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글 유세비우스의 생애 서론 예수님의 생애부터
본론 제자들 그리고 순교자들 결론 박해와 왕
적용..유세비우스을 토대로
본론 제자들 그리고 순교자들 결론 박해와 왕
적용..유세비우스을 토대로
본문내용
교사였던 세네카(Senca)의 영향을 받아서 가난한자들을 위한 법령을 만들며 성공적인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되어 위대한 꿈과 향락 욕에 빠져 그를 사랑하던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증오를 받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그로 인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혀 생모와 아내 옥타비아등 친척들을 살해하고 기독교인들의 급속한 확장을 두려워하여 박멸하고자 할 때 때마침 64년 7월18일 로마시에 대 화재가 발생하였다. 대부분이 목조건물이었던 로마시는 6일 동안 3분의 2 이상이 불에 타고 말았다. 평소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시민들은 이 화재가 미친 네로의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일로 인하여 네로 황제는 화재사건에 연루되게 되었고 이 소문은 계속 확대되어 로마시 전체에 걷잡을 수없이 퍼져 나갔다. 네로는 이때 로마 시민들의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화재가 발생하게 된 모든 책임을 유대교에서 갈라진 기독교인들에게 돌리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하여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견이나 사자의 밥이 되거나 십자가에 처형되곤 하였다. 그러나 네로는 결국 그 일로 인하여 로마 원로원의 처형결정으로 위협을 느끼자 부하 4명과 함께 어느 시골의 지하실로 피하여 도망을 갔다. 69년 네로는 체포하러온 군인들의 발굽소리를 듣고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세상에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
네로는 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스스로 자신의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죽음이후 1년간은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내란이 종식 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가 잠시 황제가 되어 통치를 하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관용을 베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곳곳에서 끈임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진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79-81)에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 하라는 명령을 내리었고 티투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내려가 성을 포위하여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어 유대인들의 생활과 삶의 중심이 되었던 헤롯성전은 로마의 대 화제 사건에 연류 되어 결국 AD 70년에 성이 함락된 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2.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Domitian A.D 81-96년)
티누스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황제가 된 로마 전통의 신들을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이라 호칭하여 수도 로마에 금은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유대인들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현금들을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안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을 하며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을 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하도록 하여 핍박을 가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인 사도요한도 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일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밥모섬에서 외로이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다 장래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을 받아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와 같이 독재자가 된 결국은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외국에 나가든지 고국에 있던지 그들이 꼭 찾아보는 성지가 두 곳이 있는데 그 하나가 통곡의 벽이요 또 한곳이가 맛사다 성이다. 맛사다성은 예루살렘의 멸망 시 성을 빠져 도망 나온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예루살렘 남쪽 약100km 의 위치에 있는 천연적인 군사의 요새지이다. 이곳은 해발600m의 깍아 지른 절벽으로 헤롯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궁전까지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3년 동안이나 로마의 군대들과 대치하며 자신들을 지키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10군단의 실바 장군에 의하여 무너지데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들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이렇게 최후를 택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나중에는 남자들이 모여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뽑고 한사람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죽은 시체를 가지런히 뉘어 놓은 뒤 자신도 죽음으로서 택함 받았다는 의를 지켰던 믿음의 성지라고 하여해마다 유대인들은 맛사다를 찾는다.
3.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트라야누스는 5현세중의 한사람으로 제위 기간동안 제국의 영토를 계속 확장시켰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스강, 유프라데스강 까지 확장 시켰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 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음모를 꾀 하는 비밀 결사대로 오인하여 하여 박해를 가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이름도 사용할 수 없게 하고112년에는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에 대하여 해로운 단체로 지목이 되어 인정받지 못함하고 모임조차도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트라이야누스 황제 때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 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 당할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안디옥 교회는 스테반의 신앙을 따르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로 바나바가 초대 감독이었고 이그나티우스가 2대 감독이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이그나트우스는 예수님당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사랑을 받았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될 정도로 믿음이 있는 교회였으며 안디옥은 기독교회의 동방에 수도요 항구라고 할 정도로 일설이 있는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일곱 통의 서신은 서머나에 있는 폴리
“세상에 나 같은 예술가를 잃는 구나”
네로는 그 같은 마지막 말을 남긴 뒤 스스로 자신의 칼로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네로 황제의 죽음이후 1년간은 내란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내란이 종식 후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69-79)가 잠시 황제가 되어 통치를 하였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많은 관용을 베풀려고 하였으나 유대인들의 곳곳에서 끈임 없는 반란을 일으켰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진압하지 못하고 자신의 장남인 티투스(79-81)에게 예루살렘 성을 점령 하라는 명령을 내리었고 티투스는 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내려가 성을 포위하여 장악하였다. 이렇게 되어 유대인들의 생활과 삶의 중심이 되었던 헤롯성전은 로마의 대 화제 사건에 연류 되어 결국 AD 70년에 성이 함락된 뒤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2.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 (Domitian A.D 81-96년)
티누스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무관심하였다. 그는 황제가 된 로마 전통의 신들을 재건하려 노력하였으나 기독교인들의 반대로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신이라 호칭하여 수도 로마에 금은 형상을 만들고 우상숭배를 강요하며 유대인들 매년 예루살렘에 보내던 현금들을 별도의 법률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당시 로마 당국자들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당시 기독교인들을 유대교의 풍습들을 대부분 좇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같은 종파로 간주하여 박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도미티안은 기독교인들 때문에 로마의 모든 신들이 노했다고 주장을 하며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을 하거나 불순분자로 몰아 맹수들과 결투하도록 하여 핍박을 가했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한사람인 사도요한도 이때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일로 인하여 사도 요한은 밥모섬에서 외로이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다 장래 이루어질 요한계시록을 받아쓰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도미티안 황제는 네로와 같이 독재자가 된 결국은 자신의 궁전에서 비참하게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된 뒤 유대인들이 외국에 나가든지 고국에 있던지 그들이 꼭 찾아보는 성지가 두 곳이 있는데 그 하나가 통곡의 벽이요 또 한곳이가 맛사다 성이다. 맛사다성은 예루살렘의 멸망 시 성을 빠져 도망 나온 960명의 유대인들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던 예루살렘 남쪽 약100km 의 위치에 있는 천연적인 군사의 요새지이다. 이곳은 해발600m의 깍아 지른 절벽으로 헤롯 대왕이 유사시를 대비하여 자신의 궁전까지 지어 놓았던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3년 동안이나 로마의 군대들과 대치하며 자신들을 지키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지였다. 그러나 로마의 10군단의 실바 장군에 의하여 무너지데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로마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자 로마인들의 손에 죽는 수치보다는 스스로 죽자” 이렇게 최후를 택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나중에는 남자들이 모여 10명씩 조를 짜서 제비뽑고 한사람이 9명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자가 죽은 시체를 가지런히 뉘어 놓은 뒤 자신도 죽음으로서 택함 받았다는 의를 지켰던 믿음의 성지라고 하여해마다 유대인들은 맛사다를 찾는다.
3. 트라야누스(Trajanus 98-117)
트라야누스는 5현세중의 한사람으로 제위 기간동안 제국의 영토를 계속 확장시켰는데 라인강과 도나우스강, 유프라데스강 까지 확장 시켰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황제 숭배를 강요 하였고,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음모를 꾀 하는 비밀 결사대로 오인하여 하여 박해를 가했다. 트라이야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에서 이름도 사용할 수 없게 하고112년에는 법조문을 만들어 조직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기독교는 로마에 대하여 해로운 단체로 지목이 되어 인정받지 못함하고 모임조차도 가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트라이야누스 황제 때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이 되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감독이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된 후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겨 순교 당할 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안디옥 교회는 스테반의 신앙을 따르던 무리들이 세운 교회로 바나바가 초대 감독이었고 이그나티우스가 2대 감독이었는데 전승에 의하면 이그나트우스는 예수님당이 예수님의 품에 안기어 사랑을 받았던 어린아이가 바로 그였다고 한다. 또한 안디옥 교회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될 정도로 믿음이 있는 교회였으며 안디옥은 기독교회의 동방에 수도요 항구라고 할 정도로 일설이 있는 교회이다.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의 현장으로 끌려가면서 7개의 서신을 남겼는데 일곱 통의 서신은 서머나에 있는 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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