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본론
(1) 가야 연맹의 형성
(2) 가야의 문화
- 유민 -
- 유적 -
(3) 가야의 정치체제
- 전기 연맹체제 -
- 후기 연맹체제 -
(4) 일본 규슈로의 문화 전파
(5) 가야의 멸망
(6)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3. 마치며
2. 본론
(1) 가야 연맹의 형성
(2) 가야의 문화
- 유민 -
- 유적 -
(3) 가야의 정치체제
- 전기 연맹체제 -
- 후기 연맹체제 -
(4) 일본 규슈로의 문화 전파
(5) 가야의 멸망
(6)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3. 마치며
본문내용
라 지방에 자리잡은 천황가의 야마토 정부도 점차 그 주변일대를 병합하여 나아갔다. 마침내 6세기 초에는 이 2대 왕조가 충돌하는 사태가 빚어졌으며 이 때에 야마토 정권은 북규수를 정복하였다. 그 이전 시대에 있어서 한반도 및 중국과 통교하던 왜의 실체는 규슈의 지쿠시를 중심으로 하면서 가야를 본국으로 여기는 규슈의 왜왕조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학자들의 당연하게 받아들인 왜 오왕은 야마토계 일본천황이라는 전제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은 규슈 왕조의 뒤를 이은 야마토 왕조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일본 고대 황국사관의 중심인 ‘임나일본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는 규슈의 왜가 본국인 가야 전 지역에 두었던 임시교역소로서 그 중심지는 함안이다.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다는 4~6세기까지는 가야 제국 자체로 보아도 발전기로서 정치적 신분제도가 확립되었고, 문화도 향상되는 시기였다. 또한 산업면에서도 농업의 생산력은 증대하고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제철업은 초강의 단계인 대량생산이 가능하여 무기와 농기구와 발달하였고 군사제도도 확립되어 보기병, 궁병, 가지극병 등의 제 부대를 편성,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가야는 신라, 백제와 연합작전을 펼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지니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야마토의 왜가 가야 제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가야의 발전기라는 대세론에서 판단해 볼 때도 있을 수 없는 억설인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규슈의 왜가 본국인 가야지방 전역에서 수시로 행하였던 임시적 교역소로서 이 곳을 통하여 백제까지도 교역을 교환하였는데 『일본서기』가 이를 과장하여 임나일본부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가야와 규슈의 왜 사이에 형성된 임시적 교역소가 게이타이 이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게이타이기부터는 백제가 가야영토 침략의 야욕으로 야마토 정권과 결탁하여 백제의 선진문물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왜지를 통일한 야먀토 정권으로 하여금 가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게 하였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 ‘임나일본부’인 것이다.
3. 마치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비슷한 시기레 건국되어 6세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우수성과 주체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강력한 국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구분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가야연맹체에 속해 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국가가 발전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연맹형태를 극복하지 못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이룩한 삼국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경복 외,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03.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혜안, 2002.
윤내현,『한국 고대사』, 삼광 출판사, 1991.
따라서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은 규슈 왕조의 뒤를 이은 야마토 왕조에서부터 시작된다. 결국 일본 고대 황국사관의 중심인 ‘임나일본부’도 이러한 맥락에서 그 실체를 찾아볼 수 있다. ‘임나일본부’는 규슈의 왜가 본국인 가야 전 지역에 두었던 임시교역소로서 그 중심지는 함안이다.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었다는 4~6세기까지는 가야 제국 자체로 보아도 발전기로서 정치적 신분제도가 확립되었고, 문화도 향상되는 시기였다. 또한 산업면에서도 농업의 생산력은 증대하고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제철업은 초강의 단계인 대량생산이 가능하여 무기와 농기구와 발달하였고 군사제도도 확립되어 보기병, 궁병, 가지극병 등의 제 부대를 편성,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가야는 신라, 백제와 연합작전을 펼 수 있을 정도의 국력을 지니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야마토의 왜가 가야 제 지역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였다는 것은 가야의 발전기라는 대세론에서 판단해 볼 때도 있을 수 없는 억설인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규슈의 왜가 본국인 가야지방 전역에서 수시로 행하였던 임시적 교역소로서 이 곳을 통하여 백제까지도 교역을 교환하였는데 『일본서기』가 이를 과장하여 임나일본부로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가야와 규슈의 왜 사이에 형성된 임시적 교역소가 게이타이 이전까지 계속되었는데, 게이타이기부터는 백제가 가야영토 침략의 야욕으로 야마토 정권과 결탁하여 백제의 선진문물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는 대신 왜지를 통일한 야먀토 정권으로 하여금 가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게 하였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 ‘임나일본부’인 것이다.
3. 마치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비슷한 시기레 건국되어 6세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우수성과 주체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강력한 국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가야는 삼국과 같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형성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구분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즉 가야연맹체에 속해 있던 소국들은 각기 정치적인 독자성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다른 지역과 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국가가 발전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가야는 멸망할 때까지 연맹형태를 극복하지 못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이룩한 삼국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참고문헌 >
김경복 외,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2003.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혜안, 2002.
윤내현,『한국 고대사』, 삼광 출판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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