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1.생애
2.작품세계
3.작품감상
▶결론
▶본론
1.생애
2.작품세계
3.작품감상
▶결론
본문내용
조해 주었던 지라 그는 그 일에 열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김소월 이후 우리 문학사에서 자칫 끊길 뻔했던 전통적인 민요의 맥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역설적인 표현으로 그의 곤궁한 생활이 아니었던들 우리 문학사는 그만큼 여위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채집한 민요 가락을 넣어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달넘새』에 들어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시집을 엮고 난 뒤, 자신의 시에 대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가 그가 보기에도 민요라는 틀에 너무 얽매여, 살아있는 말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요라는 형식과 가락의 매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시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그의 70년대는 가정적으로 몹시 불행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닥친 불행에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의 불행을 시의 자산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1974년 그는 첫 시집 『농무』로 제 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여 1979년에 제2시집 『새재』를 간행하였다.
1981년 그는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를 간행하였고, 1983년 산문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을 간행하였으며, 1985년에 제3시집 『달넘세』와 『민요기행』제1권을 간행하였다. 그 다음다음 해에는 장시집 『남한강』을, 1988년에는 제4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89년에는 『민요기행』제2권을 간행하는 등 80년대를 창작자로서 그 누구보다 알차게 보냈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을 지내다가 1991년 12월 1일 김정한, 고은 씨에 이어 제 5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민족 예술인 총연합회 공동의 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2. 작품 세계
「낮달」(1956), 「갈대」(1956)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출발한 초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삶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썼다. 시골 농촌에 내려가 10여 년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그의 첫 시집은 1971년에야 나오게 되었다.
신경림은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린 『농무』(1971)를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민중시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던 김광섭은 『농무』에 실린 40여 편의 시는 모두 농촌의 상황시라는 평을 하였다.
신경림의 시집 『농무』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정서의 바탕인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이 땅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며 살아온 대다수의 사람들, 즉 농민들의 삶과 그 이야기를 서사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농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그들의 현실생활이 뿜어낸 정서를 살아 움직이도록 묘사하기 때문에 어떠한 독자라도 그 친근감에 빠져들게 된다. 구중서외,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 비평사, 1995, p.129. 이하 주석을 달지 않은 것은 이 책 pp.127~151까지를 요약한 것임.
신경림은 수상소감에서 “내가 자란 고장은 읍내에서 60리나 떨어져 있는 산골인데, 아버지의 제삿날이 같은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었다. 이런 농촌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겠다고 주먹을 쥐어보는 것이지만, 내 손은 너무 희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농촌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신경림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러나온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신경림은 농민들의 생활 감정을 노래하여 민중에 가까이 다가갔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궁핍한 삶, 황폐해진 광산, 떠돌이 노동자들, 도시 변두리의 뿌리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렇게 민중의 삶을 소재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시로 형상화한 신경림은 19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의 뒤를 이은, 1970년대의 대표적 참여시인, 민중시인으로 꼽힌다. 참여시인들은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탐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시인들과는 달리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의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한다.
현재까지 신경림은 농민시로서의 민중시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민요의 율격과 정신을 시에 접맥시키는 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의 결과물로 시집『달넘세』(1985),『가난한 사랑 노래』(1988), 기행 수필 『민요 기행』1,2 가 있다.
그는 시가 시인의 단순한 지적 향유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 경험을 독자에게 개방하여 시를 독자와 창조적으로 공유하는 시 방법을 채택했다. 즉 그는 독자가 자신의 시세계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위해 개인의 내면에 집착하거나 난해한 개인적 어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또 그의 시는 삶과 밀착되어 있고, 삶의 때와 얼룩이 묻어 있는 생활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신경림의 시 중 성공적인 작품들의 골격이 이야기 시의 형식을 갖는 것은 이런 특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의 소재를 민중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궁핍한 농촌, 황폐한 광산촌, 떠돌이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실상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신경림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의 아픔을 노래하지 않는 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 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하나다.
3. 작품 감상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전문
시 「갈대」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물음과 통찰을 간결한 언어구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신경림의 시 전반에 걸쳐 배어 있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따뜻한 서정은 그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덕목 중의 하나다.
갈대의 울음과 흔들림을 통해 인간의 존재문제와 인간실존의 근원적인 아픔과 외로움을 노래한 「갈대」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당시에 유행했던 어느 철인의 명제에 근거해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는 시 「갈대」에 관해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그가 채집한 민요 가락을 넣어 쓴 시들이 바로 시집 『달넘새』에 들어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시집을 엮고 난 뒤, 자신의 시에 대해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시가 그가 보기에도 민요라는 틀에 너무 얽매여, 살아있는 말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민요라는 형식과 가락의 매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시의 탄력성을 잃게 되었다는 자각이 든 것이다.
그의 70년대는 가정적으로 몹시 불행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그에게 닥친 불행에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의 불행을 시의 자산으로 승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1974년 그는 첫 시집 『농무』로 제 1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고, 그 이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여 1979년에 제2시집 『새재』를 간행하였다.
1981년 그는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또한 그 해에 『한국 현대시의 이해』를 간행하였고, 1983년 산문집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을 간행하였으며, 1985년에 제3시집 『달넘세』와 『민요기행』제1권을 간행하였다. 그 다음다음 해에는 장시집 『남한강』을, 1988년에는 제4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89년에는 『민요기행』제2권을 간행하는 등 80년대를 창작자로서 그 누구보다 알차게 보냈다.
그는 민족문학작가회의 부회장을 지내다가 1991년 12월 1일 김정한, 고은 씨에 이어 제 5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민족 예술인 총연합회 공동의 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2. 작품 세계
「낮달」(1956), 「갈대」(1956)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출발한 초기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여 삶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시를 썼다. 시골 농촌에 내려가 10여 년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60년대 말에 다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그의 첫 시집은 1971년에야 나오게 되었다.
신경림은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린 『농무』(1971)를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민중시의 깃발을 올리게 되었다. 「농무」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이던 김광섭은 『농무』에 실린 40여 편의 시는 모두 농촌의 상황시라는 평을 하였다.
신경림의 시집 『농무』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정서의 바탕인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이 땅에서 가장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티며 살아온 대다수의 사람들, 즉 농민들의 삶과 그 이야기를 서사적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농무』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그들의 현실생활이 뿜어낸 정서를 살아 움직이도록 묘사하기 때문에 어떠한 독자라도 그 친근감에 빠져들게 된다. 구중서외, 『신경림 문학의 세계』, 창작과 비평사, 1995, p.129. 이하 주석을 달지 않은 것은 이 책 pp.127~151까지를 요약한 것임.
신경림은 수상소감에서 “내가 자란 고장은 읍내에서 60리나 떨어져 있는 산골인데, 아버지의 제삿날이 같은 아이들이 10여명이나 있었다. 이런 농촌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겠다고 주먹을 쥐어보는 것이지만, 내 손은 너무 희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말했다. 6.25전쟁으로 인하여 아버지를 잃은 가난한 농촌의 생활을 직접 목격한 신경림은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우러나온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신경림은 농민들의 생활 감정을 노래하여 민중에 가까이 다가갔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의 궁핍한 삶, 황폐해진 광산, 떠돌이 노동자들, 도시 변두리의 뿌리 없는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렇게 민중의 삶을 소재로 역사의식과 민중의식을 시로 형상화한 신경림은 19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의 뒤를 이은, 1970년대의 대표적 참여시인, 민중시인으로 꼽힌다. 참여시인들은 난해하고 관념적이고 탐미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시인들과는 달리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현실의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한다.
현재까지 신경림은 농민시로서의 민중시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민요의 율격과 정신을 시에 접맥시키는 작업도 함께 하고 있다. 이런 작업의 결과물로 시집『달넘세』(1985),『가난한 사랑 노래』(1988), 기행 수필 『민요 기행』1,2 가 있다.
그는 시가 시인의 단순한 지적 향유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그 경험을 독자에게 개방하여 시를 독자와 창조적으로 공유하는 시 방법을 채택했다. 즉 그는 독자가 자신의 시세계에 쉽게 접근 할 수 있도록 했으며, 이를 위해 개인의 내면에 집착하거나 난해한 개인적 어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또 그의 시는 삶과 밀착되어 있고, 삶의 때와 얼룩이 묻어 있는 생활 서정을 노래하고 있다. 신경림의 시 중 성공적인 작품들의 골격이 이야기 시의 형식을 갖는 것은 이런 특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시의 소재를 민중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 궁핍한 농촌, 황폐한 광산촌, 떠돌이 노동자, 도시 빈민 등의 실상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신경림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의 아픔을 노래하지 않는 시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 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하나다.
3. 작품 감상
갈대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전문
시 「갈대」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물음과 통찰을 간결한 언어구사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신경림의 시 전반에 걸쳐 배어 있는 인간에 대한 이러한 따뜻한 서정은 그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덕목 중의 하나다.
갈대의 울음과 흔들림을 통해 인간의 존재문제와 인간실존의 근원적인 아픔과 외로움을 노래한 「갈대」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당시에 유행했던 어느 철인의 명제에 근거해서 씌어진 것이었다. 그는 시 「갈대」에 관해 “내 고향 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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