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뿐만 아니라, 비록 압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비판적인 집중을 받고 있는 것은 20세기 말에 개혁주의 미국인들과 복음주의 미국인들 가운데 이 학파가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여 준다.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대변하였고, 자력구원과 자기계시의 인간적인 가면을 반대하였으며, 인간의 도덕적인 약점을 선포하고, 구원의 완성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변호하는데 챔피언이었다. 이것들이 후대 프린스톤 신학의 옹호자들이 종종 무시하는 주제들이며, 후대 프린스톤 신학의 비평가들이 피하여 온 주제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또한 만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현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구프린스톤의 선물이 되었을 주제들이다.
웨스트민스터 학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1920년대,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의 중반에 설립되었다. 설립목적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구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데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화란 신학의 반영을 통해서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쳐 왔다.
이 논문은 \"웨스트민스터 학파\"의 두드러진 영향을 살펴보는 데 있다.
현대주의 대(對) 근본주의 논쟁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대립은 20세기 초 미국교회 생활의 많은 단면들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북장로교(PCUSA) 내의 현대주의 도전은 1920년대 초엽에 보수주의를 연합시켰으며, 한때 교단에서 자유주의 세력들을 몰아낼 것처럼 보였다. 1925년 총회는 보수주의 힘과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던 해였다.
1910,1916, 그리고 1923년에 걸쳐 총회는 장로교 목사들에게 근본적이라고 천명한 5대 교리들을 선언하지 않던 뉴욕노회의 목사 안수받은 사람들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뉴욕노회는 총회의 행동이 헌법에 위헌되기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이 중대한 순간에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순결보다 교회의 일치를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다수였던 보수주의자들이 순결을 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다음총회까지 보수주의 세력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1925년 여름에 유명한 \"진화론 재판\"이 테네시에서 열렸는데 근본주의 상(象)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26년 보수주의는 장로교 안에 \"더욱 세력을 잃은\" 소수파였다.
1926년의 당대 사람들은 가장 좋은 보수주의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926년 총회는 그레삼 메이첸이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로의 임명이 지연되자 일련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교수와 이사회의 대부분은 그의 임명을 추천하였지만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 스티븐슨(J.Ross Stevenson)은 임명을 반대하였다. 임명이 지연되자 총회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사회의 지지를 받은 대부분의 교수들은 프린스톤 신학교가 항상 대변하여 온 구학파 신학을 보존하기 원하였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수정되지 않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칼빈주의\" 교회의 하나의 요새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스티븐슨 학장은 좀더 포괄적인 교회의 비전을 변호하였던 인물이다. 1920년에 그는 감리교를 포함하여 장로교가 몇 개의 다른 교단들과 통합하려는 통합안을 지지하였다.
1929년,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자 총회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재조직하였다. \"구프린스톤\"은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4명의 프린스톤 신하교 교수들-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앨리스(O.T. Allis), 그레삼 메이첸(J.Gresham Machen), 그리고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구프린스톤의 전통을 계속 보존한다는 신념으로 1929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개교 연설에서 메이첸은 2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성경의 절대 권위였다. 그는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신 평이한 책, 그리고 성경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 정확히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두 번째는 프린스톤이 이제 \"복음주의적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에 새 신학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표현된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 확고하게 설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사실에 부언하여 웨스트민스터에 오는 어느 학생이든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새 신학교는 교회의 현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지지자들은 신학교가 교회에 정통주의 목회자들을 배출한다는 희망으로 단결하였다.
메이첸은 분명히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의 지도자였는데 그것은 그가 또한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장로교 보수주의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워필드를 이어 중요한 보수주의 장로교의 지성적 대변자로 생각되고 있던\" 저명한 신약학자였다.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참된 기독교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고수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자와 안내자로 간주하지만 기독교는 그를 구주로 간주한다: 자유주의는 그를 신앙의 견본으로 삼지만 기독교는 신앙의 주체로 삼는다.\" 투쟁은 복음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메이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근본주의 지도자들과 달랐다. 그는 폭 넓은 문화적 관심을 가졌다. 프린스톤 전통의 일부분으로서 메이첸은 기독교 삶에서 생명력있는 경건의 중요성을 보았지만, 그는 기독교 교리는 참된 경건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메이첸은 그의 명료한 교리적 확신 때문에 다른 보수주의자들을 포용하기보다는 한층 급진적으로 그들과 대결하는 전략을 세웠다. 해외선교 본부에 있는 현대주의에 대한 응전으로 1933년에 메이첸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 본부를 조직하였다. 북장로교 선교 본부 파송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소설가 펄 벅(Pearl Buck)이 The Christian Century에 상당히 급진적이라 할 만큼 자유주의적인 선교 재고(자유주의 입장을 갖고 해외선교를 재정립한 북장로교 선교 정책안)에 대하여 광적이라 할 만큼 긍정적인 서평을
19세기 프린스톤 신학은 하나님의 은총을 대변하였고, 자력구원과 자기계시의 인간적인 가면을 반대하였으며, 인간의 도덕적인 약점을 선포하고, 구원의 완성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변호하는데 챔피언이었다. 이것들이 후대 프린스톤 신학의 옹호자들이 종종 무시하는 주제들이며, 후대 프린스톤 신학의 비평가들이 피하여 온 주제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또한 만일 프린스톤 신학자들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현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구프린스톤의 선물이 되었을 주제들이다.
웨스트민스터 학파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1920년대, 현대주의 대 근본주의 논쟁의 중반에 설립되었다. 설립목적은 프린스톤 신학교의 구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데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화란 신학의 반영을 통해서 상당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에 두드러진 영향을 미쳐 왔다.
이 논문은 \"웨스트민스터 학파\"의 두드러진 영향을 살펴보는 데 있다.
현대주의 대(對) 근본주의 논쟁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사이의 대립은 20세기 초 미국교회 생활의 많은 단면들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북장로교(PCUSA) 내의 현대주의 도전은 1920년대 초엽에 보수주의를 연합시켰으며, 한때 교단에서 자유주의 세력들을 몰아낼 것처럼 보였다. 1925년 총회는 보수주의 힘과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던 해였다.
1910,1916, 그리고 1923년에 걸쳐 총회는 장로교 목사들에게 근본적이라고 천명한 5대 교리들을 선언하지 않던 뉴욕노회의 목사 안수받은 사람들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뉴욕노회는 총회의 행동이 헌법에 위헌되기 때문에 응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이 중대한 순간에 대부분의 보수주의자들은 순결보다 교회의 일치를 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다수였던 보수주의자들이 순결을 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다음총회까지 보수주의 세력은 급속하게 약해졌다. 1925년 여름에 유명한 \"진화론 재판\"이 테네시에서 열렸는데 근본주의 상(象)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926년 보수주의는 장로교 안에 \"더욱 세력을 잃은\" 소수파였다.
1926년의 당대 사람들은 가장 좋은 보수주의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1926년 총회는 그레삼 메이첸이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증학 교수로의 임명이 지연되자 일련의 안건을 통과시켰다. 교수와 이사회의 대부분은 그의 임명을 추천하였지만 프린스톤 신학교 학장 스티븐슨(J.Ross Stevenson)은 임명을 반대하였다. 임명이 지연되자 총회는 프린스톤 신학교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설립하였다. 이사회의 지지를 받은 대부분의 교수들은 프린스톤 신학교가 항상 대변하여 온 구학파 신학을 보존하기 원하였다.
교수들의 대부분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수정되지 않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칼빈주의\" 교회의 하나의 요새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스티븐슨 학장은 좀더 포괄적인 교회의 비전을 변호하였던 인물이다. 1920년에 그는 감리교를 포함하여 장로교가 몇 개의 다른 교단들과 통합하려는 통합안을 지지하였다.
1929년, 상당한 반대에 직면하자 총회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재조직하였다. \"구프린스톤\"은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면서 4명의 프린스톤 신하교 교수들-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앨리스(O.T. Allis), 그레삼 메이첸(J.Gresham Machen), 그리고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은 프린스톤 신학교를 나와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구프린스톤의 전통을 계속 보존한다는 신념으로 1929년 9월에 필라델피아에서 수업을 시작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개교 연설에서 메이첸은 2가지 사항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성경의 절대 권위였다. 그는 성경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신 평이한 책, 그리고 성경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 정확히 그대로를 의미한다\"고 강조하였다. 두 번째는 프린스톤이 이제 \"복음주의적 근거를 상실했기\" 때문에 새 신학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표현된 개혁주의 신학 입장에 확고하게 설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 사실에 부언하여 웨스트민스터에 오는 어느 학생이든지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새 신학교는 교회의 현대주의에 반대하는 다양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웨스트민스터 지지자들은 신학교가 교회에 정통주의 목회자들을 배출한다는 희망으로 단결하였다.
메이첸은 분명히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운동의 지도자였는데 그것은 그가 또한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장로교 보수주의를 이끌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궁극적으로 워필드를 이어 중요한 보수주의 장로교의 지성적 대변자로 생각되고 있던\" 저명한 신약학자였다.
그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춘 참된 기독교를 분명히 이해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고수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자와 안내자로 간주하지만 기독교는 그를 구주로 간주한다: 자유주의는 그를 신앙의 견본으로 삼지만 기독교는 신앙의 주체로 삼는다.\" 투쟁은 복음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메이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근본주의 지도자들과 달랐다. 그는 폭 넓은 문화적 관심을 가졌다. 프린스톤 전통의 일부분으로서 메이첸은 기독교 삶에서 생명력있는 경건의 중요성을 보았지만, 그는 기독교 교리는 참된 경건의 기초라고 주장하였다.
메이첸은 그의 명료한 교리적 확신 때문에 다른 보수주의자들을 포용하기보다는 한층 급진적으로 그들과 대결하는 전략을 세웠다. 해외선교 본부에 있는 현대주의에 대한 응전으로 1933년에 메이첸은 장로교 해외 독립선교 본부를 조직하였다. 북장로교 선교 본부 파송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소설가 펄 벅(Pearl Buck)이 The Christian Century에 상당히 급진적이라 할 만큼 자유주의적인 선교 재고(자유주의 입장을 갖고 해외선교를 재정립한 북장로교 선교 정책안)에 대하여 광적이라 할 만큼 긍정적인 서평을
추천자료
메이천의 후기 신학과 사상
오순절 신학의 기원
웨슬리안 조직신학 독서보고서
프린스톤 신학에 대해...
칼뱅의 목회신학
평신도 신학 - 현대 평신도 전문인선교
현대교회사_(자유주의신학의도전)
[구약신학] 민수기 35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레위인 성읍과 도피성
[구약신학] 민수기 5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성결에 대한 세부 지침
[구약신학] 민수기 10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시내에서 바란으로의 행진
[구약신학] 민수기 11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만나에 싫증난 백성들의 불평
[구약신학] 민수기 34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가나안 땅의 사방 경계
[구약신학] 민수기 36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보완된 여성 상속법
[구약신학] 민수기 17장의 성경적 이해(주해)와 현대적 적용 -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