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리말
Ⅰ. 절대왕정의 이론적 근거
⑴ 절대주의의 정의
⑵ 국왕이체론의 내용, 한계와 극복
Ⅱ.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원-클로비스 시대
Ⅲ. 루이 14세의 통치기
Ⅳ. 베르사유 궁전
⑴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
⑵ 궁정사회-귀족 길들이기
맺음말
Ⅰ. 절대왕정의 이론적 근거
⑴ 절대주의의 정의
⑵ 국왕이체론의 내용, 한계와 극복
Ⅱ.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원-클로비스 시대
Ⅲ. 루이 14세의 통치기
Ⅳ. 베르사유 궁전
⑴ 베르사유 궁전의 건설
⑵ 궁정사회-귀족 길들이기
맺음말
본문내용
으로 귀족들의 경쟁을 부추겼고, 그들의 복종심을 내면화시켰다. 즉 루이 14세는 서열을 창조함으로써 공간과 시간, 인간의 태도, 심지어 인간의 내면까지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이 궁정 예절을 통해서 루이 14세는 궁정인들과 귀족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들의 내면을 자극해 국왕에게 총애를 받고 싶어 하게 만들고, 충성을 다하게 만들었다. 국왕의 말 한마디로 귀족들은 웃고, 울었다. 이것이 바로 루이 14세의 귀족 길들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루이 14세는 더욱 중앙집권화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베르사유 궁전의 궁정문화는 빠른 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궁정 안에서의 경쟁과 모방이 궁정 밖에서도 퍼지면서, 귀족들의 복종과 궁정식 예의범절은 유행이 되었다. 물질적 이해관계와 함께 신분, 위계, 예절은 전국적인 것이 되었다.
맺음말
지금까지 절대왕정과 베르사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해 보았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본고의 내용을 핵심만 뽑아보겠다.
Ⅰ장에서 절대주의라는 말은 근대에 생겨난 것이 아닌, 중세의 산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absolutisme’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한 도약기를 거쳐 루이 13세 때는 그 기반을 공고히 다졌고, 루이 14세 때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고 하였다.
Ⅱ장에서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원을 알아보았다. 클로비스를 신성화하는 작업을 통하여 프랑스에서 왕정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주입했다는 것이었다.
Ⅲ장에서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인 루이 14세의 통치기를 서술하여 살펴보았다.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형성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Ⅳ장에서는 베르사유 궁전과 궁정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의도적으로 지은 궁전이었으며, 그 안에서 궁정문화가 잉태했다. 곧 이 문화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의 국왕은 생각보다 힘든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연예인들과 비교한다면 적절한 비교일까? 국왕은 그렇게 겉으로는 위엄이 있어보일지는 몰라도 그 속은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궁정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면서 국왕 또한 그 틀 속에 갇혀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겉으로 나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참았을 터이기 때문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루이 14세는 말년에 천연두를 앓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도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그렇게 강한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베르사유의 궁정문화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범위를 확대해 보자면 프랑스 왕조의 모든 것까지 말이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더욱 더 찾아보려고 한다.
절대주의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단어들-중상주의, 관료제, 상비군, 왕권신수설 등-을 떠나서, 이제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Norbert Elias 저, 박여성 역, 『궁정사회』, 한길사, 2003.
김복래 저, 『프랑스 왕과 왕비』, 북코리아, 2006.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2004.
배영수 편저,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2007.
임승휘 저, 『절대왕정의 탄생』, 살림, 2004.
자크 바전 저, 이희재 역,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 민음사, 2006.
이영림, 「태양-왕에서 인간-왕으로 : 정치사의 부활과 루이 14세 연구」,『서양사론』84, 2005, pp305-330.
이 궁정 예절을 통해서 루이 14세는 궁정인들과 귀족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들의 내면을 자극해 국왕에게 총애를 받고 싶어 하게 만들고, 충성을 다하게 만들었다. 국왕의 말 한마디로 귀족들은 웃고, 울었다. 이것이 바로 루이 14세의 귀족 길들이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루이 14세는 더욱 중앙집권화에 가속도를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베르사유 궁전의 궁정문화는 빠른 속도로 파급되어 갔다. 궁정 안에서의 경쟁과 모방이 궁정 밖에서도 퍼지면서, 귀족들의 복종과 궁정식 예의범절은 유행이 되었다. 물질적 이해관계와 함께 신분, 위계, 예절은 전국적인 것이 되었다.
맺음말
지금까지 절대왕정과 베르사유라는 주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해 보았다. 그렇다면, 간단하게 본고의 내용을 핵심만 뽑아보겠다.
Ⅰ장에서 절대주의라는 말은 근대에 생겨난 것이 아닌, 중세의 산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absolutisme’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프랑수아 1세에 의한 도약기를 거쳐 루이 13세 때는 그 기반을 공고히 다졌고, 루이 14세 때에 이르면 절정에 달한다고 하였다.
Ⅱ장에서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원을 알아보았다. 클로비스를 신성화하는 작업을 통하여 프랑스에서 왕정이 정당하다는 인식을 주입했다는 것이었다.
Ⅲ장에서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인 루이 14세의 통치기를 서술하여 살펴보았다.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했으며, 강력한 왕권을 형성했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Ⅳ장에서는 베르사유 궁전과 궁정문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가 의도적으로 지은 궁전이었으며, 그 안에서 궁정문화가 잉태했다. 곧 이 문화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의 국왕은 생각보다 힘든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연예인들과 비교한다면 적절한 비교일까? 국왕은 그렇게 겉으로는 위엄이 있어보일지는 몰라도 그 속은 굉장히 불편했을 것이다. 궁정문화가 자연스럽게 생겨나면서 국왕 또한 그 틀 속에 갇혀야 할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겉으로 나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참았을 터이기 때문에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루이 14세는 말년에 천연두를 앓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초상화 어디에서도 그런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도 기품 있고 당당한 모습이다.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그렇게 강한 면모를 보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을까 생각해 본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베르사유의 궁정문화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범위를 확대해 보자면 프랑스 왕조의 모든 것까지 말이다. 그래서 관련 자료들을 더욱 더 찾아보려고 한다.
절대주의라고 하면 보통 떠오르는 단어들-중상주의, 관료제, 상비군, 왕권신수설 등-을 떠나서, 이제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문헌
Norbert Elias 저, 박여성 역, 『궁정사회』, 한길사, 2003.
김복래 저, 『프랑스 왕과 왕비』, 북코리아, 2006.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2004.
배영수 편저,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2007.
임승휘 저, 『절대왕정의 탄생』, 살림, 2004.
자크 바전 저, 이희재 역,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 민음사, 2006.
이영림, 「태양-왕에서 인간-왕으로 : 정치사의 부활과 루이 14세 연구」,『서양사론』84, 2005, pp305-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