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글
I. 신라 초기의 국가 형성
1.박(朴)·석(昔)·김(金)의 시대
2.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 지증왕(智證王)
II. 성골(聖骨)의 시대
1. 불교로서 신라인들을 규합한 법흥대왕(法興大王)
2.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 지증왕(智證王)
3. 못다 핀 채 스러져간 진지왕(眞智王)
4. 진종설을 절대시한 진평왕(眞平王)
5. 최초의 여왕, 여성적인 힘으로 국정을 이끈 선덕왕(善德王)
6. 성골로서 마지막 왕위를 계승한 진덕여왕(眞德女王)
III. 넓어지는 지평선, 중대의 진골(眞骨) 왕실
1. 새로운 왕실의 싹 비형랑(鼻荊郞)
2. 무열왕계와 통일신라
나오는 글
I. 신라 초기의 국가 형성
1.박(朴)·석(昔)·김(金)의 시대
2.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 지증왕(智證王)
II. 성골(聖骨)의 시대
1. 불교로서 신라인들을 규합한 법흥대왕(法興大王)
2.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대기만성형(大器晩成形) 지증왕(智證王)
3. 못다 핀 채 스러져간 진지왕(眞智王)
4. 진종설을 절대시한 진평왕(眞平王)
5. 최초의 여왕, 여성적인 힘으로 국정을 이끈 선덕왕(善德王)
6. 성골로서 마지막 왕위를 계승한 진덕여왕(眞德女王)
III. 넓어지는 지평선, 중대의 진골(眞骨) 왕실
1. 새로운 왕실의 싹 비형랑(鼻荊郞)
2. 무열왕계와 통일신라
나오는 글
본문내용
것이다.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속에 진지왕은 정란황음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진지왕 재위 3년, 아름다운 도화녀를 데리고 와 범하려하자 도화녀가 남편이 있음을 이유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바로 얼마 후 진지왕은 폐위되었는데 3년 후 도화녀의 남편이 죽은 후에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도화녀의 남편은 단 한번도 실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려는 민중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도화녀의 신분도 사량부(沙梁部)의 서녀(庶女)라고 되어 있지만 그녀의 몸가짐으로 미루어보아 일반 서민의 딸이 아니라 진골 정도의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지왕이 성년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이미 결혼했을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후궁은 제 2신분인 진골집안에서 맞아들인 듯하다.
이 일로 사내아이를 낳아 비형이라 이름 하였다. 진평왕이 거두어 집사(執事)직을 맡겼는데 밤마다 귀신을 거느리고 놀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귀신을 잡는 비형의 재주에 노랫말을 짓고 글로 써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설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도화녀보다 비형랑 쪽에서 그의 신기한 재주에 대해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왕의 재위기간이 3년에 불과했으며 귀신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화의 내용으로 봤을 때 유복자로 태어난 어린 비형랑에게 민중들이 갖은 측은함과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비형(鼻荊)이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단순히 한자의 음만 빌려왔다면 더 쉬운 한자를 썼을 텐데 굳이 어려운 한자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뜻은 말그대로 ‘코 가시’인데, 코의 가시를 특징으로 하는 존재를 찾아보면 바로 ‘용’을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비형이라는 발음은 과거에 뱀을 가리키는 ‘얌’과 비슷하다. 조상들은 용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뱀, 그중에서도 이무기라고 불렀는데 장차 용이 될 인물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용으로 비견될 만큼 왕실의 자손이자 귀신과 같은 재주를 지녀 신라 민중들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을 역사적으로 찾아본 다면 바로 ‘용춘’이 있다.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하지만 그 출생에 대한 언급이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는데,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토목 및 건축 분야에서 사회적인 명성을 획득한 그가 바로 비형랑 설화의 주인공이다. 설화에서 밤마다 귀신을 데리고 모여 놀았다는 것, 그리고 길달(吉達)이라는 자를 천거한 것 등은 화랑도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귀교를 놓는 등 건축에 보인 재주는 용춘이 홍룡사9층탑을 건축하는 총감독이었으며 왕실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중책을 맡아 신라 안에서 이름을 드높인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의 명성과 능력은 왕위계승권자로 거론 될 만한데도 불구하고 성골남진(成骨男盡)을 이유로 두 여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던 것은 용춘이 신분상으로 성골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또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부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하였는데 그녀 역시 후비의 소생으로서 진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치면서 용춘의 집안은 커져갔고 아들인 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한 싹을 제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춘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가 다른 이름으로 은유되어 전해진 것은 기존의 왕실에 비해 신분상으로 흠을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은 중대왕실에서 하나의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문무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고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비에서 보이는 ‘할아버지 문흥대왕께서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림이 귀신과 같았다’라는 문구 역시 설화에서 말하는 비형랑이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2. 무열왕계와 통일신라
성골 왕실이 끝나고 시작된 무열왕계는 혜공왕(惠恭王)이 죽임을 당해 왕위를 내놓기까지 127년간 신라의 왕실로 존재하였다. 무열왕계는 진골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으므로 성골 왕실과는 달리 자세를 낮추어 신라사회 일반민과 폭넓은 유대를 갖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면서 한층 진보한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중대로 일컬어지며 삼국간의 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신라가 그 통일의 중심에 우뚝 서서 받아들여진 불교와 유교를 더욱 세련된 문화로 융화시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시기이다.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 천년의 빼어난 문화가 꽃피운 것이다.
나오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라는 새로운 강력한 지배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주변 지역을 병합해 나갔으며 지혜로운 자를 지도자로 선출하면서 내부적으로 조용히 커가고 있었다. 내물마립간 때 드디어 고대국가의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고 비록 고구려에 간섭을 받았지만 이를 통해서 발전을 꾀했고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 대에 이르면 급속도로 영토가 확장되고 갖가지 제도가 마련되었다. 급작스러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다져진 내적인 역량을 기반으로 결국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기치로 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는 더욱 드높여 졌지만 폐쇄적인 혼인을 통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다가 결국 새로운 세력인 진골의 무열왕계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퇴보(退步)한다던가 하는 개념은 아니다. 신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능동적으로 반응했으며 일반민들과의 유대를 넓히면서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신라가 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변화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탄력성을 잃었을 때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에게 다음 시대를 맡겼다. 그럴 때마다 민중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혹은 정치를 좌지우지 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약간의 흠이 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옹호하면서 새 시대 건설을 지지하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설화와 역사 인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속에 진지왕은 정란황음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진지왕 재위 3년, 아름다운 도화녀를 데리고 와 범하려하자 도화녀가 남편이 있음을 이유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바로 얼마 후 진지왕은 폐위되었는데 3년 후 도화녀의 남편이 죽은 후에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도화녀의 남편은 단 한번도 실체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극적인 긴장감을 높이려는 민중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도화녀의 신분도 사량부(沙梁部)의 서녀(庶女)라고 되어 있지만 그녀의 몸가짐으로 미루어보아 일반 서민의 딸이 아니라 진골 정도의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진지왕이 성년으로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이미 결혼했을 가능성이 크며 따라서 후궁은 제 2신분인 진골집안에서 맞아들인 듯하다.
이 일로 사내아이를 낳아 비형이라 이름 하였다. 진평왕이 거두어 집사(執事)직을 맡겼는데 밤마다 귀신을 거느리고 놀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기도 했다. 사람들은 귀신을 잡는 비형의 재주에 노랫말을 짓고 글로 써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설화의 구조를 살펴보면 도화녀보다 비형랑 쪽에서 그의 신기한 재주에 대해서 무게가 실리고 있다. 왕의 재위기간이 3년에 불과했으며 귀신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설화의 내용으로 봤을 때 유복자로 태어난 어린 비형랑에게 민중들이 갖은 측은함과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비형(鼻荊)이라는 이름을 살펴보자. 단순히 한자의 음만 빌려왔다면 더 쉬운 한자를 썼을 텐데 굳이 어려운 한자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뜻은 말그대로 ‘코 가시’인데, 코의 가시를 특징으로 하는 존재를 찾아보면 바로 ‘용’을 나타낸다. 한편으로는 비형이라는 발음은 과거에 뱀을 가리키는 ‘얌’과 비슷하다. 조상들은 용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뱀, 그중에서도 이무기라고 불렀는데 장차 용이 될 인물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용으로 비견될 만큼 왕실의 자손이자 귀신과 같은 재주를 지녀 신라 민중들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을 역사적으로 찾아본 다면 바로 ‘용춘’이 있다.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전하지만 그 출생에 대한 언급이 없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는데, 화랑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토목 및 건축 분야에서 사회적인 명성을 획득한 그가 바로 비형랑 설화의 주인공이다. 설화에서 밤마다 귀신을 데리고 모여 놀았다는 것, 그리고 길달(吉達)이라는 자를 천거한 것 등은 화랑도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귀교를 놓는 등 건축에 보인 재주는 용춘이 홍룡사9층탑을 건축하는 총감독이었으며 왕실의 일원으로서 국가의 중책을 맡아 신라 안에서 이름을 드높인 것과 맞아떨어진다.
그의 명성과 능력은 왕위계승권자로 거론 될 만한데도 불구하고 성골남진(成骨男盡)을 이유로 두 여왕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던 것은 용춘이 신분상으로 성골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다. 또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부인을 아내로 맞았다고 하였는데 그녀 역시 후비의 소생으로서 진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치면서 용춘의 집안은 커져갔고 아들인 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건설한 싹을 제공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춘의 출생을 둘러싼 이야기가 다른 이름으로 은유되어 전해진 것은 기존의 왕실에 비해 신분상으로 흠을 쉬쉬하는 분위기에서 연유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은 중대왕실에서 하나의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문무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고 바다의 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하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비에서 보이는 ‘할아버지 문흥대왕께서 사물의 기미를 미리 알아차림이 귀신과 같았다’라는 문구 역시 설화에서 말하는 비형랑이 바로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임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2. 무열왕계와 통일신라
성골 왕실이 끝나고 시작된 무열왕계는 혜공왕(惠恭王)이 죽임을 당해 왕위를 내놓기까지 127년간 신라의 왕실로 존재하였다. 무열왕계는 진골이라는 신분적 한계가 있었으므로 성골 왕실과는 달리 자세를 낮추어 신라사회 일반민과 폭넓은 유대를 갖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유교적인 정치사상을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하면서 한층 진보한 것이다. 이 시기는 신라의 중대로 일컬어지며 삼국간의 통일전쟁이 마무리되고 신라가 그 통일의 중심에 우뚝 서서 받아들여진 불교와 유교를 더욱 세련된 문화로 융화시켜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시기이다. 불국사(佛國寺)와 석굴암(石窟庵), 오늘날 남아있는 신라 천년의 빼어난 문화가 꽃피운 것이다.
나오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신라는 새로운 강력한 지배자를 필요로 하는 시대에 박혁거세를 시작으로 차근차근 주변 지역을 병합해 나갔으며 지혜로운 자를 지도자로 선출하면서 내부적으로 조용히 커가고 있었다. 내물마립간 때 드디어 고대국가의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고 비록 고구려에 간섭을 받았지만 이를 통해서 발전을 꾀했고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 대에 이르면 급속도로 영토가 확장되고 갖가지 제도가 마련되었다. 급작스러운 성장에도 불구하고 다져진 내적인 역량을 기반으로 결국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기치로 통일을 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실의 권위는 더욱 드높여 졌지만 폐쇄적인 혼인을 통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다가 결국 새로운 세력인 진골의 무열왕계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퇴보(退步)한다던가 하는 개념은 아니다. 신라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능동적으로 반응했으며 일반민들과의 유대를 넓히면서 새로운 사회의 주역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신라가 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변화했기 때문이고, 이러한 탄력성을 잃었을 때 새롭게 등장한 지방 세력에게 다음 시대를 맡겼다. 그럴 때마다 민중들은 역사의 중심에서 혹은 정치를 좌지우지 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약간의 흠이 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을 옹호하면서 새 시대 건설을 지지하였고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설화와 역사 인 것이다.
*참고문헌
김기흥, 『천년의 왕국 신라』,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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