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생애
Ⅱ. 저술
Ⅲ. 사상
1. 에피쿠로스의 철학의 영역
2. 인식론
3. 원자론
4. 신론
5. 쾌락과 행복
Ⅳ.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의 차이점
Ⅴ. 에피쿠로스의 사상 비판
Ⅱ. 저술
Ⅲ. 사상
1. 에피쿠로스의 철학의 영역
2. 인식론
3. 원자론
4. 신론
5. 쾌락과 행복
Ⅳ. 스토아와 에피쿠로스의 차이점
Ⅴ. 에피쿠로스의 사상 비판
본문내용
생각하는 습관을 몸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도 인간인지라 많은 감정의 욕구와 환경적 요인에 의해 합리적 이성을 유지하는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혼란한 시대적 배경과 불확실한 경제적 기반은 그들의 학문적 풍토를 흔들어 놓기에 충분한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의 운용을 방해하고 어지럽히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과 욕구를 최대한 절제하고자 하는 금욕주의를 지향하였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성을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의 작용으로 보고 이성보단 직관적 감성과 지속적 쾌락에 기반을 둔 경험주의 사조의 경향을 띄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이란 키레네 학파와 같은 육체적 이고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현상적 체계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개인의 내면, 즉 정신에 바탕을 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감성과 쾌락을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틀로 여기며 그러한 기반 위에 절제된 생활과 지속적인 쾌락인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길만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자 인간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물질에의 욕구조절을 통하여 어느 사물이나 현상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정념의 상태, 즉 무념무상의 상태를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경지를 "아타락시아"라고 부fms다.
Ⅴ. 에피쿠로스의 사상 비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분명히 형이상학적 진술에 대한 것을 회피한다. 주로 존재론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바로 이 원자론이다.
원자론 자체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진 실재하는 물질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것도 무에서 나올 수도 없고 어떤 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이 사실을 증명해준다. 사실 신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희랍철학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신에 대한 묘사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희랍철학에서 헬레니즘 철학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것도 그가 이러한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관을 정리했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게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신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인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신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하여 그의 입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제 2계명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면 ‘형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것을 토대로 정신적으로 어떤 신적 대상을 꾸미거나 그리는 것 혹은 상상한 것이다. 이런 말과 같다. “나는 하나님을 위대한 건축가(혹은 수학자, 혹은 예술가)로 생각하고 싶다.” 이와 같은 논리로 에피쿠로스 역시 단순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도 우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류의 사람도 이방신화에 나오는 신도 아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하여 무식한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계시보다 철학적인 합리에 근거한 모든 사색적인 신학은 여기에서 잘못된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차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이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류의 인격이 아니시다. 그의 지혜(wisdom), 그의 목적(aims), 그의 가치(value) 규모는 다르다. 그의 나아가시는 양태는 우리의 것과 너무 광대하게 다르기 때문에 직관을 통해서 그것들에 이르는 길을 감히 추축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부터도 그것들을 유추해내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사용된 ‘안다’라는 말은 주권적인 은혜, 곧 사랑과 선택과 구속, 부르심,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신다. ‘우리를 아시되 철저하게 아신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나타난 바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불완전(imperpect)하게 알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아신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이성을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의 작용으로 보고 이성보단 직관적 감성과 지속적 쾌락에 기반을 둔 경험주의 사조의 경향을 띄었다. 여기서 말하는 쾌락이란 키레네 학파와 같은 육체적 이고 일시적인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현상적 체계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개인의 내면, 즉 정신에 바탕을 둔 고통이 없는 상태를 지향하였다. 이들은 인간의 감성과 쾌락을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틀로 여기며 그러한 기반 위에 절제된 생활과 지속적인 쾌락인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길만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자 인간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 중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겼다. 이들은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물질에의 욕구조절을 통하여 어느 사물이나 현상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정념의 상태, 즉 무념무상의 상태를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경지를 "아타락시아"라고 부fms다.
Ⅴ. 에피쿠로스의 사상 비판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은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중심으로 한 사상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분명히 형이상학적 진술에 대한 것을 회피한다. 주로 존재론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바로 이 원자론이다.
원자론 자체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진 실재하는 물질에 기인한 것이다. 어떤 것도 무에서 나올 수도 없고 어떤 것도 무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은 이 사실을 증명해준다. 사실 신에 대한 에피쿠로스의 생각은 희랍철학에 등장하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신에 대한 묘사가 이러하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이 희랍철학에서 헬레니즘 철학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것도 그가 이러한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관을 정리했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게 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신은 우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전지전능하지 않으며, 인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신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하여 그의 입장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제 2계명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면 ‘형상을 부어 만들지 말라’는 것을 토대로 정신적으로 어떤 신적 대상을 꾸미거나 그리는 것 혹은 상상한 것이다. 이런 말과 같다. “나는 하나님을 위대한 건축가(혹은 수학자, 혹은 예술가)로 생각하고 싶다.” 이와 같은 논리로 에피쿠로스 역시 단순히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그도 우리와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류의 사람도 이방신화에 나오는 신도 아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들 가운데 존재하는 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하여 무식한 것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계시보다 철학적인 합리에 근거한 모든 사색적인 신학은 여기에서 잘못된 것이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차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이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류의 인격이 아니시다. 그의 지혜(wisdom), 그의 목적(aims), 그의 가치(value) 규모는 다르다. 그의 나아가시는 양태는 우리의 것과 너무 광대하게 다르기 때문에 직관을 통해서 그것들에 이르는 길을 감히 추축할 수도 없으며,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형으로부터도 그것들을 유추해내기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그를 알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사용된 ‘안다’라는 말은 주권적인 은혜, 곧 사랑과 선택과 구속, 부르심, 성도의 견인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신다. ‘우리를 아시되 철저하게 아신다’는 것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 12절에서 나타난 바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불완전(imperpect)하게 알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하게 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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