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론
- 본론 I
- 본론 II
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2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3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4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5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6공화국의 통일정책
- 본론 III
* 햇볕정책의 개념
* 햇볕정책의 당위성
* 햇볕정책의 특징
* 햇볕정책의 합리성
* 햇볕정책의 구현방법
* 햇볕정책의 기대 효과
- 결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론
- 본론 I
- 본론 II
제 1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2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3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4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5공화국의 통일정책
제 6공화국의 통일정책
- 본론 III
* 햇볕정책의 개념
* 햇볕정책의 당위성
* 햇볕정책의 특징
* 햇볕정책의 합리성
* 햇볕정책의 구현방법
* 햇볕정책의 기대 효과
- 결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결론
본문내용
들, 예를 들어 물질가치 과학기술가치등과 복음가치를 접합시키는 내적 능력이 자라게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남한의 상황은 지나치게 물질 가치가 팽배한 나머지 신앙의 가치, 즉 생명의 가치의 소중함을 잊은 채 물질 가치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반해 북한의 경우, 잘못된 공산주의 이념에 의해 개개인들이 생명의 가치이자 신앙의 가치에 접근하는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경우, 절대적 빈곤 상황에 의해 신앙에 다가갈 여유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상황일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생명의 가치를 접하는 기회를 확보해 주는 일이다. 왜냐하면 지난 반세기 동안 남한과 북한이라는 분단의 상황에서 정서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소원한 관계에 놓이게 된 한반도의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사건 및 성령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야말로 우리 민족을 하나로 만드는 기본 바탕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 본론 I
6.25 전쟁이 끝난 직 후, 북한이 가진 최초의 통일 방안은 ‘민주 기지론’이었다. ‘민주 기지론’의 골자는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북쪽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 방안은 기본적으로 국내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연성(평화성)과 강직성(폭력성)을 배합하면서 적극적으로 폭력에 의한 공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북한의 시각을 보여준다. 이것은 1957년 11월 9일 어선 ‘어성호’ 등 7척, 59년 11월 13일 어선 ‘용진호’ 등 3척이 동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피납되는 사건 등으로 확인할 수있다.
60년을 전후로 이러한 ‘민주 기지론’은 ‘연방제’라는 통일 방안으로 대체되는데 이 ‘연방제’는 장기간에 걸쳐 북한의 통일 방안으로 자리 잡으면서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60년 8월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한에 연방제 실시를 제안해 왔다. 이 당시의 연방 자체의 의미는 ‘통일로 가기 위한 잠정적인 조치’였다. 즉 연방은 완전한 통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서 과도기적 조절기구의 성격을 갖는다. 남한과 북한 정부가 독자적 활동을 하고 두 정부의 대표들로 ‘최고 민족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며 내세운 통일 방안이었다. 그것의 기능은 남북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며 하나의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남한의 내부적인 국론분열을 유발하고자 취했던 정치공세였으며 북한은 곧, 남한 내에 지하당 구축 공작을 획책하고 남한의 대응력을 측정하기 위하여 폭력전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육상과 해상을 통한 여러 차례의 간첩 침투 및 유럽 지역에 있는 유학생, 교수, 예술인, 광부 등을 포섭하여 간첩활동에 참여시켰으며, 청와대를 목표로 한 기습 사건 등 대담한 정보 공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시기별로 정리하자면, 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위한 청와대를 습격 사건, 68년 10월 30일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 공비 120명이 침투하여 약 20일 간 사회적 혼란을 기도하였던 사건, 69년 12월 11일 북한 간첩 조창희가 강릉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YS-11기를 납북하였던 사건 등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70년대에는 남북한의 관계가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72년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 원칙에 합의한 <7.4남북 공동 성명>으로 남북한 사이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남한에서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을 발표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73년 6월 23일, 북한의 수령 김일성은 ‘체코공산당 후사크 총비서 환영 평양 군중 대회’ 연설에서 ‘조국 통일 5대 강령’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특징은 과도적 조치가 아닌 통일 국가 형태로서의 연방 국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표면적으로 남한의 정부와 체제, 사상 등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근저에는 대남 혁명 전략을 통한 일순간의 ‘체제 통합’보다는 보다 점차적인 ‘체제 통합’을 지향하겠다는 북한의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다음의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0년 6월 5일 해군 함정 정이 연평도 근해 공해상에서 납북되었고, 71년 1월 23일에는 대한항공여객기 납북 미수 사건도 있었다. 74년 8월 15일 광복 25주년 기념식 때는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북한 지령을 받은 조총련계 교포 2세 문세광이 행한 일로 육영수 여사가 사망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땅굴이 많이 발견되었다. 74년 11월 15일에는 ‘고랑포’에서 제 1땅굴이 발견되었고 75년 3월 19일에는 ‘철원’에서 제 2땅굴, 그리고 78년 10월 27일에는 판문점에서 제 3땅굴이 발견되었다. 그 밖에 태광고에 다니던 고교 2년생 이민교, 최승민군을 비롯, 영화배우 최은희와 그의 남편 영화감독 신상옥 등이 모두 77년과
¹조국 통일 5대 강령 - 군사적 대치 상태의 해소, 다방면적 합작과 교류의 실현, 대민족회의 소집,
고려 연방 공화국 창설, 고려 연방 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78년 사이에 납북되었다.
70년대 북한이 내세웠던 소위 ‘고려 연방제’는 80년대에 들어 ‘고려 민주 연방제’로서의 변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새로운 연방 제도이다. 이것은 70년대 제시된 ‘고려 연방제’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다음은 김일성이 조선 노동당 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 연방제’를 제시하면서 했던 말이다.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 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한 나라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하나의 통일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 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민족의 단합과 조국 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이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 통일 정부를 내오고 그
- 본론 I
6.25 전쟁이 끝난 직 후, 북한이 가진 최초의 통일 방안은 ‘민주 기지론’이었다. ‘민주 기지론’의 골자는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해 북쪽이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 방안은 기본적으로 국내외적인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연성(평화성)과 강직성(폭력성)을 배합하면서 적극적으로 폭력에 의한 공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북한의 시각을 보여준다. 이것은 1957년 11월 9일 어선 ‘어성호’ 등 7척, 59년 11월 13일 어선 ‘용진호’ 등 3척이 동해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피납되는 사건 등으로 확인할 수있다.
60년을 전후로 이러한 ‘민주 기지론’은 ‘연방제’라는 통일 방안으로 대체되는데 이 ‘연방제’는 장기간에 걸쳐 북한의 통일 방안으로 자리 잡으면서 시대에 따라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60년 8월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한에 연방제 실시를 제안해 왔다. 이 당시의 연방 자체의 의미는 ‘통일로 가기 위한 잠정적인 조치’였다. 즉 연방은 완전한 통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서 과도기적 조절기구의 성격을 갖는다. 남한과 북한 정부가 독자적 활동을 하고 두 정부의 대표들로 ‘최고 민족 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하며 내세운 통일 방안이었다. 그것의 기능은 남북의 경제와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며 하나의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남한의 내부적인 국론분열을 유발하고자 취했던 정치공세였으며 북한은 곧, 남한 내에 지하당 구축 공작을 획책하고 남한의 대응력을 측정하기 위하여 폭력전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육상과 해상을 통한 여러 차례의 간첩 침투 및 유럽 지역에 있는 유학생, 교수, 예술인, 광부 등을 포섭하여 간첩활동에 참여시켰으며, 청와대를 목표로 한 기습 사건 등 대담한 정보 공작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시기별로 정리하자면, 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위한 청와대를 습격 사건, 68년 10월 30일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 공비 120명이 침투하여 약 20일 간 사회적 혼란을 기도하였던 사건, 69년 12월 11일 북한 간첩 조창희가 강릉을 출발, 서울로 향하던
70년대에는 남북한의 관계가 호전되는 듯이 보였다. 72년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통일 원칙에 합의한 <7.4남북 공동 성명>으로 남북한 사이에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남한에서 ‘평화 통일 외교 정책 선언’을 발표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73년 6월 23일, 북한의 수령 김일성은 ‘체코공산당 후사크 총비서 환영 평양 군중 대회’ 연설에서 ‘조국 통일 5대 강령’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특징은 과도적 조치가 아닌 통일 국가 형태로서의 연방 국가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표면적으로 남한의 정부와 체제, 사상 등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근저에는 대남 혁명 전략을 통한 일순간의 ‘체제 통합’보다는 보다 점차적인 ‘체제 통합’을 지향하겠다는 북한의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다음의 사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70년 6월 5일 해군 함정 정이 연평도 근해 공해상에서 납북되었고, 71년 1월 23일에는 대한항공
¹조국 통일 5대 강령 - 군사적 대치 상태의 해소, 다방면적 합작과 교류의 실현, 대민족회의 소집,
고려 연방 공화국 창설, 고려 연방 공화국 국호에 의한 유엔 가입
78년 사이에 납북되었다.
70년대 북한이 내세웠던 소위 ‘고려 연방제’는 80년대에 들어 ‘고려 민주 연방제’로서의 변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 6차 대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새로운 연방 제도이다. 이것은 70년대 제시된 ‘고려 연방제’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는다. 다음은 김일성이 조선 노동당 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 연방제’를 제시하면서 했던 말이다.
민족적 단합을 이룩하고 조국 통일을 실현하려면 어느 한쪽의 사상과 제도를 절대화하지 말아야 한다. 한 나라에서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으며 하나의 통일 국가 안에 서로 다른 사회 제도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사상과 제도를 결코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민족의 단합과 조국 통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복종시킬 것이다. 우리 당은 북과 남이 서로 상대방에 존재하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인정하고 용납하는 기초 위에서 북과 남이 동등하게 참가하는 민족 통일 정부를 내오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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