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영화, 그 비밀의 언어/ 장 클로드 카리에르
- 진짜 같은 거짓의 세계
-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해야 한다
- 뉴스도 오락이다
- 영화 같은, 너무나 영화 같은
- 영화는 모두 보여 주진 않는다
- 영화처럼 살 수는 없다
- 여자들의 은밀한 욕망
- 진짜 같은 거짓의 세계
- 처음부터 끝까지 리얼해야 한다
- 뉴스도 오락이다
- 영화 같은, 너무나 영화 같은
- 영화는 모두 보여 주진 않는다
- 영화처럼 살 수는 없다
- 여자들의 은밀한 욕망
본문내용
스러운 것과 가장 중요한 것, 또 가장 인식하기 어려운 것을 살아 움직이게 만들 기회, 그런 기회들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우리가 보는 거의 모든 영화들은 현실에 묶여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 영화들의 대다수는 상업 영화이고, 수많은 이유를 들먹이며 그 영화들은 자기들이 현실인 양 연기를 한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화다. 영화는 자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로 그것에 묶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성의 곡선미를 언덕의 능선과 통합하라"는 세잔의 충고를 따를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도 규정할 수 없었던 어떤 특별한 종류의 영화가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점잖게 체면을 지키면서도 좀더 교묘하게 핵심을 꿰뚫는 그런 영화 말이다. 아니면 그 정반대의 영화가 필요했을 수도 있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꼬리표를 과감히 뛰어 넘는 그런 영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결국 시시한 유토피아주의에 불과하며,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원한다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습관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안정감이라는 문제는? 감춰진 검열관 같은 돈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느 경우에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영화를 꿈꾼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런 영화의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형식에 있어서의 모색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더 위험한 함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려는 노력을 뜻한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도 모르면서 미리부터 그 게임에 판돈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그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게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비밀의 메커니즘을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처음부터 현실이 우리에게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뉴엘과 함께 작업했던 19년 동안, 이 대표적인 초현실주의자 Surrealist는 거의 매일같이 내게 현실을 포착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다시 <메꽃>으로 돌아가 보자 부뉴엘은 유곽에서 오후를 보내는 젊은 중산층 부인 세브린느의 현실의 삶과 그녀의 환상 사이에서 관객들이 어떤 차이를 보거나 듣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상상 속의 삶은 현실의 삶처럼 리얼한 것이며, 또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삶이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부조리하며, 비정상적이며, 변태적이며, 우리의 은밀한 욕망에 의해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그런 삶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브린느의 환상, 또는 상상하는 장면 가운데 그녀가 시골의 어느 성으로 가는 장면이 있다. 그 성에서는 수상쩍고 고색 창연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마스터베이션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듯하다. 이때 어느 중년의 귀족이 그녀에게 관속에 들어가 누우라고 명령한다(영화의 환상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그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다). 이 씬 다음에는 공작의 하인이 세브린느가 있는 유곽에 와서 여자를 고르는 씬이 이어진다 하인이 등장함으로써 앞서의 성 씬에는 확실한 현실감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런 현실감은 우리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편집 과정에서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성을 방문하는 것이 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인이 등장하는 씬을 삭제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헛수고였다. 대개의 관객은 여전히 성에서 벌어진 씬을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현실을 이길 수가 없다. 현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훨씬 더 똑똑하다. 우리는 때로 자신들의 꿈을 우리의 꿈 옆에 슬며시 끼워 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줄 뿐이다. 부뉴엘이 <사라져 가는 천사El Angel Extermlinador>에 나오는 대저택에 곰을 등장시켰을 때, 비평가들은 그것이 소련에 대한 은유라고 보았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양이 등장하자, 이번엔 그것이 분명히 소련 국민의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어디로 통하는지도 모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도대체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한술 더 떠서 어떤 관객들은 주인공들이 모두 죽었으며, 최후의 심판을 받아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영원히 떠돌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꿈이나 일탈, 아주 사소한 탈선을 거부하는 것들-그런 것들은 참으로 많다-은 모두 우리 얼굴 바로 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서 피난처를 찾게 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우리가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 형태가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만든 것이다.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들에는 규정된 형태가 없다. 아무리 우리가 머리를 쥐어짜도 우리는 그 형태를 재생산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움직이고 숨쉬며 우리에게 발길질을 해대고, 때로는 우리를 두들겨 패는 것을 느낀다. 영화는 분명히 그런 함정으로 내려가는 긴 비탈길로서 의도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개 그런 함정들을 피해 간다. 예외가 있다면 그런 함정으로부터 장식 효과나 놀라움, 또는 웃음의 효과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경우에 한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러면 안 될건 또 뭐야? 밑도 끝도 없는 곳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문을 두드릴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우리에게 그 문을 열라고 요청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익숙한 길에 머물러 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를 가두어 놓은 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두 벽을 손으로 짙어 가며 스스로를 지탱한다. 영화는 여전히 이 허술한 복도를 따라 달려간다. 그리고 아마 오랫동안 그 짓을 계속할 것이다.
어느 경우에든 현재 존재하지 않는 유형의 영화를 꿈꾼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런 영화의 싹을 틔우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단순히 형식에 있어서의 모색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더 위험한 함정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려는 노력을 뜻한다. 그것은 게임의 규칙도 모르면서 미리부터 그 게임에 판돈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일단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우리가 그 속도를 늦추거나 멈추게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비밀의 메커니즘을 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은 처음부터 현실이 우리에게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뉴엘과 함께 작업했던 19년 동안, 이 대표적인 초현실주의자 Surrealist는 거의 매일같이 내게 현실을 포착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다시 <메꽃>으로 돌아가 보자 부뉴엘은 유곽에서 오후를 보내는 젊은 중산층 부인 세브린느의 현실의 삶과 그녀의 환상 사이에서 관객들이 어떤 차이를 보거나 듣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상상 속의 삶은 현실의 삶처럼 리얼한 것이며, 또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삶이 어느 한
순간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며, 부조리하며, 비정상적이며, 변태적이며, 우리의 은밀한 욕망에 의해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그런 삶이 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브린느의 환상, 또는 상상하는 장면 가운데 그녀가 시골의 어느 성으로 가는 장면이 있다. 그 성에서는 수상쩍고 고색 창연한 의식이 행해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마스터베이션의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듯하다. 이때 어느 중년의 귀족이 그녀에게 관속에 들어가 누우라고 명령한다(영화의 환상이 으레 그렇듯이 우리는 그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다). 이 씬 다음에는 공작의 하인이 세브린느가 있는 유곽에 와서 여자를 고르는 씬이 이어진다 하인이 등장함으로써 앞서의 성 씬에는 확실한 현실감이 주어진다. 그런데 그런 현실감은 우리의 의도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편집 과정에서 부뉴엘은 세브린느가 성을 방문하는 것이 꿈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인이 등장하는 씬을 삭제해 버렸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헛수고였다. 대개의 관객은 여전히 성에서 벌어진 씬을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현실을 이길 수가 없다. 현실은 우리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훨씬 더 똑똑하다. 우리는 때로 자신들의 꿈을 우리의 꿈 옆에 슬며시 끼워 놓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 주려 한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다 줄 뿐이다. 부뉴엘이 <사라져 가는 천사El Angel Extermlinador>에 나오는 대저택에 곰을 등장시켰을 때, 비평가들은 그것이 소련에 대한 은유라고 보았다. 그리고 영화 말미에 양이 등장하자, 이번엔 그것이 분명히 소련 국민의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Le Charme Discret de la Bourgeoisi>에서 우리는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어디로 통하는지도 모르는 길을 계속 걸어가게 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도대체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물었다. 한술 더 떠서 어떤 관객들은 주인공들이 모두 죽었으며, 최후의 심판을 받아 방랑하는 유대인처럼 영원히 떠돌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꿈이나 일탈, 아주 사소한 탈선을 거부하는 것들-그런 것들은 참으로 많다-은 모두 우리 얼굴 바로 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린다. 그러니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에서 피난처를 찾게 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우리가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우리를 안심시킨다. 그 형태가 아무리 기묘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다. 즉 우리가 그것을 만든 것이다.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하는 것들에는 규정된 형태가 없다. 아무리 우리가 머리를 쥐어짜도 우리는 그 형태를 재생산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움직이고 숨쉬며 우리에게 발길질을 해대고, 때로는 우리를 두들겨 패는 것을 느낀다. 영화는 분명히 그런 함정으로 내려가는 긴 비탈길로서 의도된 것인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대개 그런 함정들을 피해 간다. 예외가 있다면 그런 함정으로부터 장식 효과나 놀라움, 또는 웃음의 효과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경우에 한한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러면 안 될건 또 뭐야? 밑도 끝도 없는 곳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문을 두드릴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우리에게 그 문을 열라고 요청한 사람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익숙한 길에 머물러 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를 가두어 놓은 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두 벽을 손으로 짙어 가며 스스로를 지탱한다. 영화는 여전히 이 허술한 복도를 따라 달려간다. 그리고 아마 오랫동안 그 짓을 계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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