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서론-분열에 대한 시각
2.횡적분열
1)남북조(南北朝)의 성립
3. 종적분열
1)호족(豪族)의 성립
2)귀족 간의 대립
3)지배계층과 민중과의 대립
4)황제권과 귀족권의 대립
4. 통일의 의미, 결론을 겸하며
2.횡적분열
1)남북조(南北朝)의 성립
3. 종적분열
1)호족(豪族)의 성립
2)귀족 간의 대립
3)지배계층과 민중과의 대립
4)황제권과 귀족권의 대립
4. 통일의 의미, 결론을 겸하며
본문내용
사회는 직사각형의 토성(土城)을 주위로 둘러싼 작은 거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자영농민(自營農民)들이 각자 ‘삼족제’라고 불리는 가족형태를 이루면서 모여 살며, 동네의 주위에 펼쳐진 각자의 농지에 아침에 나가서 농경노동을 행하고, 저녁에 동네로 돌아가는 생활을 영위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가와가쯔 요시오 / 이윤화 옮김 「세미나 위진남북조사」, 서경, 2005, p123
한(漢)제국은 이러한 공동체가 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기반이 되었다고
공동체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그 내부에 계급의 분화가 자연스럽게 생겼고 부유한 호족(豪族)과 빈농(貧農)으로 분화되어 호족(豪族)의 세력은 나날이 증대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호족(豪族)세력에 의해 기존의 향촌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향촌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한다.
팔왕(八王)의 난(亂) 이후 전진(前晉)은 북조(北朝)에 중원을 내어주고 남방으로 내려오게 된다. 호족(豪族)들은 사마예(司馬睿)를 옹립하여 동진(東晉)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때 중요한 사건은 바로 비수대전(水大戰)이다. 비수대전(水大戰)은 동진(東晉)의 명운을 거는 비수대전(水大戰)을 통해 사씨 가문의 위세가 높아졌으며
2) 귀족들 간의 대립
남조(南朝)가 성립되자 북인(北人)들과 종래 강남(江南人)들 간의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서, 청-탁, 갑족-차문 의 명칭 등 결국에는 족문제(族門制)를 통해 계급을 분화시키게 된다. 북인(北人)들은 강남(江南人)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귀족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남인(南人) 사인들이 어떤 이유로 북인(北人) 상급 사인이 상위에 서는 것을 받아들인 것일까? 북인(北人) 사인들보다 일찍 남하하여 정계에 진출한 남인(화 된) 사인들은 그러나 높은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하였다. 남인(南人) 사인들이 북인(北人) 사인에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의식이 계층의 층위를 갈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남인(南人) 사인들이 스스로 남토 전체를 지배할 조직된 힘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찌시게아끼 / 강정설, 김민수 옮김 「세미나 위진남북조사」, 서경, 2005 p215
남인(南人) 사인이 그들의 실력에 난을 평정할 수 있었지만, 그에 맞아 떨어진 통치체제는 부재했다는 것은 곧 남인(南人) 사인이 북인(北人)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유민(流民)의 처지에 불과하였던 북인(北人)은 그들이 획득하고 있는 기존체제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남인(南人) 사인의 우위에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남인(南人) 사인들이 북인(北人) 사인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남조(南朝)의 강력한 귀족제가 족문제(族門制)를 통해 귀족들이 그들의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남인(南人) 사인들은 한인으로 아예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힘은 실상 북인(北人) 상급 사인들의 “그들만의 리그”로 독점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품평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는데, 사람의 품격또한 포함되었다. 지역에서의 명망을 향품(鄕品)이라하여 급을 나누고, 어떤 관직에 오를만한 품격을 관품(官品)이라하여 사인(士人)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확대했다. 그런데 이들의 품격을 나누는 것은 실상 유력한 가문의 대호족(大豪族)들이었다.
방정(方正) 18
노지(盧志)가 여러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육사형(陸士衡: 陸機육기)에게 묻길: “육손(陸孫)/육항(陸抗)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오?”라고 하자, 대답하길:“그대와 노육(盧毓) 노정(盧珽)의 관계와 같소이다”라고 했더니 육사룡(陸士龍: 陸雲육운)이 실색했다. 이미 문을 나선 뒤에 [육사룡이] 형[육사형]에게 말하길:“어찌하여 그렇게까지 말하셨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정말 알지 못한 것 같던데요”라고 하자, 육사형이 정색하며 말하길: “우리 부친과 조부님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어찌 모를 리가 있단 말인가? 귀신의 자식이 감히!”라고 했다. 논자들은 이륙의 우열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공(謝公: 謝安사안)이 [이 일을 가지고] 그들의 우열을 결정했다.
이런 우열나누기 경향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특정귀족의 권력세습을 낳게 되었으며, 귀족들은 향품(鄕品)에서 높은 품에 오르기 위해 오만하거나 탈속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귀족제의 폐쇄적인 성격이 더해지면서 남인(南人) 사인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상황에서 북인(北人) 사인들에 대한 남인(南人) 사인들의 감정이 단순히 열등감으로 멈추기는 힘들었다. 결국 소준의 반란으로 염증이 터진다.
이렇듯 귀족들 간에도 반목의 씨앗은 존재하였으며 그 원인으로는 남인(南人) 사인 스스로가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를 더욱 키운 것은 폐쇄적인 귀족제에서 비롯된 북인(北人) 사인의 권력의 독점이었다.
정사(政事) 13
육태위(陸太:尉 陸玩육완)가 왕승상(王承上: 王導왕도)을 찾아가 정사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미 결정된 일을 문득 번복하곤 했다. 왕공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나중에 육완에게 물었더니, 육완이 말하길: “ 공은 지위와 명망이 높으신 분위고 저는 우둔한 사람이어서, 당시에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김장환 역주] *王導와 陸玩의 대화에는 그 배후에 강좌로 넘어온 북인(北人)과 토착 남인과의 대립 문제가 깔려 있음. 비슷한 고사가 方正 24와 排調 10에도 보임.
남인과 북인(北人)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북인(北人) 사인의 권력의 지나친 독점과 세습 안에서 경쟁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었다. 이는 북인(北人) 사인에게도 그 밖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된 신분에 약속된 부와 권력이 있는데 그들이 집착할 만한 것은 청담에 따른 높은 품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사를 돌보고 나름 정치적인 영역을 돌볼 이유는 너무 희박했고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의 부재는 스스로를 타락시키게 만들었다. 이른바 고인 물은
한(漢)제국은 이러한 공동체가 기반이 되었다고 여겨진다.→기반이 되었다고
공동체의 생산력이 증가함에 따라 그 내부에 계급의 분화가 자연스럽게 생겼고 부유한 호족(豪族)과 빈농(貧農)으로 분화되어 호족(豪族)의 세력은 나날이 증대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호족(豪族)세력에 의해 기존의 향촌질서가 붕괴되고 새로운 향촌질서가 재편되기 시작한다.
팔왕(八王)의 난(亂) 이후 전진(前晉)은 북조(北朝)에 중원을 내어주고 남방으로 내려오게 된다. 호족(豪族)들은 사마예(司馬睿)를 옹립하여 동진(東晉)을 일으킨다. 그런데 이 때 중요한 사건은 바로 비수대전(水大戰)이다. 비수대전(水大戰)은 동진(東晉)의 명운을 거는 비수대전(水大戰)을 통해 사씨 가문의 위세가 높아졌으며
2) 귀족들 간의 대립
남조(南朝)가 성립되자 북인(北人)들과 종래 강남(江南人)들 간의 대립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은 사-서, 청-탁, 갑족-차문 의 명칭 등 결국에는 족문제(族門制)를 통해 계급을 분화시키게 된다. 북인(北人)들은 강남(江南人)에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귀족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남인(南人) 사인들이 어떤 이유로 북인(北人) 상급 사인이 상위에 서는 것을 받아들인 것일까? 북인(北人) 사인들보다 일찍 남하하여 정계에 진출한 남인(화 된) 사인들은 그러나 높은 지위를 획득하지는 못하였다. 남인(南人) 사인들이 북인(北人) 사인에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의식이 계층의 층위를 갈랐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보다는 남인(南人) 사인들이 스스로 남토 전체를 지배할 조직된 힘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오찌시게아끼 / 강정설, 김민수 옮김 「세미나 위진남북조사」, 서경, 2005 p215
남인(南人) 사인이 그들의 실력에 난을 평정할 수 있었지만, 그에 맞아 떨어진 통치체제는 부재했다는 것은 곧 남인(南人) 사인이 북인(北人)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유민(流民)의 처지에 불과하였던 북인(北人)은 그들이 획득하고 있는 기존체제라는 권력기구를 통해 남인(南人) 사인의 우위에 올라간다.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남인(南人) 사인들이 북인(北人) 사인들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남조(南朝)의 강력한 귀족제가 족문제(族門制)를 통해 귀족들이 그들의 정치적인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남인(南人) 사인들은 한인으로 아예 정치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힘은 실상 북인(北人) 상급 사인들의 “그들만의 리그”로 독점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품평하는 경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강하게 나타났는데, 사람의 품격또한 포함되었다. 지역에서의 명망을 향품(鄕品)이라하여 급을 나누고, 어떤 관직에 오를만한 품격을 관품(官品)이라하여 사인(士人)들을 구분하고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한하거나 확대했다. 그런데 이들의 품격을 나누는 것은 실상 유력한 가문의 대호족(大豪族)들이었다.
방정(方正) 18
노지(盧志)가 여러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육사형(陸士衡: 陸機육기)에게 묻길: “육손(陸孫)/육항(陸抗)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오?”라고 하자, 대답하길:“그대와 노육(盧毓) 노정(盧珽)의 관계와 같소이다”라고 했더니 육사룡(陸士龍: 陸雲육운)이 실색했다. 이미 문을 나선 뒤에 [육사룡이] 형[육사형]에게 말하길:“어찌하여 그렇게까지 말하셨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정말 알지 못한 것 같던데요”라고 하자, 육사형이 정색하며 말하길: “우리 부친과 조부님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어찌 모를 리가 있단 말인가? 귀신의 자식이 감히!”라고 했다. 논자들은 이륙의 우열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사공(謝公: 謝安사안)이 [이 일을 가지고] 그들의 우열을 결정했다.
이런 우열나누기 경향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특정귀족의 권력세습을 낳게 되었으며, 귀족들은 향품(鄕品)에서 높은 품에 오르기 위해 오만하거나 탈속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귀족제의 폐쇄적인 성격이 더해지면서 남인(南人) 사인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상황에서 북인(北人) 사인들에 대한 남인(南人) 사인들의 감정이 단순히 열등감으로 멈추기는 힘들었다. 결국 소준의 반란으로 염증이 터진다.
이렇듯 귀족들 간에도 반목의 씨앗은 존재하였으며 그 원인으로는 남인(南人) 사인 스스로가 자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조리를 더욱 키운 것은 폐쇄적인 귀족제에서 비롯된 북인(北人) 사인의 권력의 독점이었다.
정사(政事) 13
육태위(陸太:尉 陸玩육완)가 왕승상(王承上: 王導왕도)을 찾아가 정사에 대해 물어 보았는데,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이미 결정된 일을 문득 번복하곤 했다. 왕공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나중에 육완에게 물었더니, 육완이 말하길: “ 공은 지위와 명망이 높으신 분위고 저는 우둔한 사람이어서, 당시에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김장환 역주] *王導와 陸玩의 대화에는 그 배후에 강좌로 넘어온 북인(北人)과 토착 남인과의 대립 문제가 깔려 있음. 비슷한 고사가 方正 24와 排調 10에도 보임.
남인과 북인(北人)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북인(北人) 사인의 권력의 지나친 독점과 세습 안에서 경쟁이라는 것이 성립할 수 없었다. 이는 북인(北人) 사인에게도 그 밖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약속된 신분에 약속된 부와 권력이 있는데 그들이 집착할 만한 것은 청담에 따른 높은 품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사를 돌보고 나름 정치적인 영역을 돌볼 이유는 너무 희박했고 그들을 견제할 만한 세력의 부재는 스스로를 타락시키게 만들었다. 이른바 고인 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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