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님의 학벌사회를 읽고 평론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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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진중권님의 학벌사회를 읽고 평론한 글 입니다.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학벌의식이 사유하는
‘우리’는 나의 개별성을 지양하고 모두를 지향하는 보편적 자기의식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사사로운 욕망을 가능한 한 확장하기 위해 학벌이라는 집단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학벌과 자기를 긴밀하게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탐욕스러워지고 더 멍청해지며, 마지막에는 더 노예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벌이란 이런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말들어낸 사회적 가족이다. 그리고 가족이 그렇듯이 학벌의식이 낳은 친밀감과 거리감도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친밀감과 거리감이 한국사회에서 자립적 주체의 형성도, 참된 이뉼ㄴ적 공동체의 형성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그것은 청와대 수석비서들 거의 전부가, 행정부의 국무위원들 반 이상이, 그리고 국회의원의 1/3이 당신의 학교 친구 선후배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대기업에 취직을 한다면 모든 부서에 없는 곳이 없이 당신의 선후배들이 있어서 밀고 당겨줄 것이다. 어쩌다 운 나쁘게 당신이 송사에 휘말린다면 판사와 검사, 그리고 변호사의 최소한 절반 이상이 당신의 동문일 것이며, 당신이 혹시 외국에라도 나가게 된다면 대사관이나 영사관에 어김없이 당신의 동문이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흔히 학벌문제를 근대화의 불가피한 산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문벌이 학벌로 탈바꿈한 것은 분명히 근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문벌이든 학벌이든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가족적 공동체라는 점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전근대적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학벌체제를 타파하는 것은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혁명이다.
한국 교육을 그렇게 살인적인 입시경쟁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바로 학벌과 대학설열 또는 계급적으로 서열 화된 학벌체제이다.
학벌체계는 사회적 불평등의 체계이다. 서울대는 한국의 왕족, 연, 고대는 귀족 그리고 대학 못 나온 사람은 천민, 이것이 한국사회의 부평등 위계이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교육은 자기실현의 기관이 아니라 보다 높은 서열의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타인과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는 전쟁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 교육의 모든 병리현상도 시작되는 것이다.
이 글을 읽고 나 나 또한 사회의 주축의 되는 서울대 사람들의 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지는 열망과 함께 열심히 노력해도 서울대 나온 사람들에게는 밀릴 것이란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인간은 오직 교육을 통해 단순한 생명체에서 인격체로 상승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이 오직 교육을 통해서만 참된 사람이 될 수 있는 한에서 교육은 인간성의 본질에 속하는 활동이다.
인간은 보편적 인간성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으로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는 자기만의 개성적 주체성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고 정립한다는 것도 두 가지 다른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보편적 인간성의 실현과 개성적 인격의 실현은 형식 논리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언제나 공속 한다.
교육이 인간의 자기실현의 기관이라면, 이제 그것은 전인교육에서 그치지 않고 학생 개개인이 개성적인 인격체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도록 도우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한 인간이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일을 직업이라 부르고, 어떤 특정한 직업에 알맞은 소질을 적성이라 부른다.
유위(有爲)의 교육 못지않게 무위(無爲)의 교육 역시 중요한 것으로서, 진정한 교육은 유위에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무위의 교육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즉 학생에게 자유를 허락하고 학생이 그 자유를 자기실현을 위해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잇게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한국 교육은 새벽부터 늦은 밤 시간까지 모든 학생들을 오직 학업에 열중하게 만들어서 도대체 어떤 훌륭함을 갖춘 사람들을 길러내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한국의 학교는 오직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시험선수를 길러낼 수 있을 뿐이다.
생각이 승인하지 않은 앎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노예적인 생각의 일이듯이, 삶 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앎을 무조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자유로운 생각의 일은 아니다. 앎이 삶 속에서 검증되는 한에서만 앎은 참이 되고 생각은 자유로워진다. 그리하여 참된 생각이 언제나 자기반성과 자기와의 대화로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이제 앎과 갊의 대화로서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의 파행은 수백 년 전 과거제도를 통해 교육이 권력획득을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되면서부터 시작된 일이며, 가까이는 신교육의 역사 속에서 학벌과 대학 서열이 고착되면서 심화된 일이다.
인간이 오직 생각함을 통해서만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있는 한에서 전인교육의 첫 번째 과제는 생각의 힘을 기르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승인한다는 것, 또한 그런 의미에서 사물의 이치를 자기 속에서 근거 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람이 사물로 향하던 마음의 눈을 돌이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의 이치를 최종적으로 자기 속에서 승인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사물의 이치를 자기의 생각의 질서와 원리에 견주어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돌이켜 생각함이란 반성이요,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다.
전인교육의 첫 번째 과제는 인간이 이 이상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도록 말과 생각의 능력을 도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이 노예적 수동성에 떨어지지 않고 근원적 자유를 실현할 수 있도록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한 번도 골프장 근처에 가보지 않은 학생이 ‘체육과 건강’ 시험을 보기 위해 드라이버 샷, 어프로치 샷, 벙커 샷 그리고 퍼팅이 무엇인지를 무작정 외우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체육 수업할 때 퍼팅이 어떻고 벙커 샷 이 어떻고 하는걸 직접 교수님이 보여 줘서 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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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09
  • 저작시기2007.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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