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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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辛亥革命 이전의 상황
1. 손문과 興中會
2. 留日學生의 활동
3. 中國同盟會의 성립
4. 무장봉기와 동맹회의 분열
5. 청조의 대응
6. 국내에서의 대중운동

Ⅲ辛亥革命의 전개
1. 武昌蜂起와 南北義和
2. 南京臨時政府와 원세개정권의 성립

Ⅳ辛亥革命의 결과
1. 革命에서의 농민의 역할
2. 革命에서의 反淸과 反帝
3. 共和制의 의의

Ⅵ결론

Ⅶ참고문헌

본문내용

표로만 설정되어 있었을 뿐 그 방법에서 철저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신해혁명의 특성으로서의 청조타도만을 최우선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 성격을 올바로 이해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반제의 문제도 그 뒤에 전해되는 역사적 과제의 지향으로서 의의 이상으로, 혹은 문제제기 이상으로 평가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다만 반청의 결과로 청조를 타도하고 공화제를 시작했다는 점과 문제로서의 반제를 제기한 점을 그 의의와 특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共和制의 의의
1912년에 공화제정부가 수립됐다는 것은 군주정제정체를 재신했다는 데서 일단은 그 나름의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공화정부의 수립은 이를 革命綱領으로 내걸었던 동명회계의 혁명목표는 달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하여 원세개에게 정권을 양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큰 대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공화제가 필요했던 것일까? 헌법과 총통제, 보통선거권과 의회를 갖는 공화제는 이들에게 전제체제를 반대하고 그를 대신할 정체였다. 전제의 타도는 또한 개혁파의 목표이기 하였는데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은 총통제의 유무와 관련된 부분뿐이었다. 그러면 이렇게 수립된 공화제 정부의 반전제 성과는 어떠했는가? 우선 의회제나 헌법의 경우 전제적 권력의 부활에 대해 강한 억제력을 타내고 있었다. 반면 총통제의 경우 이와는 반대로 전제통치를 강화하는 도구가 되어 갔다. 앞서 전개과정에 살펴보았듯이 원세개가 총통직에 취임하고 나서 그의 군벌세력과 총통제를 이용하여 다시 전제로 복귀하려 했던 시도가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공화제의 의의는 그 자체의 성립보다도 군주정체가 무너졌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2천년간 신성시 되어 왔던 권위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1911-1912년의 사건들은 그 자체로서는 혁명이라 할 수 없으나 그것이 불러들인 변화는 낡은 유교질서를 다시 일어설 수 없게 하였다. 1911년의 혁명으로 중국은 새로운 가치, 제도, 체제를 갖게 되었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지속된 변화의 시작이었다.” 민두기, 앞의 책, 1989, p. 104.
는 어느 학자의 말은 이러한 의의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그러나 권위의 절대성이 무너진 후 그 뒷 자리에 들어설 새 권위의 실체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이는 실질적인 내용보다 정신적인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Ⅵ결론
이상 신해혁명과 그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각 혁명, 개혁 단체의 성립과, 청조 중심의 개혁의 실패, 그리고 이로 인한 개혁파의 좌절과 농민의 불만고조라는 여러 배경을 통하여 성숙되었던 혁명적 분위기는 마침내 1911년 10월 무창에서 일어난 신군의 봉기에 의하여 그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무창봉기의 성공과 그로 인한 중국전역의 혁명의 바람은 마침내 2천여 년 간의 군주지배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공화제를 성립하였다. 허나 이러한 혁명의 성과는 원세개와 그의 군벌세력에 의하여 유명무실화 되었으며, 진정한 혁명은 이 후의 시대에서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해혁명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 논의의 주된 쟁점은 혁명 자체의 표면적인 결과보다는 이 혁명으로 인한 긍적적인 지향성을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때문에 혁명 자체의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 그 성과가 미비하였음을 인정하여 ‘혁명’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도 신해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 원인은 혁명에 있어서 목표의식이 뚜렷하지 못하였고, 혁명의 전개과정에서도 뚜렷한 주도권을 획득하여 혁명을 이끌지 못하였던 혁명파와 혁명이후 그 성과였던 공화제를 이용, 자신의 군벌세력을 기반으로 다시 전제복귀를 시도하였던 원세개 등의 반동세력, 그리고 아직은 성숙되지 못하였던 민중의식 등 다양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신해혁명은 ‘실패한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화제 성립으로 인한 군주체제의 붕괴와 이로 인한 기존 질서와 문화로부터의 일탈현상은 분명 혁명적인 일이었고, 이후 나타나는 54운동의 기반이자 전초로서의 역사적 의의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신해혁명은 그 한 사건만의 성과로 평가하여 ‘실패한 혁명’이라 평하기 보다는 그 성과가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의 바탕이 되었던 완결되지 않은 ‘未完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Ⅶ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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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하 외. <<20세기의 중국>>,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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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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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종. <청말 혁명파의 반만혁명론과 오족공화론>. <<중국현대사연구>> 12, 2001.
최관장. <노동선교수정년퇴임기념논문집 : 중국의 근대화과정과 정치 경제적 갈등 연구 (3) - 신해혁명을 중심으로 ->. <<중국연구>> Vol.18,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중국연구소, 1996.
최창연. <신해혁명과 청조 -배만과 청조의 개혁을 중심으로->. <<동양사학과론집>> 1.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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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28
  • 저작시기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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