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왕정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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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절대 왕정의 상징,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베르사유 궁전의 연혁

2. 절대 왕정

3. 루이 14세

4. 궁전의 내부
(1) 거울의 방
(2) 왕실예배당
(3) 국왕의 침실
(4) 왕비의 침실
※마리 앙뜨와네뜨
(5) 전쟁의 방

5.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6. 건축에 사용된 양식

7. 여행정보

본문내용

애쓴 다음 프로테스탄트에게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던 낭트 칙령을 1685년에 철회했다. 칙령이 철회되고 무자비한 박해가 뒤따르자 수많은 수공업자들이 프랑스를 등지고 떠나야 했으며 역경이 끝없이 닥쳐왔다. 이리하여 루이 14세 치세는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상공업에 종사하던 신교도들이 국외로 이주함으로써 프랑스 산업은 타격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의 대외 전쟁과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의 결핍을 초래하고 절대왕정의 모순이 증대하였다.
그리고 그의 만년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피해로 프랑스는 그전에 얻었던 모든 이득을 대부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1709). 게다가 루이는 개인적인 슬픈 일들을 잇따라 당했다. 그는 아들인 왕세자, 손자인 부르고뉴 공과 베리 공, 증손자인 브르타뉴 공, 부르고뉴 공작부인을 잃었다. 궁정 안에서는 아첨이 넘쳐흐르고 밖에서는 악담이 빗발쳐 왕의 모습은 불운이 닥쳐오면 무너져버릴 우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승승장구하는 나라의 화신(化身)이던 루이는 그 자신의 아픔과 자기 백성의 아픔을 끊임없는 결단으로 견뎌냄으로써 평소의 자기가 해내는 것 이상으로 성과를 이루어냈다.
런던에서는 궁정혁명이 일어나 화평을 주장하는 토리당이 권력을 잡았고, 게다가 프랑스가 드냉 전투에서 신성 로마 황제의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마침내 전쟁이 끝을 맺게 되었다. 1713~14년에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와 바덴 조약으로,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내놓긴 했지만 영토를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프랑스는 플랑드르와 라인 지방에서 최근에 정복했던 영토를 그대로 지니게 되었는데 프랑스는 뒷날 어떠한 패배나 혁명으로도 그 지역을 잃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대중의 비웃음을 받는 가운데 생드니 바실리카에 묻혔다. 부르고뉴 공의 막내 아들이 그의 뒤를 이었으나 5세의 어린아이였으며 몹시 병약했다. 조카인 오를레앙 공을 못미더워한 루이는 실권을 몽테스팡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 멘 공에게 넘겨주고 싶어했다.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그 유언장은 결과적으로 왕정이 몰락하도록 재촉한 셈이었다. 즉 그가 죽고 난 뒤 유언장을 무효화하기 위해 소집된 파리 고등법원(Parlement)은 권력을 되찾아 모든 개혁을 저지하는 데 이용했고, 이로 말미암아 프랑스는 대혁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는 한 원인이 되었다.
(2) 루이14세(프랑스)의 업적
왕권 신수설을 신봉하고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궁전을 지어 궁전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중상주의 정책 실시
-강력한 군대 양성
-학문과 예술 장려
-베르사유의 궁전 축조
-\'짐은 곧 국가다\' 라고 말함
-말년에 위그노 박해, 잦은 침략 전쟁 → 심각한 재정난
(3) 루이14세가 활동할 당시의 시대 배경
서유럽이 절대주의가 있었던 때인데 에스파냐가 절대주의를 제일 먼저 확립했습니다.
(4) 루이14세가 한일이 후세에 미친 영향
루이 14세는 믿음이 좋은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으나 엄청난 사치로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매일 매일 궁전에서 파티를 열음으로써 그는 \'태양왕\'이라고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4. 베르사유 궁전의 내부
(1) 거울의 방
(거울의 방 정면도)
(거울의 방 샹들리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길이 73m, 너비 10.5m, 높이 13m인 회랑이다. 궁정 의식을 치를 때나 외국 특사를 맞이할 때 사용한 거울의 방의 아케이드를 가득 메운 17개의 거울은 거의 천장까지 치솟아 있는데, 거기에는 정원이 비쳐질 뿐만 아니라 같은 크기로 마주보고 있는 17개의 창을 통해 빛이 들어와 반사되기도 한다. ‘거울의 방’은 남쪽과 북쪽이 트여 있어, 샤를 르브룅이 설계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으로 연결된다. 북쪽 끝에 있는 전쟁의 방은 네이메헨 평화 조약을 이끈 루이 14세의 군사적 승리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색조 회반죽으로 만든 커다란 타원형 돋을새김에는 싸움터에서 말을 타고 있는 국왕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남쪽 끝에 있는 평화의 방에서는 유럽의 평화를 확립한 루이 14세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상징적이다.
거울의 방에선 역사적인 일들이 여럿 있었다. 거울의 방은 프랑스 혁명으로 옛 체제가 무너진 뒤에는 이용을 제한하게 되었다. 그런데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1871년 1월 18일에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이 곳에서 독일 황제 즉위식을 가졌다. 프랑스 국민은 이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비록 전쟁에는 졌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던 이 유서 깊은 회랑이 짓밟혔다는 사실이 그들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했던 것이다.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919년 6월 28일에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독일에게 강화 조약을 조인하도록 강요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조건을 부과했기 때문에, 결국 이 때 남은 앙금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2)왕실 예배당
(왕실 예배당 내부)
(왕실 예배당 천장벽화)
루이 14세때 만들어진 왕실 예배당. 루이 14세가 매일 예배를 드렸다는 곳으로
1층에선 궁중인들이, 2층에선 왕족들이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성서를 모티브로 한 아름다운 회화들이 전면에 그려져 있으며, 높은 천장에 그려져 있는 삼위일체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그림이다. 왕실 예배당의 제단은 황금색으로 매우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 1770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의 결혼식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앞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진 오페라의 방(l’Opera Royal)이 있다.
(3)국왕의 침실 (루이 14세의 방)
궁전 중앙에 있는 방으로 국왕이 사용하던 방이다.
(4) 왕비의 침실 (마리 앙뜨와네뜨의 방)
루이 14세의 왕비로부터 마리 앙뜨와네뜨까지 3명의 왕비가 사용한 침실. 현재 공개하는 부분은 마리 앙뜨와네뜨가 사용하던 방이다. 과거에 이 방은 왕실 전용 조산소 역할도 했는데, 관습에 따라 가족 입회 하에 출산이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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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6.16
  • 저작시기2007.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69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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