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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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조선의 교육제도
1. 조선 시대의 교육
2. 조선 시대의 학교교육
3.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
4. 결론

◎ 조선의 과거제도
1. 조선시대 과거제도
2. 과거제도의 개요
3. 과거시험의 종류
4. 문치주의를 실현한 과거제도
5. 고려시대의 귀족과 조선시대의 양반에대한 차이
6. 과거시험은 당쟁의 원인
7. 과거시험이 조선의 사상을 경직시켰다

본문내용

→ 문과와 무과로 구별되는데 문무 양과 외에도, 잡과(기술관 등용), 승과(승려 법계 시험), 이과(서리 선발), 취재(하급관리 선발)등이 있음
→ 그 가운데에서 문과가 가장 핵심.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지는데, 소과는 대과 응시자를 걸러내기 위한 자격 시험이었고, 소과에 합격한 이후 대과에 응시, 합격해야만 관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 소과는 생원(경전 시험)과 진사(문장 시험)를 뽑기 때문에 ‘생진시’라고도 하며 때론 ‘사마시’라고 불리어 지기도 하였다. 소과에 합격한 이들에게는 ‘백패(소과 합격증)’와 성균관 입학 자격이 부여되었다. 대과는 생원, 진사, 성균관 유생, 3품 이하의 현직 관리 등이 응시할 수 있었고, 대과에 합격한 이들에게는 ‘홍패(대과 합격증)’와 관직이 부여되었다.
→ 과거는 정기적으로 3년에 한 번 씩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정기 과거를 ‘식년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양반들의 요구로 식년시 외에도 ‘별시’라고 불리는 부정기 과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별시의 회수가 식년시의 회수보다 훨씬 많았다.
→ 조선시대 관리 등용 제도에서 음서보다 과거가 비중이 컸다는 것은 그만큼 관료주의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음을 말하며 학력과 능력이 존중된 합리적 사회였음을 뜻한다. 그러나 현량과가 시행되기도 하고 후기에는 특정 가문 중심의 세도정치가 성행하면서 이 과거제도는 점차 문벌을 양산하는 형식적 절차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학자들의 과거제도 무용론이 등장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3. 과거시험의 종류
① 사서삼경(四書三經) : 유교(儒敎)의 기본 경전으로, 곧 사서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말하며,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을 이른다.
② 사장(詞章) : 문장실력을 테스트하는 과목으로 시와 문장이 출제된다.
③ 책문 : 현재 국가가 당면한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답안으로 작성하는 시험.
4. 문치주의를 실현한 과거제도
→ 조선은 양반관료 국가이며,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실현했다. 즉 칼을 든 무인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붓을 든 지식인인 문인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조선의 문치주의는 동양사에서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고 한다.
→ 문치주의에 입각한 권력투쟁은 지배층 내부의 싸움일 뿐이었다. 무사들의 권력투쟁에서는 일반 백성들의 무고한 희생이 따르고 숱한 인명이 살상된다. 그러나 조선의 권력투쟁은 일반 백성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다.
→ 조선의 문치주의는 세계 역사상 유레가 없는 우수한 통치체재로 평가된다. 이처럼 조선의 문치주의를 가능케 했던 제도적 장치가 바로 과거 제도였다. 조선의 양반은 과거에 합격해야만 관리가 될 수 있고, 관리가 되어야만 양반신분도 유지했다.
5. 고려시대의 귀족과 조선시대의 양반에대한 차이
① 고려시대 → 귀족 : 가문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세습적 신분층이다. 한번 귀족이 되면 대대로 귀족일 수 있었다.
② 조선시대 → 양반 : 귀족만큼 대대로 양반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양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문과 혈통이라는 주어진 조건 못지않게 자기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 필요했다. 물론 조선의 양반도 가문의 혜택으로 관리가 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하위직에 머무를 뿐 고위관료는 될 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관직 중에서도 엘리트 코스를 거쳐 권력의 최정점인 재상의 반열에 오르려면 자신의 실력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또한 조선시대는 자신의 4대 조상까지 그 사이에 관리가 없으면 그 집안은 양반신분에서 자동 탈락되었다.
6. 과거시험은 당쟁의 원인
① 과거시험에 합격하고자 하는 양반의 수는 많았지만 정작 관직은 제한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양반의 수가 급증하면서 과거응시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관직의 수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다.
② 결국 합격시켜놓고도 줄 관직이 없어 합격자의 취직난이 벌어졌다. 조선정부는 일단 합격자에게 임시직을 주는 미봉책을 썼지만, 임시직에서 10년이 지나도 정식 관리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③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 조선시대 당쟁의 원인으로 과거제도를 꼽았다. 관직의 수에 비해 관직을 원하는 사람의 수가 많고, 또 과거시험을 자주 실시하여 관직 대기자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④ 게다가 조선후기 중앙정계의 판도도 과거시험의 모순을 가중시켰다. 일당이 권력을 장악하면 그 당이 모든 관직을 독점했다. 과거시험에 어렵사리 합격하여 관리가 될 자격을 얻었어도 자신의 소속당파가 정권을 잡고 있지 않으면 관직을 얻기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자기 당의 자제들을 부정으로 합격시키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과거시험이 이처럼 운영되자 양반들은 점차 과거시험 보기를 꺼려했다.
7. 과거시험이 조선의 사상을 경직시켰다
→ 과거제도가 조선의 양반 관료국가를 유지하는 토대이고 또 조선의 문치주의를 실현시킨 정치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조선의 과거제도가 낳은 병폐도 적지 않았다. 조선은 유학을 국교로 개국되었어도 초기만 해도 성리학 일변도는 아니었고 비교적 탄력성이 있는 학문 풍토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성리학 이외의 타 학문은 배척되어 점차 성리학 일변도가 되었다. 조선의 과거시험은 이처럼 조선 사상을 성리학 일변도로 경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 사서삼경만을 공부해야 했고, 이는 성리학적인 유학 해석. 그중에서도 주자의 유학 해석만을 공부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학의 새로운 해석이나 연구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과거시험을 포기한 재야 지식인만이 유학을 새롭게 연구할 수 있었다.
→ 또 시와 문장을 시험 보는 사장과목도 일정한 형식이 있어서 이에 어긋나면 합격할 수 없었다. 시험답안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형식존중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저해했기 때문에 문예 발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후기로 내려올수록 시문으로 관리를 뽑는 경향이 높았다. 그러나 시와 문장을 잘 짓는다고 해서 관리로 등용하여 국가의 행정을 맡기는 것은 기본적으로 넌센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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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1.15
  • 저작시기2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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