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조사와 재조명적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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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진왜란..조사와 재조명적입장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들어가기
임진왜란의 시작과 배경 (역사적 사실을 중점적으로 해석)

본론
1. 임진왜란...전의 한일 관계
2. 일본의 통일
3. 전쟁의 기운
4. 뒤늦은 전쟁대비
5.전쟁의 시작
6. 조선의 정세
1)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 조선의 대외관계
-일본과의 관계-
-명과의 관계-
3)조선의 군사력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국방력의 와해-
7. 일본의 정세
1)센고쿠 시대 통일
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3)일본의 군사력
8. 명의 정세
1)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 명의 대외 관계
-조선과의 관계-
-일본과의 관계-
3) 명의 군사력
9. 이순신의 등장
10. 반격 그리고 일본의 패주
11. 임진왜란의 재조명
12.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에 끼친 영향>
<일본에 끼친 영향>
<명에 끼친 영향>

결론
내용정리와 나의 견해

본문내용

한편, 조선이 이렇듯 안일한 생각을 하는 동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교섭이 결렬되자, 곧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선조 25년) 4월에 15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조정에서 급파한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 충주에서 전사하자 서울의 민심이 동요되었다. 5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6월에 평양을 빼앗겼다. 대궐을 불태우고 임금이 피난을 가자 백성의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다. 가토 기요마사는 함경도로 북진, 회령에서 두 왕자를 포로로 잡기에 이르렀다.
한편 해상에서는 경상 우수사 원균이 패하여 많은 함선을 잃었으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의 등장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특히 거북선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은 평상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을 이끌고 경상도 해안에서 일본의 수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1차는 옥포에서, 2차는 사천, 당포, 당항포에서, 3차는 한산 앞바다에서, 4차는 부산 해전에서 적선을 모조리 격파했다. 특히 한산섬 에서 적선 60여 척, 부산에서 100여 척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적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시켜 버렸다.
한편 내륙에서는 각계 각 층의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항전했고, 명나라의 도움을 얻어 평양을 다시 찾고 남진해 갔다. 서울에 모였던 왜군은 함경도에서 철수한 가토 군과 합세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권율에 의해 크게 패하였다.이 싸움은 김시민의 진주싸움, 이순신의 한산섬 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삼대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명나라 군대는 심유경을 내세워 서울에 있는 적과 화의를 교섭, 왜군이 거기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켰다. 불리한 처지에서 화의에 응했던 왜군은 갑자기 지난 진주 싸움의 치욕을 보복하려는 듯 진주 산성을 공격하여, 전란 중 가장 치열한 육전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김천일,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등이 전사하고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 그러나 심유경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영에 들어가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일단 싸움은 멎었으나, 일본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2, 3년 만에 화의는 결렬되었다.
다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4만 대군으로 재침공하니, 그것이 1597년(선조 30년)의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다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침입해 왔다. 그들은 이순신을 두려워하여 간첩을 침투시켜 그를 모함하는 데에 성공했다. 결국 이순신은 원균을 옹호하는 일파의 모함을 받아 옥에 갇혔다. 마침내 일본의 대군이 계속 상륙하자 명나라에서도 다시 원군을 급파했다. 조선에서도 이원익을 체찰사, 권율을 도원수로 삼고, 이덕형, 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창설하게 하는 동시에 방어를 굳게 하였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서 해전을 벌이니 원균 등이 전사하고 전선이 대파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명나라 연합군도 총반격을 가하고,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여 남은 선박 12척으로 해군을 재편성, 결사적인 항전 끝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그 무렵 도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후퇴했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도망가는 적함 200여 척을 격파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조선, 명, 일본의 3국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은 황폐화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경제적 파탄과 사회 질서의 붕괴를 가져왔으며, 전란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재의 손실과 각처에서 도둑이 날뛰었다. 한편 조정은 유비무환을 깨닫고 훈련도감을 만들어 무예를 닦게 했고, 각 지방에도 교관을 두어 무예를 가르쳤다. 무기도 재래식에서 개량, 발명하여 대비했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사상이 굳혀지는 반면, 왜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일본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민 경제를 퇴락시켜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권 장악을 쉽게 만들었다. 조선에서 다수의 백성을 포로로 데려다 경작 노동에 이용하는 노예 매매를 시작했다. 그 중에는 도자기 기술자가 있어 일본 도자기업을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활자를 탈취했다가 활자 기술의 커다란 발전을 보았다. \'퇴계집\' \'동의보감\' 등의 서적을 가져다 문화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이 소모된 데다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져, 만주에 있던 여진족의 세력이 팽창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서 마침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고, 동양의 국제 정세를 크게 전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까지 임진왜란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았고 이제부터는 임진왜란에 관해 재조명을 본격화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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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
1. 임진왜란...전의 한일 관계
일본은 가깝지만 먼나라이기도 하다. 지리적으로는 매우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며 하지만 문화는 우리와는 아주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옛부터 일본의 서쪽해안 주민들이 한반도 뿐만 아니라 중국 연안을 침범 약탈하고 주민을 해치고 끌고가 노예로 삼았다. 이렇기에 예부터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왜구가 큰 골치거리였다.
고려시대 원나라와 고려는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나 실패하고 뒤이어 1281년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으로 원정하나 일본열도를 감싸고 있는 심한 해류와 태풍으로 인해 이마저 실패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왜구의 침입에 대응해 수군을 강화하고 대마도 도주에게 무역을 독점하는 특권을 주는대신 왜구를 단속하라는 책임을 맡겼다. 이에 따라 세종때 부산포, 내이포, 염포에 무역항을 개설하여 어느 정도 일본인의 왕래와 무역을 허용했으나 왜구는 근절되지 않았다.
2. 일본의 통일
1338년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마지 바꾸후가 통치력을 상실하고 명목상의 존재가 되자 1477년부터 약 110년간 일본 각지에서는 자기의 역량으로 많은 부하를 모아 무력으로 나라를 지배하겠다는 호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약육강식의 원리로 계속된 전쟁을 하게 되며 이것이 일본의 전국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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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3.31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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