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민간신앙과 도교와의 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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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민간신앙의 성격과 흐름-무속신앙을 중심으로,
1) 무속신앙
2) 무격의 성격과 기능

3. 불교와 민간신앙의 관계- 연등회와 팔관회를 통해서 본 불교

4. 도교와 풍수도참사상
1) 도교와 민간신앙의 관계
2) 풍수도참사상

5. 나오는 말

본문내용

풍수서는 가르친다. 그토록 중요한 것이 지기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인지가 복잡해지고 문명화되어 가면서 지기를 느끼는 기감론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사람들이 지기를 느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산수의 형세를 미루어지기를 짐작하는 형세론을 개발하게 되며 뒤에는 이기론에 입각한 坐向論(좌향론)이라는 고도의 술법까지 내놓게 된다.
이 문제는 중국 풍수사상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아주 잘 드러난다. 중국에서 풍수사상이 확립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 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만 해도 기가모인 곳을 찾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기 보다는 어떠한 곳이 길지이고 어떠한 곳이 흉지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즉 기를 찾는 방법이 아니고 기의 길흉에 대한 분류를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 이후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즉 산의 모양을 보고 기를 찾으려고 한다. 산도 당시 유행하던 도교의 북두칠성신앙과 결부시켜 산 모양에 별 이름을 붙였고 또 五行도 부과하였다. 이렇게 차츰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을 도입하기 시작한 풍수사상계도 12세기 송 대부터는 주자의 이기설을 그대로 도입하여 “理가 氣를 주재하여 萬象(만상)과 萬物(만물)의 생명과 운행을 주도한다.”고 주창했다. 이때의 理란 음양오행의 이치를 말하며, 풍수에서는 이 理를 나침반에 나타나게 했다. 즉 좌향론의 발전이다. 여기서 풍수술은 사람과 자연과의 기를 통한 연결을 없애는 결과는 빚어내고 말았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풍수사상의 과학적이고 합리적 수용에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꼽혀지고 있는데, 이점은 고려시대라고 하여 다를 바가 없다. 즉 풍수의 논리체계 중 가장 중요한 개념인 지기를 합리적으로, 그리고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상황이 풍수의 타락과 잡술화를 불러들였다는 것이다.
(3)남경천도설
신라 경덕왕 14년에 한양으로, 고려초기에는 楊洲(양주)로 개칭되었던 현재의 서울은 고려 문종 21년에 비로서 남경으로 설치되었다. 문종 때에 남경이 세우진 동기는 순전히 地理圖讖設(지리토참설)에 의한 것이었는데, 후에 좋은 효험이 없다는 이유로 남경은 다시 양주로 지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숙종 원년에 당시의 음양관이 《道詵記》《道詵踏山哥》《三角山明堂記》《神誌秘詞》등의 풍수도참서를 근거로 하여 남경건도를 주장하였는데 특히《삼각산명당기》와 《신지비사》에 남경의 풍수지리를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삼각산명당기》의 내용은, 삼각산이라는 곳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仙現(선현)으로서 거기서 시작한 化脈(산맥)은 세 겹 내지 네 겹으로 갈려 나와 산이 산을 등지고 명당을 지키고 있으며, 案前(안전)의 朝山(조산)은 다섯 겹 또는 여섯 겹을 이루고 방계 직계의 故山 (고산) 叔山(숙산) 父山(부산) 母山(모산)은 모두 솟아나서 이를 옹호하고, 內水口(내수구) 外水口(외수구) 에는 각각 충실히 주인을 지키는 세 개의 태산이 있고, 좌우의 청룡 백호는 세력이 비슷하니 전체의 균형이 잡혀 있으며, 내부의 商客(상객)과 寶貨(보화)가 이 곳으로 모여들어 국왕을 돕고, 임자년중에 이 땅을 개척하면 정사년에는 聖子(성자)를 낳을 것이고, 또 삼각산에 의지하여 帝京(제경)을 세운다면 9년 만에 4海로부터 조공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이다.
한편 《신지비사》의 내용은, 3京을 저울에 비유하여 개경을 저울대로 하고, 五德丘(오덕구. 지금의 서울)를 저울의 추로 삼고, 서경을 저울의 중판으로 삼아서 머리와 꼬리가 균형을 유지하면 국가가 번영을 누릴 수 있으며 만일에 이들 3개소가 폐지된다면 왕업이 쇠퇴하여 기울어지리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한양에 대한 풍수지리설로서는 고려의 중엽에 “尹琯(윤관)으로 하여금 백악산 남쪽에 터를 정하여 오얏나무를 심고 무성하게 되면 곧 베어버려서 道善(도선)의 《留記》에 나오는 白岳山下(백악산하)의 오얏왕조 도읍의 地氣(지기)를 눌렀다.”는 속설이 있으며, 공민왕 6년에는 《道善記》의 계통을 밟았던 普愚(보우)가 ”漢陽(한양)에 도읍하면 36국이 來朝할 것이다. “ 《高麗史》 권 106, 列傳 19, 尹諧
라는 지리도참설을 내세웠고, 또한 우왕 8년에는 白州守 恭順(백주수 공순)이 ”南京(남경)의 鎭山(진산)인 삼각산은 그 형세가 五行중 火體(화체)의 산인 까닭에 동방의 國으로 여기에 도읍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 《高麗史》 권 106, 列傳 47, 신우.
고 하는 풍수지리적 견지에서 한양으로의 천도를 반대한 적이 이었다.
5. 나오는 말
알아본 바와 같이 우리의 고유전통문화 즉, 민간신앙은 그 정체성은 유지한 채 여타 종교와 습합 관계를 맺고 다양한 모습으로 고려조 종교문화를 움직였다. 때론 불교적 성격을 띤 국가의례행사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때론 도교와 습합된 모습으로 나라 정책을 좌지우지하기도 하며 그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다. 또 유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문난적으로 여겨져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며 존폐의 위기를 겪기도 한다. 이런 일방적인 억압과 뚜렷한 종교종단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특성이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만) 고려조 종교문화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특성 안에서 유교, 불교, 어떤 종교보다도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활발한 기능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민간종교가 오늘날까지 우리생활에 깊숙이 뿌리박혀 전해져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尹以欽, 『高麗圖經』에 나타난 宗敎思想; 民間信仰을 중심으로, 東方思想論攷, 757-775쪽, 1983년 11월, 도원 유승국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간행위원회, 서울
______, 고려종교사상의 특성과 흐름, 고려시대의 종교문화: 그 역사적 상황과 복합성, 서울대출판부, 2002
朴慶華, 高麗時代의 道敎와 民間信仰, 哲學思想의 諸問題 4, 129-169, 1986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성남
이은봉, 고려시대 불교와 토착신앙의 접속관계, 종교연구6, 한국종교학회, 1990.
이은봉, 토착신앙과 풍수도참설의 발달, 한국사상사대계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서영대, 민속종교, 한국사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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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4
  • 저작시기20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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