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분명하지 않다.
1653년 베르메르가 스무 살 되던 해 델프트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한 살 연상의 여인 카타리나 포르네스와 결혼하였다. 결혼과 동시에 베르메르는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개종했고, 사후(43세에 사망)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40점 정도이고 거의 소품들로서 대부분 개인적인 사생활을 그렸으며,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다. 특히《델프트풍경》)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청·황 등의 정교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미술관) 《우유 따르는 하녀》《터번을 쓴 소녀》《레이스를 뜨는 소녀》등이 있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소묘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 이것은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검은 상자인데 반대편에 있는 사물의 영상을 투사하여 종이 위에 흔적을 남기는 장치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단순히 투사된 영상을 베끼는데 그치지 않았다.
④영국의 바로크
17세기 영국은 청교도의 영향으로 종교미술은 금지되어 있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은 영국인들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미술은 거의 초상화에 국한되어있었다.
♣호가드
“나는 그림의 주제를 극작가처럼 다루려고 노력한다. 나의 회화는 나의 무대이다.”라고 화가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호가드는 말했다. 호가드는 대륙의 화가들을 숭배하고 자국의 미술에 열등감을 갖고있는 영국의 문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분투하였다. 그는 ‘거장’들의 그림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비판했고 유행을 쫓는 초상화가들을 경멸하였다. 그는 초상화에서 부조화가 오히려 인물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물을 미화시키기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이 줄어 들었기 때문에 대신,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장르인 ‘풍자 판화’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협하지 않는 정직함과 유머러스함이 호가드 미술의 특징으로, 그는 “라파엘로 같은 그림의 작가가 되느니 범죄자의 행로를 그리러 돌아다니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는 판 다이크를 숭배했다. 게인즈버러는 풍경을 배경으로한 사랑스러운 초상화로 영국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원풍인 게인즈버러의 작품은 19세기에 컨스터블 같은 화가가 풍경을 단독 주제로 삼을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레이놀즈
레이놀즈는 실제를 이상화하는 데 천재였다.
⑤스페인 바로크
♣벨라스케즈 ≪라스 메니나스≫
벨라스케즈는 레오나르도의 격언인 “거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본받아 캔버스 위에 자신이 보는 바를 되도록 정확하게 그리려 애썼음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다섯 살박이 공주 마가리타가 두 명의 시녀들과 난장이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인물들을 그린 그룹 초상화이다. 이들은 아마도 가운데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화실을 방문한 방문객들인 듯한데, 비평가들은 이러한 그림 속 이미지의 이중성에 주목하였다. 이 그림은 소묘와 구성에 대한 벨라스케즈의 지속적인 관심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인물들은 자유분방하게 그룹짓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복되는 일련의 삼각형 구도로 세밀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아랫부분만을 초상화에 할애하고 위의 절반은 빛과 그림자로 채움으로써 보는 이가 실제 공간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⑥프랑스 바로크
17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루이 14세는 자신의 군주권과 왕궁의 영광을 과시하는데 놀라운 열성을 발휘했다. 로마의 유적을 모델로 베르사이유 궁을 건축한 이후 프랑스는 로마를 대신해서 유럽 미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푸생
푸생은 말 그대로 ‘아카데믹’한 화가였다. 고전작품에 매혹당한 푸생은 고대로마의 신화, 역사, 혹은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회화를 제작하였다.
푸생은 회화를 창작하는 방식의 하나인 ‘장려양식’을 창안했다. 그는 “회화 창작에서 가장 기본은 주제와 그 전개방식이 전쟁이나 영웅적인 행동, 종교적인 테마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비천한 주제들은 되도록 피하여야 한다. 일상의 묘사에 치중하는 화가들은 그들의 열등한 재능을 그런 하급 주제를 통해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클로드 로랭
로랭은 자연 그 자체와 새벽녘과 석양의 고요한 빛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랭은 이른아침과 저녁 무렵 이탈리아 시골의 낭만적인 페허와 언덕들, 늘어진 나뭇가지들, 목동들 사이에 있기를 즐겼다. 또한 그는 인물그리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자연의 거대함을 실감나게 하는 역할만을 하게했다.
6.로코코
로코코미술은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74년 동안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사조이다. 1760년 무렵 프랑스에서는 이미 뒤떨어진 유행이 되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사치스런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데 유행하였다.
로코코 양식이란 말 그대로 장식적인 예술로서 곡선적이고 우아한 장신구들을 진열해 놓은 공간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섬세한 문양, 곡선, 은제식기, 꽃무늬, 조가비, 소용돌이 무늬들이 주 된 기법이다.
로코코 예술은 장식적이었으나 당시의 무능한 귀족 계급만큼 비실용적이었다.
♣공원에서의 야유회 그림들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경박한 삶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이 야외에서 모여 놀고 있는 '페트 갈랑트 ‘그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프라고나르의 연회 그림도 또한 가볍고 경박한 것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그네≫를 보면 젊은 아가씨가 희희덕 거리며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있고 밑에 있는 그녀의 연인은 그녀의 치마 속을 훔쳐보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참고문헌
캐롤 스트릭랜드 지음, 김호경 옮김, <클릭, 서양미술사>
E.H.곰브리ㅣ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서양 미술사>
1653년 베르메르가 스무 살 되던 해 델프트의 화가조합에 등록되었고 한 살 연상의 여인 카타리나 포르네스와 결혼하였다. 결혼과 동시에 베르메르는 카톨릭에서 기독교로 종교를 개종했고, 사후(43세에 사망) 교회 묘지에 매장되었다.
현존하는 작품은 40점 정도이고 거의 소품들로서 대부분 개인적인 사생활을 그렸으며,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다. 특히《델프트풍경》)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색조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청·황 등의 정교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미술관) 《우유 따르는 하녀》《터번을 쓴 소녀》《레이스를 뜨는 소녀》등이 있다.
베르메르는 자신의 소묘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 이것은 작은 구멍이 뚫려있는 검은 상자인데 반대편에 있는 사물의 영상을 투사하여 종이 위에 흔적을 남기는 장치이다. 그러나 베르메르는 단순히 투사된 영상을 베끼는데 그치지 않았다.
④영국의 바로크
17세기 영국은 청교도의 영향으로 종교미술은 금지되어 있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은 영국인들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미술은 거의 초상화에 국한되어있었다.
♣호가드
“나는 그림의 주제를 극작가처럼 다루려고 노력한다. 나의 회화는 나의 무대이다.”라고 화가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호가드는 말했다. 호가드는 대륙의 화가들을 숭배하고 자국의 미술에 열등감을 갖고있는 영국의 문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평생 분투하였다. 그는 ‘거장’들의 그림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차없이 비판했고 유행을 쫓는 초상화가들을 경멸하였다. 그는 초상화에서 부조화가 오히려 인물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인물을 미화시키기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는 사람이 줄어 들었기 때문에 대신, 그는 자신의 고유한 장르인 ‘풍자 판화’를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협하지 않는 정직함과 유머러스함이 호가드 미술의 특징으로, 그는 “라파엘로 같은 그림의 작가가 되느니 범죄자의 행로를 그리러 돌아다니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게인즈버러
게인즈버러는 판 다이크를 숭배했다. 게인즈버러는 풍경을 배경으로한 사랑스러운 초상화로 영국 미술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원풍인 게인즈버러의 작품은 19세기에 컨스터블 같은 화가가 풍경을 단독 주제로 삼을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레이놀즈
레이놀즈는 실제를 이상화하는 데 천재였다.
⑤스페인 바로크
♣벨라스케즈 ≪라스 메니나스≫
벨라스케즈는 레오나르도의 격언인 “거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는 말을 본받아 캔버스 위에 자신이 보는 바를 되도록 정확하게 그리려 애썼음이 분명하다.
이 작품은 다섯 살박이 공주 마가리타가 두 명의 시녀들과 난장이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모습을 중심으로 여러 다른 인물들을 그린 그룹 초상화이다. 이들은 아마도 가운데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화가의 화실을 방문한 방문객들인 듯한데, 비평가들은 이러한 그림 속 이미지의 이중성에 주목하였다. 이 그림은 소묘와 구성에 대한 벨라스케즈의 지속적인 관심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인물들은 자유분방하게 그룹짓고 있는 듯 보이지만, 중복되는 일련의 삼각형 구도로 세밀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는 아랫부분만을 초상화에 할애하고 위의 절반은 빛과 그림자로 채움으로써 보는 이가 실제 공간속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⑥프랑스 바로크
17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루이 14세는 자신의 군주권과 왕궁의 영광을 과시하는데 놀라운 열성을 발휘했다. 로마의 유적을 모델로 베르사이유 궁을 건축한 이후 프랑스는 로마를 대신해서 유럽 미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푸생
푸생은 말 그대로 ‘아카데믹’한 화가였다. 고전작품에 매혹당한 푸생은 고대로마의 신화, 역사, 혹은 그리스 조각을 모델로 하여 자신의 회화를 제작하였다.
푸생은 회화를 창작하는 방식의 하나인 ‘장려양식’을 창안했다. 그는 “회화 창작에서 가장 기본은 주제와 그 전개방식이 전쟁이나 영웅적인 행동, 종교적인 테마같은 위대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비천한 주제들은 되도록 피하여야 한다. 일상의 묘사에 치중하는 화가들은 그들의 열등한 재능을 그런 하급 주제를 통해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클로드 로랭
로랭은 자연 그 자체와 새벽녘과 석양의 고요한 빛에서 영감을 받았다. 로랭은 이른아침과 저녁 무렵 이탈리아 시골의 낭만적인 페허와 언덕들, 늘어진 나뭇가지들, 목동들 사이에 있기를 즐겼다. 또한 그는 인물그리기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그저 자연의 거대함을 실감나게 하는 역할만을 하게했다.
6.로코코
로코코미술은 루이 15세가 통치한 1723~74년 동안 파리에서 성행했던 미술사조이다. 1760년 무렵 프랑스에서는 이미 뒤떨어진 유행이 되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중부 유럽에서는 18세기 말까지 사치스런 궁전이나 교회를 장식하는데 유행하였다.
로코코 양식이란 말 그대로 장식적인 예술로서 곡선적이고 우아한 장신구들을 진열해 놓은 공간에 사용되는 용어이다. 섬세한 문양, 곡선, 은제식기, 꽃무늬, 조가비, 소용돌이 무늬들이 주 된 기법이다.
로코코 예술은 장식적이었으나 당시의 무능한 귀족 계급만큼 비실용적이었다.
♣공원에서의 야유회 그림들
오로지 쾌락만을 추구하는 귀족들의 경박한 삶은 우아하게 차려입은 젊은 연인들이 야외에서 모여 놀고 있는 '페트 갈랑트 ‘그림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프라고나르의 연회 그림도 또한 가볍고 경박한 것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인 ≪그네≫를 보면 젊은 아가씨가 희희덕 거리며 자신의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있고 밑에 있는 그녀의 연인은 그녀의 치마 속을 훔쳐보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참고문헌
캐롤 스트릭랜드 지음, 김호경 옮김, <클릭, 서양미술사>
E.H.곰브리ㅣ 지음, 백승길 이종숭 옮김,<서양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