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 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고,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그가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전도국장을 겸임함으로써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안하여 백만명구령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대를 전국에 파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나, 1907년 3만 7,000여명에서 1911년에는 14만 4,000여명으로 4배 이상 증가되었다.
길선주는 1912년 9월에 지방별로 조직된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제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했을 때, 한국인을 대표한 부회장 겸 전도국장에 선임되었다. 이 때 그는 한국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D. 31운동이후 그의 삶
길선주 목사는 1897년 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평양 지부의 사업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애국 애족 사상이 투철한 그였기에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누구보다 언제나 앞장서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을 겪은 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1912년 길선주도 수난을 당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의 장남 길진형(吉鎭亨, 1891-1917)이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으니 고문 휴우증으로 병을 얻어 1917년에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기에 1919년 3ㆍ1운동에 있어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포된 독립선언서에 길선주의 이름이 들어있음은 당연하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 그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오후 길선주 목사는 황해도 장현리 장연읍 교회에서 집회가 끝나자 곧장 상경하여 독립서명자들이 구금되어 있는 서울 종로경찰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자수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미결수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길선주 목사는 시력이 굉장히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 요한계시록을 만독(萬讀)했으며, 만독 후에 계시록을 모두 외워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길 목사는 광목에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내용을 함축한 말세도을 만들게 된다. 말세도를 제작한 1920년대 초, 길목사는 말세도를 들고 전국 교회를 다니며 교인들에게 말 그대로 말세를 강의했다.
그는 일본 당국의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 전도회를 조직하여 여신도를 동원하여 가정에 복음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920년대에 전국을 휩쓸던 사회주의 풍조 속에서 노동 전도회를 조직하여 노동 계층을 상대로 기독교 사상과 이념을 전파하였으며 또한 상층 사회에서 기독교를 심어 보려는 의도로 지도급에 속한 연로자들로 노인경건회를 조직하는 등 그의 복음전파를 위한 눈부신 활동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해 교훈하는 바 크다.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룬후 1922년부터 길선주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행적은 35년간 설교 2만여 회, 청강자 연 380만여 명, 교회 설립 60여 곳이며, 이수(里數)로는 연6000여리 총 20만 리에 이르며, 그에게서 세례 받은 사람이 3,000여명이상이고, 개종자가 7만 명에 이른다. 그는 부흥집회외에도 청년운동, 농촌운동, 금주운동 등의 사회운동집회에도 종종 연사로 나가 민족의 살길을 외쳤다.
그러나 1926년 장대현 교회의 박윤근등이 유지회(有志會)를 조직하여 길 목사와 당회를 배척하는 분규가 일어났다.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500여명의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교회을 창립하여 목회하게 된다.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길선주 목사의 보수적 신앙에 저항한 것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1927년 장대현 교회를 사임하였고 전국 교회를 상대한 대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를 통하여 목사나 장로 그리고 교사가 된 수만 해도 무려 8백인이 넘는다.
그의 전도운동은 전혀 설경을 중심하여 진리를 전파하는 데 있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해타론(懈惰論)과 말세론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은 신앙을 좀 먹고 나라를 좀 먹는 게으름을 우리 생활에서
1907년의 부흥운동은 곧 ‘백만구령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이 운동은 영계가 1908년 압록강 연안 순회 집회를 마치고 평양에 돌아오면서 구체화되었고, 1910년 제4회 노회에서 그가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전도국장을 겸임함으로써 정식으로 이 문제를 제안하여 백만명구령 운영위원회를 설치하고 전도대를 전국에 파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결과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나, 1907년 3만 7,000여명에서 1911년에는 14만 4,000여명으로 4배 이상 증가되었다.
길선주는 1912년 9월에 지방별로 조직된 7개 노회가 연합하여 제1회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창립했을 때, 한국인을 대표한 부회장 겸 전도국장에 선임되었다. 이 때 그는 한국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중국선교를 제안하여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도 했다.
D. 31운동이후 그의 삶
길선주 목사는 1897년 안창호 선생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였고 평양 지부의 사업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애국 애족 사상이 투철한 그였기에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누구보다 언제나 앞장서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을 겪은 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1912년 길선주도 수난을 당했다. 당시 선천 신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의 장남 길진형(吉鎭亨, 1891-1917)이 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으니 고문 휴우증으로 병을 얻어 1917년에 죽는 등 개인적인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러기에 1919년 3ㆍ1운동에 있어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선포된 독립선언서에 길선주의 이름이 들어있음은 당연하다.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때에 그는 참가하지 못했고 그날 오후 길선주 목사는 황해도 장현리 장연읍 교회에서 집회가 끝나자 곧장 상경하여 독립서명자들이 구금되어 있는 서울 종로경찰서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 자수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미결수로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길선주 목사는 시력이 굉장히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투옥 중 요한계시록을 만독(萬讀)했으며, 만독 후에 계시록을 모두 외워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길 목사는 광목에 요한계시록 1장부터 22장까지 내용을 함축한 말세도을 만들게 된다. 말세도를 제작한 1920년대 초, 길목사는 말세도를 들고 전국 교회를 다니며 교인들에게 말 그대로 말세를 강의했다.
그는 일본 당국의 무서운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 전도회를 조직하여 여신도를 동원하여 가정에 복음을 침투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1920년대에 전국을 휩쓸던 사회주의 풍조 속에서 노동 전도회를 조직하여 노동 계층을 상대로 기독교 사상과 이념을 전파하였으며 또한 상층 사회에서 기독교를 심어 보려는 의도로 지도급에 속한 연로자들로 노인경건회를 조직하는 등 그의 복음전파를 위한 눈부신 활동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해 교훈하는 바 크다.
3ㆍ1운동으로 옥고를 치룬후 1922년부터 길선주는 북간도를 비롯하여 전국을 대상으로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부흥회 행적은 35년간 설교 2만여 회, 청강자 연 380만여 명, 교회 설립 60여 곳이며, 이수(里數)로는 연6000여리 총 20만 리에 이르며, 그에게서 세례 받은 사람이 3,000여명이상이고, 개종자가 7만 명에 이른다. 그는 부흥집회외에도 청년운동, 농촌운동, 금주운동 등의 사회운동집회에도 종종 연사로 나가 민족의 살길을 외쳤다.
그러나 1926년 장대현 교회의 박윤근등이 유지회(有志會)를 조직하여 길 목사와 당회를 배척하는 분규가 일어났다. 1933년에는 결국 길선주 목사가 자신을 지지하는 500여명의 교인들과 따로 이향리(履鄕里)교회을 창립하여 목회하게 된다. 이는 교회 안의 청년-원로, 진보-보수 집단의 갈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회주의적 진보이념을 가진 이들이 길선주 목사의 보수적 신앙에 저항한 것이었다.
길선주 목사는 1927년 장대현 교회를 사임하였고 전국 교회를 상대한 대 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전도를 통하여 목사나 장로 그리고 교사가 된 수만 해도 무려 8백인이 넘는다.
그의 전도운동은 전혀 설경을 중심하여 진리를 전파하는 데 있었으며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증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해타론(懈惰論)과 말세론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인은 신앙을 좀 먹고 나라를 좀 먹는 게으름을 우리 생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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