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프랑스 혁명의 원인
2.프랑스 인권선언
3.프랑스 전개과정
4.국민의회의 개혁
5.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6.프랑스 혁명의 결과·의의·한계
2.프랑스 인권선언
3.프랑스 전개과정
4.국민의회의 개혁
5.혁명의 과격화와 공포정치
6.프랑스 혁명의 결과·의의·한계
본문내용
처형당했다. 그이 몰락에 뒤이어 곧 최고 가격제가 폐지되었고 서부와 남동부 지방에서는 왕당파의 \'백색 테러\'가 자행되었다. 왕당파는 파리를 장악하려고도 했으나 이들은 혁명력 4년 방데미에르 13일 (1795. 10. 5) 청년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격멸당했다. 며칠 뒤 국민공회는 해산했다.
[총재정부와 혁명의 확산]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혁명력 3년 헌법은 5명의 총재들이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로 이루어진 양원(입법원이라고도 함)에서 입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부르주아 공화정인 총재정부 체제는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 걸쳐 혁명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 간의 투쟁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평탄하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총재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존재하던 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종종 새로운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쟁은 혁명력 5년 프뤽티도르 18일(1797. 9. 4)의 쿠데타와 혁명력 8년 보뤼메르 18일(1799. 11. 9)의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첫 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 자체를 폐지했다. 플뢰뤼스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의 유럽진격은 계속되었다. 라인란트와 홀란드가 점령되었고 1795년에는 홀란드·토스카나·프로이센·스페인이 평화협상을 벌였다. 1796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사르데냐는 곧 굴복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였다.(1797. 캄모포르미오 조약) 프랑스가 점령한 국가들 대부분이 \'자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를 모방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찾아온 평화는 혁명의 확산을 종결짓지 못했다. 대부분의 총재는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지롱드당의 염원을 물려받아 외국 자코뱅주의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1798, 1799년 프랑스군은 스위스, 교황령, 나폴리로 진격해 각각 헬베티아·로마·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상륙을 기대할 수 없었던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의 영국 정부를 위협하기로 결정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원정군은 몰타에 이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했으나 원정군을 호위하던 함대가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만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격멸당했다. 혁명의 진전에 불안해 하던 열강은 프랑스군의 참패에 용기를 얻어 재 2차 동맹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투르크·영국이 참 여한 이 동맹은 179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고 프랑스군을 국경으로까지 후퇴시켰다. 그후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패배로 실추된 정부의 평판과 자신의 커다란 명성을 이용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전쟁 (Franco-Prussian War)
보불전쟁이라고도 함.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주도권에 종지부를 찍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제국을 성립시킨 전쟁(1870. 7. 19~1871. 5. 10).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을 격파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이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서 실추된 황제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다.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역이용하여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외교관계는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던 프로이센측의 시도로 매우 악화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의 반프랑스 동맹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보였다. 프랑스 대사는 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빌헤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에 대한 공식적인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빌헤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다. 7월 14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시킬 목적으로 전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공표했다.(->엠스전보) 프랑스는 5일 뒤 전쟁을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계획하고 지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는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병력동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독일군은 4주 만에 바센 장군 휘하의 프랑스 야전군을 메스 요새에 가두어놓았다. 바젠 장군은 독일군은 공격을 피해보려 했으나 이미 실패했다. (->마르스라투르전투와 그라볼로트전투) 마크마옹 원수가 지휘하고 나폴레옹 황제가 직접 가담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바젠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8월 31일 스당에서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포위했다.(->스당전투) 9월 1일 프랑스의 스당 탈출작전은 실패했으며 9월 2일에 나폴레옹과 마크 마옹을 포함한 8만 3,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항복했다. 프랑스의 저항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저항의 주역은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새로운 국민방위군 정부였다. 9월 19일 독일군은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의 쥘 파브르 외무장관은 비스마르크와 협상을 벌였으나 독일이 알자스와 로렌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뒤 지방에서 새로운 프랑스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새로운 군대도 독일군을 무찌를 수는 없었다. 바젠은 10월 27일 메스에서, 그리고 파리는 1871년 1월 28일 각각 항복했다. 1월 28일자 휴전조약에는 최종적인 평화조약 체결권을 갖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선거조항이 포함되었다. 마침내 이 협상안은 아돌프 티에르와 파브르의 주도로 2월 26일에 조인되었고 3월 1일 비준되었다. 이때부터 1871년 5월 10일 공식적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중에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고 급진주의자들은 파리 코
[총재정부와 혁명의 확산]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혁명력 3년 헌법은 5명의 총재들이 행정권을, 원로원과 500인회로 이루어진 양원(입법원이라고도 함)에서 입법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했다. 부르주아 공화정인 총재정부 체제는 전쟁을 통해 유럽 전역에 걸쳐 혁명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 간의 투쟁이 지속되지 않았다면 평탄하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총재정부와 입법부 사이에 존재하던 적대관계를 더욱 악화시켰고 종종 새로운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했다. 이러한 분쟁은 혁명력 5년 프뤽티도르 18일(1797. 9. 4)의 쿠데타와 혁명력 8년 보뤼메르 18일(1799. 11. 9)의 쿠데타로 종결되었다. 첫 번째 쿠데타는 총재정부 자체를 폐지했다. 플뢰뤼스에서 승리를 거둔 프랑스군의 유럽진격은 계속되었다. 라인란트와 홀란드가 점령되었고 1795년에는 홀란드·토스카나·프로이센·스페인이 평화협상을 벌였다. 1796년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로 진입하자 사르데냐는 곧 굴복했다. 오스트리아는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였다.(1797. 캄모포르미오 조약) 프랑스가 점령한 국가들 대부분이 \'자매 공화국\'으로서 프랑스를 모방한 제도를 갖게 되었다.
유럽 대륙에 찾아온 평화는 혁명의 확산을 종결짓지 못했다. 대부분의 총재는 혁명을 유럽으로 확산시키려 했던 지롱드당의 염원을 물려받아 외국 자코뱅주의자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하여 1798, 1799년 프랑스군은 스위스, 교황령, 나폴리로 진격해 각각 헬베티아·로마·파르테노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영국상륙을 기대할 수 없었던 총재정부는 보나파르트의 요구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인도의 영국 정부를 위협하기로 결정했다. 보나파르트가 지휘하는 원정군은 몰타에 이어 이집트를 손쉽게 점령했으나 원정군을 호위하던 함대가 1798년 8월 1일 아부키르 만에서 호레이쇼 넬슨의 함대에게 격멸당했다. 혁명의 진전에 불안해 하던 열강은 프랑스군의 참패에 용기를 얻어 재 2차 동맹을 결성했다. 오스트리아·러시아·투르크·영국이 참 여한 이 동맹은 1799년 봄과 여름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고 프랑스군을 국경으로까지 후퇴시켰다. 그후 프랑스로 돌아온 보나파르트는 군사적 패배로 실추된 정부의 평판과 자신의 커다란 명성을 이용해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 비록 보나파르트는 혁명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바로 자신이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전세계에 전파하게 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전쟁 (Franco-Prussian War)
보불전쟁이라고도 함. 유럽 대륙에서 프랑스의 주도권에 종지부를 찍고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제국을 성립시킨 전쟁(1870. 7. 19~1871. 5. 10).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육군이 프로이센을 격파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이 승리를 통해 프랑스에서 실추된 황제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전쟁을 감행했다. 프로이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는 나폴레옹의 야심을 역이용하여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북독일 연방에 남독일 국가들을 끌어들여 강력한 독일 제국을 형성할 수 있는 호기로 삼았다.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외교관계는 1870년 7월 프로이센 왕실과 인척관계에 있던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의 레오폴트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넘겨주려던 프로이센측의 시도로 매우 악화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프로이센과 스페인의 반프랑스 동맹 가능성을 내포한 위협으로 보였다. 프랑스 대사는 엠스 온천에서 휴양중인 빌헤름 1세를 방문하여 레오폴트 대공의 왕위 포기에 대한 공식적인 다짐을 받으려고 했다. 빌헤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그 전말을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렸다. 7월 14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격분시켜 전쟁을 도발시킬 목적으로 전보를 자극적으로 조작하여 공표했다.(->엠스전보) 프랑스는 5일 뒤 전쟁을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남독일 국가들이 프로이센 편에 서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계획하고 지휘한 독일군의 효과적인 공세는 프랑스의 비효율적인 병력동원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독일군은 4주 만에 바센 장군 휘하의 프랑스 야전군을 메스 요새에 가두어놓았다. 바젠 장군은 독일군은 공격을 피해보려 했으나 이미 실패했다. (->마르스라투르전투와 그라볼로트전투) 마크마옹 원수가 지휘하고 나폴레옹 황제가 직접 가담한 프랑스군 주력부대는 바젠 구출작전을 시도했으나 8월 31일 스당에서 독일군의 함정에 빠져 포위했다.(->스당전투) 9월 1일 프랑스의 스당 탈출작전은 실패했으며 9월 2일에 나폴레옹과 마크 마옹을 포함한 8만 3,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항복했다. 프랑스의 저항은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저항의 주역은 1870년 9월 4일 파리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황제 폐위와 제3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새로운 국민방위군 정부였다. 9월 19일 독일군은 파리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새 정부의 쥘 파브르 외무장관은 비스마르크와 협상을 벌였으나 독일이 알자스와 로렌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임시정부 수반이던 레옹 강베타는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를 타고 탈출에 성공한 뒤 지방에서 새로운 프랑스 군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새로운 군대도 독일군을 무찌를 수는 없었다. 바젠은 10월 27일 메스에서, 그리고 파리는 1871년 1월 28일 각각 항복했다. 1월 28일자 휴전조약에는 최종적인 평화조약 체결권을 갖는 프랑스 국민의회의 선거조항이 포함되었다. 마침내 이 협상안은 아돌프 티에르와 파브르의 주도로 2월 26일에 조인되었고 3월 1일 비준되었다. 이때부터 1871년 5월 10일 공식적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이 체결되기까지의 기간중에 파리에서 반란이 일어나 공화국 정부가 전복되고 급진주의자들은 파리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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