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표현주의
<목 차>
Ⅰ. 표현주의란?
Ⅱ. 표현주의 회화의 세 그룹
1. 브뤼케그룹 (다리파)
2. 슈투름 그룹
3. 청기사 그룹
Ⅲ. 허무주의 대안으로서 표현주의
Ⅳ. 표현주의 작가들
1.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2. 프란츠 마르크
3. 바실리 칸딘스키
4. 에릭 헤켈
5. 에밀 놀데
6. 에드바르드 뭉크
<참고문헌>
<목 차>
Ⅰ. 표현주의란?
Ⅱ. 표현주의 회화의 세 그룹
1. 브뤼케그룹 (다리파)
2. 슈투름 그룹
3. 청기사 그룹
Ⅲ. 허무주의 대안으로서 표현주의
Ⅳ. 표현주의 작가들
1.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2. 프란츠 마르크
3. 바실리 칸딘스키
4. 에릭 헤켈
5. 에밀 놀데
6. 에드바르드 뭉크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베를린 미술 협회전에 출품하였는데, 그것들은 초기의 애수어린 서정적 성격을 더욱 내면화하고, 생과 사, 사랑과 관능, 공포와 우수를 강렬한 색채로 표현하고 있어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여기서 뭉크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된 것이다. 게다가 베를린에서의 스트린드베리와의 만남은 그 깊이를 더하게 하였다. 표현주의 운동은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으나, 후에는 독일에서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고흐와 고갱을 선두로 이들은 인상주의자들의 밝은 색채를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이를 오히려 감성적이고 상징적인 목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뭉크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인 불안과 공포, 애정, 증오 등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함으로써 일찌감치 표현주의에 영향을 준 직접적인 선구자였다. 20세기 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한 표현주의 화가는 회화의 목적을 단순히 자연의 재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르네상스 이후 유럽 미술의 전통적인 규범을 떨쳐버리고 감정과 감각의 직접적인 표현에 회화의 진정한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표현주의 회화의 선이나 형태, 색채 등은 이 같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된 수단이었다. 균형과 질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전통적인 개념을 무시했던 이들은 오직 감정의 강렬한 전달과, 왜곡을 통한 주제와 내용의 강조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뭉크'는 승려를 뜻하는 말로, 그의 할아버지는 고위의 성직자였고 아버지는 빈민가의 의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병약하고 민감했던 뭉크에게 의사가 되라는 말을 수없이 했다. 하지만 시대의 불안과 공포, 그 안에서 또 다른 희망을 추구했던 뭉크는 아버지의 꿈을 저버리고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파리로 간 그는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림을 통해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절망과 불안의 삶을 산 화가였던 뭉크는 스스로 요람에서부터 죽음을 안 사람이라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 뭉크는 죽음 대신 그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서 인생의 어두운 면을 그려낸 화가였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누이의 죽음마저 지켜봐야 했다. 정신적으로 나약한 형제들, 신경질적인 아버지. 유년 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그의 삶이 불행하고 어두웠던 만큼 그의 작품이 갖는 주된 테마는 죽음과 사랑이었다. 뭉크는 자신의 생애 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뭉크를 절망의 화가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뭉크의 그림에는 절망적인 인간의 모습만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통해 평생 동안 끊임없는 생명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의 절망 속에는 언제나 희망이 예견되어 있었다. 1893년부터 1908년까지 뭉크는 독일에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뭉크는 인생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내용은 자신의 인생을 바탕으로 이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상징적으로 표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때 제작된 <인생의 춤>, <절규>, <흡혈귀>, <죽음의 소녀> 등은 뭉크 자신만의 개성으로 여타 상징주의 화가들을 사로잡기에 이른다. 뭉크가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구분되었던 이유는 유행에 대한 뭉크의 경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뚜렷한 주관을 갖고 당시의 화단에서 유행했던 소재들을 따라 그리는 일을 거부했다. 자신 스스로도 “나는 더 이상 실내화와 책 읽는 사람, 뜨개질 하는 여자 따위의 그림은 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사람, 숨쉬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그릴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그림이 갖는 성스러움을 알게 될 것이고, 그 앞에 서면 예배를 드릴 때처럼 모자를 벗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뭉크의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화가 자신이 목적했던 감정을 관객들에게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는 감정의 내면세계를 묘하게 들쑤신다. 그리고 우리의 감성을 뭉클하게 만들어 버린다. 인간적인 본능의 심연을 파헤치는 뭉크의 힘은 그림을 바라보는 이들의 내면세계를 구석구석 뒤흔든다. 인간이 갖는 욕망과 질투, 우울, 슬픔, 고독의 감정들을 뭉크는 반복해서 되뇌였다. 이 같은 강박관념을 이겨내지 못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뭉크의 작품으로 인해 당대 표현주의 화가들은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뭉크는 정작 표현주의 화가이기를 거부한다. 인간의 고조된 감정을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그는 표현주의 화가들이 쉽게 넘나들지 못하는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대 화단에서 일찌감치 주목을 받은 뭉크는 여든 살의 생애를 살면서 그는 창작의 혼을 성실하게 불태웠다. 물론 그에게도 칭찬의 목소리와 함께 비난의 여지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생에 대한 절망과 불안감에 시달렸던 화가 뭉크, 하지만 그는 죽음보다 격렬한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을 화폭 위에 옮겨놓았다. 따라서 뭉크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죽음의 사선을 넘나드는 일이었다. 뭉크는 명작 《생명의 프리즈》 연작을 완성하고, 94년부터 판화를 시작하였다. 1908∼09년에는 신경병으로 코펜하겐에서 요양하였으며, 그 후부터 색채가 밝아지고, 문학적·심리적인 정감이 두드러졌다. 37년 나치스는 독일에 있는 그의 모든 작품을 퇴폐예술이라 하여 몰수해버린다. 만년에는 은둔생활을 하였다. 한편 판화가로서도 근대의 대작가이며 표현파의 선구자이자, 노르웨이 근대회화의 이재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의 《봄》 《질투》 《절규》 《다리 위의 소녀들》 《저녁시간》 《죽음의 방:The Death Chamber》 등의 작품이 있다.
<참고문헌>
김미정, 2006, 서양미술사, 미진사
김현화, 2007, 20세기 미술사, 한길아트
김영나, 2005, 서양미술의 기원, 시공사
김숙, 2006, 표현주의, 열화당
김길중 역, 2005, 표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부
<참고문헌>
김미정, 2006, 서양미술사, 미진사
김현화, 2007, 20세기 미술사, 한길아트
김영나, 2005, 서양미술의 기원, 시공사
김숙, 2006, 표현주의, 열화당
김길중 역, 2005, 표현주의,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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