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기독교의 이단논쟁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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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초대기독교의 이단논쟁들을 찾아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아리우스 논쟁
2.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2.1.2 니케아 종교회의
2.2 도나투스
2.2.1 도나투스주의 발생시대의 시대적 상황
2.2.2 도나티스트의 주장
2.2.3 도나티스트의 소멸
2.3 펠라기우스
2.3.1 펠라기우스의 등장
2.3.2 펠라기우스 주장과 논쟁의 전개
2.3.3 반(半)펠라기우스 논쟁
2.4 네스토리우스
2.4.1 네스토리우스 논쟁의 전개
2.4.2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과 공의회 논의
2.5 시대적 이해를 위해 : 줄리앙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가 교회가 성립되었다.
3.1 도나투스
3.1.1 도나투스주의 발생시대의 시대적 상황
박해시대에 북아프리카에서는 특히나 심했기에 신앙을 포기한 자들의 형태와 규모가 상당하였다고 한다. 박해시대를 지나 기독교 신앙이 자유로운 시대가 도래하였고, 교회는 박해 아래 신앙을 저버린 자들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고문과 투옥을 견뎌냈지만 순교하지 않은 이들의 대하여 “고백자”라고 하였고, 성경을 넘겨주거나 박해에 굴복 했던 이들에 대해 “변절자”라고 하는데 이 “변절자”들에 대한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르타고의 감독직을 맡고 있던 멘슈리우스가 죽고 카르타고의 감독직이 비게 되었다. 당시 카이실리안을 감독으로 선출한 파(온건파)와 마조리누스를 선출한 파별로 나뉘었다. 카르타고 안에 2명의 감독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이들 안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후 70명의 누미디안의 주교들이 참석한 카르타고 총회에서 마조리누스가 주교로 승인 한다. 그러나 로마와 북아프리카 밖의 교회들은 카이실리안의 편을 든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틴이 개입하여 로마의 총회에 조사를 의뢰하고, 거기서 카이실리안을 지지하기로 하고 카이실리안의 당파를 합법적 교회로 인정하였다. 마조리누스의 당파에서 이 결정에 대해 만족 할 수 없기에 이를 다시 다루어 달라고 콘스탄틴에게 요청한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이듬해(314년)에 대도시 아를르에서 다시 다룰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도나티스들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아를르 공의회에서는 카이실리안을 옹호했고, 도나티스트는 분파주의자로 배척하고 이단 세례라고 하며 정죄해 버렸다.
이로써, 4세기 동안에 교회의 파당들이 나누어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화해시키려는 시도들 또한 실패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대략 400명의 카톡릭 감독들이 비슷한 수의 도나티스트 감독들과 맞서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 교회는 분열되었다.
3.1.2도나티스트의 주장
다시 발단의 문제로 돌아가 도나티스트주의에서 주장하였던 바를 알아보겠다. 북아프카에 교회들에게는 과거 순교와 엄격한 교회 규율에 기초한 엄격주의가 살아 있었고, 터툴리안과 시프리안에 의해서 대변되던 과거의 교회 개념과 성만찬 개념이 존속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죽을 죄를 지은 자에 의해서 실시되는 성례전은 무효하다는 것이다. 칼호이시, <<칼호이시의 세계교회사>>, 한신신학연구소, 2004, p152
좀더 자세히 그들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죽은 자는 살릴 수 없고, 상처 받은 자는 치유 할 수 없으며, 눈먼 자는 인도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제는 성례전을 집행 할 수 없다. 앙드레 베노, <<고대교회와 동방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95, p201
거룩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직무를 담당하는 중재자인 감독이 죄인이라면, 그가 하는 성례전은 문제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카이실리안에게 세례를 주었던 3명의 감독들 중 하나가 배반자 라는 것이다. 그 배반자에게 세례를 받은 카이실리안의 성직 임명 자체가 무효라는 것이다. 이에 비롯하여, 이런 자격 없는 감독에 의해 실시된 안수, 성직임명 등이 유효할 수 있는 가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도나티스트들은 카이실리안이 임명한 성직자들이 가짜이며 그들이 시행하는 성례들은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과 교제하는 자들 또한 죄를 범했다고 하였다.
3.1.3 도나티스트의 소멸
400년 이래로 도나티스트 사제들에게 안수하고 직책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411년 카르타고에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286명의 가톨릭 감독들과 279명의 도나티스트 감독들이 참석하였다. 앙드레 베노, <<고대교회와 동방교회>>, 한국신학연구소, 1995, p202
이 논쟁에서 황제는 가톨릭의 승리를 선언하였고, 도나티스트 분파는 이단으로 천명되었다. 이제 도나티스트 분파는 황제에 칙령에 의해 금지되었고, 그후 도나티스트주의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반달인들을 통해서 그 운동들은 계속되었고, 7세기 모슬렘 정복 후에야 비로소 도나투스주의는 사라지게 되었다.
4.1 펠라기우스
4.1.1 펠라기우스의 등장
성직자도 아니고 수도원 공동체의 일원도 아닌, 브리튼의 한 금욕주의자였던 펠라기우스는 390년 경에 로마에 정착한다. 로마에서 그는 금욕적인 생활의 덕을 선포하며 가르쳤고, 도덕적 완성이라는 엄격한 기준을 요구 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헌신적인 제자들의 무리를 얻었으며, 코엘레스티우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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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28
  • 저작시기2005.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2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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