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관성묘(關聖廟)
2. 낙산공원
3. 이화장(梨花莊)
4. 동묘(東廟)
2. 낙산공원
3. 이화장(梨花莊)
4. 동묘(東廟)
본문내용
게 하고 평면과 내부 공간 분위기가 중국식인데 비하여, 지붕은 전통적인 궁궐건축 기법을 따라 대조를 이룬다. 내부가 전실과 주실로 구분된 것에 따라, 지붕도 두 개의 팔작지붕을 T자형으로 합친 것같이 특이한 형태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지붕은 모두 지붕마루를 양성하고 잡상을 장식하는 등, 전형적인 한국 궁궐형식의 수법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 관성묘 : 3호선 동대입구 역 1번 출구
- 낙산공원 :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 동묘 : 6호선 동묘앞 역 3번 출구
누구나 읽어보았던 소설 '삼국지'속의 영웅,, 관운장 중국 후한말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촉나라를 세운 관운장은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의 전쟁 속에서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모습과 의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충신의 전형적인 관우가 신성시되어 관왕 혹은 관제라고 불리면서 무신(武神)과 재물신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중국의 관제신앙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처음 들어오게 된다. 그 역사적 흔적을 문화유산인 '동묘'(서울 종로구 소재)에 남아있다. 이번 답사에서 중국의 관제 신앙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변화하게 되는지 그리고 관우를 모신 사당인 동묘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삼국지를 읽어 보거나 많이 접해 본 여러분들이라면 관우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유비(劉備), 장비(張飛)와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 토벌에서 시작하여, 유비의 촉나라를 세우는 데 1등 공신이 되었고, 결국 조조(曺燥)와 손권(孫權)의 형주 협공때 형주를 지키다 끝내 목숨마저 버린 의인(義人)이자 용장(勇將)이 바로 관우(關羽)였다. 제목에서 붙인 관운장의 운장이 그의 호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찍이 조조의 모신 정욱은 그와 장비의 용맹에 두려워한 나머지 그 둘을 가리켜 만명을 능히 당해 낼 수 있는 만인지장(萬人之將)이자. 호장(虎將) 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여 오만불손한 장수 가운데 하나로도 손꼽히고 있다.
헌데, 이러한 관우의 사당이 서울 동대문 부근에 버젓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다. 경북의 성주와 안동, 그리고 서울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남묘라 불리던 곳도 전부 이런 관우를 모시는 사당들이다.
1. 관우 사당- 동묘가 세워진 까닭
중국인 무장 관우를 모시는 이런 사당이 어째서 우리나라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앞서 이야기 한 관우는 이후 중국인들의 충절의 상징이자 훌륭한 군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중국인들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관우는 후대 역대 황제들에 의해 왕으로, 혹은 황제로 높여 불리워지고 있다. 그래서 관우를 혹, 관왕 또는 관성제 라 불리우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우리나라에서 관우가 모셔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때 부터다.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문이 중시되고 무가 경시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문이 중시되고 무가 상대적으로 경시되던 시대에 무장 관우가 모셔진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공자의 사당인 문묘가 문인의 사당이라면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 혹은 동묘는 바로 씩씩한 무인들의 이미지가 강한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무과에 응시하여 붙은 선달들은 이곳에 나아가 참배하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관우 사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선조때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의 구원병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부터다. 관왕묘의 건립 동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였던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와 우리나라의 명에 대한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건물을 두고 사대명분의 또 하나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찾아가는 길
- 관성묘 : 3호선 동대입구 역 1번 출구
- 낙산공원 : 1호선 동대문역 1번 출구
- 동묘 : 6호선 동묘앞 역 3번 출구
누구나 읽어보았던 소설 '삼국지'속의 영웅,, 관운장 중국 후한말 유비, 장비와 함께 의형제를 맺고 촉나라를 세운 관운장은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의 전쟁 속에서 뛰어난 무장으로서의 모습과 의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충신의 전형적인 관우가 신성시되어 관왕 혹은 관제라고 불리면서 무신(武神)과 재물신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중국의 관제신앙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처음 들어오게 된다. 그 역사적 흔적을 문화유산인 '동묘'(서울 종로구 소재)에 남아있다. 이번 답사에서 중국의 관제 신앙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변화하게 되는지 그리고 관우를 모신 사당인 동묘는 어떠한 역사적 의미를 지는지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삼국지를 읽어 보거나 많이 접해 본 여러분들이라면 관우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줄로 안다. 유비(劉備), 장비(張飛)와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황건적 토벌에서 시작하여, 유비의 촉나라를 세우는 데 1등 공신이 되었고, 결국 조조(曺燥)와 손권(孫權)의 형주 협공때 형주를 지키다 끝내 목숨마저 버린 의인(義人)이자 용장(勇將)이 바로 관우(關羽)였다. 제목에서 붙인 관운장의 운장이 그의 호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찍이 조조의 모신 정욱은 그와 장비의 용맹에 두려워한 나머지 그 둘을 가리켜 만명을 능히 당해 낼 수 있는 만인지장(萬人之將)이자. 호장(虎將) 이라고 칭한 바 있다. 그러는 한편으로 자존심이 상당히 강하여 오만불손한 장수 가운데 하나로도 손꼽히고 있다.
헌데, 이러한 관우의 사당이 서울 동대문 부근에 버젓이 위치해 있다. 뿐만 아니다. 경북의 성주와 안동, 그리고 서울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남묘라 불리던 곳도 전부 이런 관우를 모시는 사당들이다.
1. 관우 사당- 동묘가 세워진 까닭
중국인 무장 관우를 모시는 이런 사당이 어째서 우리나라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앞서 이야기 한 관우는 이후 중국인들의 충절의 상징이자 훌륭한 군인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중국인들의 상징처럼 인식되던 관우는 후대 역대 황제들에 의해 왕으로, 혹은 황제로 높여 불리워지고 있다. 그래서 관우를 혹, 관왕 또는 관성제 라 불리우는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다.
우리나라에서 관우가 모셔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때 부터다. 알다시피 조선시대는 문이 중시되고 무가 경시되던 시대이기도 하다. 문이 중시되고 무가 상대적으로 경시되던 시대에 무장 관우가 모셔진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공자의 사당인 문묘가 문인의 사당이라면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 혹은 동묘는 바로 씩씩한 무인들의 이미지가 강한 사당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무과에 응시하여 붙은 선달들은 이곳에 나아가 참배하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버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관우 사당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선조때 일어난 임진왜란 당시 중국 명나라의 구원병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부터다. 관왕묘의 건립 동기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출병하였던 명나라 장수들의 요구와 우리나라의 명에 대한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 건물을 두고 사대명분의 또 하나의 상징이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