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영락제의 삶과 그의 업적 >
1. 서 론
2. 본 론
1) 영락제의 왕위 등극과정
2) 등극 후 정벌활동
3) 정화의 해외원정
4) 영락제와 궁녀참변
(1) 궁녀 독살사건
(2) 궁녀 환관 밀회사건
5) 영락제와 그의 자식들
6) 영락제의 성공요인
3. 결 론
- 참 고 문 헌 -
1. 서 론
2. 본 론
1) 영락제의 왕위 등극과정
2) 등극 후 정벌활동
3) 정화의 해외원정
4) 영락제와 궁녀참변
(1) 궁녀 독살사건
(2) 궁녀 환관 밀회사건
5) 영락제와 그의 자식들
6) 영락제의 성공요인
3. 결 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맡아 대업을 준비하였고, 남경성에도 많은 간자(間者)를 심어 급변하는 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냈으며, 원기와 금충을 발탁하여 연왕에게 천거하였다. 도사인 원기는 관상에 뛰어나고 인물의 그릇을 파악할 줄 알았으며, 먼곳에 있는 기인이사들을 초빙하여 연왕의 인맥을 관리하고 휘하에 거두었으며, 산천지리에 밝은 금충은 전략전술과 군사배치에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적은 숫자로 병력과 물자가 풍부한 중앙정부군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고 봉쇄하였다.
세번째로 북방지역의 승려, 도사, 관리, 번왕, 장군들의 지지였다. 북방은 오랫동안 불교를 숭배한 요(遼;907-1125), 금(金;1115-1234)의 지배를 받은 반면에, 남방지역은 북송(北宋;960-1127), 남송(南宋;1127-1279)의 관할아래 유학을 받드는 문인(文人)들의 세상이었다. 여기에다 중국의 남북(南北)을 지배한 원(元)나라는 티벳불교를 숭배하고 전국적으로 도교와 불교도 장려하였다. 따라서 참모 요광효와 원기는 북방에 거주하는 많은 승려들과 도사, 무인들을 연왕의 지지세력으로 이끄는데 성공하였으며, 4년에 걸친 전쟁에서 남방에 살고있는 많은 불교, 도교세력과 무인들이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정세를 지켜보는 관망파(觀望派)로 만들 수 있었다.
네번째는 명분의 승리였다. 연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성혁명을 주장하지 않고, 임금의 주변에서 모함하고 아첨을 떠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청군측(淸君側)을 반란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면 번왕들과 각지의 관리들로부터 도덕적인 공격에 휘말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회하를 건너 양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칫 할지론(割地論)에 의거한 남북분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끝내 거부하고 양자강을 도하하여 남경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을 받아 들였다면 명분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건문제에게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을 것이며, 곧이어 남경성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한 근황병(勤皇兵)에게 포위되어 사태는 심각한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몰랐다.
다섯 번째는 국제정세도 한몫하였다. 원나라는 태조 징기스칸(1206-1227)의 손자인 7대 황제인 몽케(蒙哥;1251-1259)가 죽고, 그 다음의 칸(汗)의 자리를 놓고 동생인 쿠빌라이(忽必列)와 아리부케(阿里不哥)가 전쟁을 치루었고, 승리한 쿠빌라이는 원세조(元世祖;1260-1294)가 되었으며, 패배한 아리부케는 서몽골 지역으로
세번째로 북방지역의 승려, 도사, 관리, 번왕, 장군들의 지지였다. 북방은 오랫동안 불교를 숭배한 요(遼;907-1125), 금(金;1115-1234)의 지배를 받은 반면에, 남방지역은 북송(北宋;960-1127), 남송(南宋;1127-1279)의 관할아래 유학을 받드는 문인(文人)들의 세상이었다. 여기에다 중국의 남북(南北)을 지배한 원(元)나라는 티벳불교를 숭배하고 전국적으로 도교와 불교도 장려하였다. 따라서 참모 요광효와 원기는 북방에 거주하는 많은 승려들과 도사, 무인들을 연왕의 지지세력으로 이끄는데 성공하였으며, 4년에 걸친 전쟁에서 남방에 살고있는 많은 불교, 도교세력과 무인들이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정세를 지켜보는 관망파(觀望派)로 만들 수 있었다.
네번째는 명분의 승리였다. 연왕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성혁명을 주장하지 않고, 임금의 주변에서 모함하고 아첨을 떠는 간신을 제거한다는 청군측(淸君側)을 반란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역성혁명을 주장하였다면 번왕들과 각지의 관리들로부터 도덕적인 공격에 휘말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받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회하를 건너 양주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칫 할지론(割地論)에 의거한 남북분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끝내 거부하고 양자강을 도하하여 남경성을 공략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것을 받아 들였다면 명분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건문제에게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하였을 것이며, 곧이어 남경성을 지원하기 위해 이동한 근황병(勤皇兵)에게 포위되어 사태는 심각한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몰랐다.
다섯 번째는 국제정세도 한몫하였다. 원나라는 태조 징기스칸(1206-1227)의 손자인 7대 황제인 몽케(蒙哥;1251-1259)가 죽고, 그 다음의 칸(汗)의 자리를 놓고 동생인 쿠빌라이(忽必列)와 아리부케(阿里不哥)가 전쟁을 치루었고, 승리한 쿠빌라이는 원세조(元世祖;1260-1294)가 되었으며, 패배한 아리부케는 서몽골 지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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