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에스파냐, 영국의 부흥기 정치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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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 에스파냐, 영국의 부흥기 정치구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연구 대상의 설정(각 제국 및 그 정치 구조의 고찰에 관한 특정한 시기 설정) 사유와 의의
**왜 정치 전반을 연구하려 했는가?
A. 로마
B. 에스파냐
C. 영국

2. 연구 결과
A. 로마
B. 에스파냐
C. 영국

3. 결어

본문내용

대의 도시 이스탄불의 인구는 70만명을 넘지 못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로마사 연구 초기에 악제로 단죄되었던 티베리우스는 나중에 볼테르가 재평가할 만큼 내치에 있어서 명군이었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를 악제로 단죄하는 자들은 통치 후반기의 공포스러운 시대 상황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로마법적인 정신에 근거하여 속주 총독 피소에게 유죄를 선고하더라도 그의 자식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도록 애썼고 몇 년 후에는 피소의 아들 중 한 사람을 집정관 자리에 앉히기까지 했을 정도로 온건한 상식의 소유자였다. 통치 후반기에 세야누스를 국가반역죄로 처형한 이후 그의 일가족을 몰살했던 것은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를 독살하는 데에 드루수스의 아내였지만 세야누스와 정을 통하고 있던 리비아가 개입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티베리우스가 시종일관 \'테러블\'했다라고 보기보다 부정이 잠시나마 북받쳐 올랐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국방과 외교 등 대외적인 정치에 있어서도 티베리우스는 시의적절한 정책을 채택했다. 선제 아우구스투스 생존 시에는 그의 뜻을 받들어 게르만 족을 격파하며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게르만 족의 수장인 아르미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 친선 관계를 맺어 그를 제거했다. 도나우 강 하류 지역을 제패하기 위해 트라키아 인들의 내분을 이용했으며, 동방의 파르티아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자마자 즉각 비텔리우스에게 동방 전체의 군 부대를 지휘할 통수권을 주어 내보내는 압력을 가해 파르티아의 로마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저지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에 대해 \"로마의 안전은 군사가 아니라 정치로 보장되었다.\"고 말했으며 티베리우스에 대해 혹평을 가했던 타키투스도 그의 연대기에서 \"티베리우스의 최대 관심사는 제국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몸젠은 역사 저술로 노벨 문학상까지 받은 사람이다. 이 몸젠이 티베리우스에 대해 내린 평가는 \"로마가 가졌던 가장 훌륭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8>, 발행처-한길사, 223쪽
이러한 제정의 초기 통치자들이 확립한 시스템에 힘입어 5현제 시대에는 동시대 로마인들마저 \'Saeculum Aureum(황금 시대)\'라고 불렀을 정도였으며 비판적 정신에 투철한 타키투스조차 저작을 별로 남기지 않을 정도였다. 기번 역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5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한 이후부터야 제국이 흔들렸다고 단언한다. 그러한 찬사,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5현제 중 첫 번째인 네르바 황제는 짧은 재위 기간과 70세에 어울리는 온건함으로써 두 번째 현제인 트라야누스에게 제국을 인수인계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어 선제 아우구스투스로부터의 체제를 따라 원로원과 시민의 동의를 얻어 권력을 인수한 트라야누스 황제는 그 특유의 근면성실함을 대내외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우선 그는 원로원과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는 데에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재위 기간 동안 국가반역죄로 처벌받은 원로원 의원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에게 호감을 심어주는 일에 성공했다. 이는 트라야누스의 사후 그를 신격화하자고 원로원이 즉시 결의한 것에 반영되어있다. 또한 그는 실용적인 사회간접자본의 정비에도 성실하게 임했다. 고래로부터의 대도시들을 보면 항상 대하천에 인접해 있었으며 그 외항을 가지고 있었다. 템스 강 주변의 런던은 그 자체로 항구 역할을 수행했으며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 운하의 도시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베네치아 역시 수상 도시로까지 불리며 그리스의 아테네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역시 이러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북경 역시 외항으로 천진을 가지고 있으며 서울 역시 한강과 외항으로서의 인천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경향대로 로마 역시 선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건축된 오스티아 외항을 가지고 있었다. 이 항구를 트라야누스 황제는 대규모로 개축했다. 로마는 인구가 100만 명을 넘는, 당대에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대도시였으므로 주식인 밀을 운반하는 화물선들이 매일 출입해야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트라야누스는 1개의 대피항과 로마와는 가도로 이어진 2개의 외항을 신설하여 오스티아 항구의 부담을 줄이는 등 드러나지는 않는 검소한 일이지만 중요한 \'식량 안보\'를 보장하는 데에 힘썼다. 또한 그는 속주 총독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와 관련해서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저서인 [로마인 이야기9-현제의 세기] 165쪽에 참조할 만한 재판 사례 몇 가지가 실려 있다. 한편 트라야누스는 내치에서만 빛을 발한 황제가 아니었다. 그는 대외적인 정책에 있어서는 외교보다 로마의 막강한 무력에 호소하는 유형의 인물이었다. 제위 초기에는 그간 굳건히 지켜오던 도나우 강 방위선을 넘어 다키아 왕국을 정벌하고 그 지역에 속주를 설치했으며 제위 후반에는 파르티아에 대한 군사 원정을 시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단순히 로마군의 막강함을 믿고 무작정 시도된 것이라면 결과는 로마 제국의 불행으로 끝났겠지만, 트라야누스에게는 풍부한 실전 경험과 전략적 기질이 있었고 특유의 근면성실함으로 대외적인 안전 보장에도 성공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것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어떤 연구가가 \'기능과 효율의 신봉자\'라는 별칭을 붙였을 정도로 제국의 통치 체제 정비에 열심이었다. 황제의 책무인 안전 보장과 속주 통치,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위해서는 현지 시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20년간 변경과 외딴 벽지를 돌아다닌 이 황제는 영국에 아직도 남아있는, 그리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로 남아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신설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내정 안정을 위해 현대의 영국, 도나우 강 연안, 터키와 시리아 및 요르단, 이집트까지 모두 돌아다닌 황제는 법령집을 집대성하고 만신전(판테온:Pantheon) 을 세워 제국 전체를 포용하겠다는 이념을 확고히 했다. 카스텔 산탄젤로(산탄젤로 성)을 건축하여 대내적으로 황가의 권위 또한 드높였으며 그리스 철학에 관심이 있었기

키워드

정치,   서양,   문화,   제국,   로마,   영국,   에스파냐,   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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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7.07.31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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