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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상고시대 】
◈ 고대가요
◈ 향가
◈ 설화
【 고려시대 】
◈ 고려속요
◈ 경기체가
◈ 고시조
◈ 패관문학
◈ 가전
【 조선시대 】
◈ 악장
◈ 가사
◈ 고대소설
◈ 고대수필
◈ 판소리
◈ 민속극
-작품의 이해
해당 장르의 핵심 작품 정리
◈ 고대가요
◈ 향가
◈ 설화
【 고려시대 】
◈ 고려속요
◈ 경기체가
◈ 고시조
◈ 패관문학
◈ 가전
【 조선시대 】
◈ 악장
◈ 가사
◈ 고대소설
◈ 고대수필
◈ 판소리
◈ 민속극
-작품의 이해
해당 장르의 핵심 작품 정리
본문내용
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밖에는 설명되지 않는다.
한편 서동요의 해석을 어학적으로, 구비문학적인 면에서 다시 고찰하여 ‘서동에 의해 개작되기 이전의 노래, 즉 <마노래>가’ 있었음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은 동요의 일반 유형을 재구해보기도 했다.(엄국현, <서동요 연구>, <<한국문학 논총 11집>>, 1990.10.)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마 퉁방을
밤에 도깨를 안고 가다.
여기서의 공주는 ‘바리공주’ ‘칠공주’ 등 서사무가 속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창자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으로 본다. 마 퉁방이란 ‘마를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로 마의 생김새가 남성 상징으로 파악되며, 이 경우 남성 상징과 연결시켜 대립소로서 ‘도깨’ 즉, 마를 담는 바구니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일상적 여성의 생활공간일 수 있는 마 퉁방이 여성의 은밀한 성적 유희의 장소로서도 파악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통혼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이 작품을 민요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善花公主(선화공주)니믄
그지 얼어 두고 : 이 부분의 일반적 해석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맛바 서방을 정해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정도
바 몰 안고 가다.
4. 풍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당시의 승려인 양지(良志)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가 영묘사(靈竗寺)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각할 때에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운반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는 가문을 알 수 없는 신분이고, 지팡이와 자루를 보내 동냥을 했다고 하듯이 일반 백성 단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스스로 장인 노릇을 했다. 풍요라는 명칭은 민요라는 의미이지 개별 작품의 명칭은 아니다. 노동요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서민들의 애환을 두루 담고 있다.
풍요(風謠) [또는 공덕가(功德歌)]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오다 서럽더라
셔럽다 의내여 서럽다 내 친구들이여
功德 닷라 오다 공덕 닦으로 오다
‘서럽더라’의 해석 :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원하지 않은 노동에 동원되는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2. 불교적인 의미에서 인생이 무상하다.
5. 헌화가
순정공이 강릉 태수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그의 부인 수로가 바닷가 절벽 위에 핀 철죽을 탐낼 적에, 위험한 일이므로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나서서 꽃을 꺾어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헌화가(獻花歌)
견우노옹
딛배 바회 짓붉은 바위가에
자온손 암쇼 노시고 잡고 가던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 안디 붓리샤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곶 것가 받리다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민요의 기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용에게 잡혀갔다는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수로부인을 무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라 헌화가와 해가를 굿에서 불렀을 굿노래, 즉 무가로 보기도 한다.
한편, 조동일의 경우 좀더 상세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당시 경주 변방에 민심이 소란하자 순정공은 힘으로 다스리고, 부인으로 굿을 다스리기 위해 함께 갔을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동해안 지역을 돌며 굿을 여러 번 했을 것이며, ‘꽃거리’라고 이름 짓고 싶은 곳에서는 헌화가를 부르고, ‘용거리’라고 할 대목에서는 해가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화가는 상층 굿에 이미 수용된 노래이고 해가는 현장에서 채집되어 한번 부르고 만 하층민들의 토속적인 무가이기 때문에 헌화가는 향가로 남고 해가는 한역되어 단순히 자료로 기록되기만 했다는 견해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불교를 최고 이념으로 삼고, 유교에 입각한 제도와 관습을 채택하기도 했다. 아울러 무속의 전통을 함께 이어 융합을 꾀했으며, 특히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을 때는 굿을 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6. 처용가
굿노래이면서 연극의 대사이기도 한 작품이다. 처용이 굿을 했고, 헌강왕도 왕이 차차웅이던 시기의 기능을 재현하고자 했다.
긔 래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리 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① 이 노래는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실려 있다. 처용은 용왕의 아들로 경주에 들어가 예쁜 아내를 얻고 급간 벼슬을 하였다. 밤에 그의 아내가 역신과 함께 동침하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났다고 한다. 뒤에 처용의 화상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하여 문신門神이 되었다. 처용의 이야기는 뒤에 처용무, 처용희 등으로 극화되었으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이 노래와 춤이 지속되었고, 12월 그믐에 잡귀를 몰아내는 나례 때에 처용놀이를 하기도 했다. 처용랑 망해사 설화에는 망해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와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나라가 망할 것을 신이 미리 예고했지만 왕과 신하들은 방탕한 생활에 젖어 끝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② 처용가의 원초적 모습은 歌가 아니라 ‘말’이다 : 처용가의 원초적인 모습은 ‘歌’가 아니라 입에서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허탈감에 싸인 ‘말’이었으리라는 증거로 그것이 ‘歌’로 체계화되고 난 후에도 시가적인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병욱 교수는 처용가에는 시적인 수사도, 긴장도, 내포도 그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7. 혜성가
창작 년대는 신라 진평왕 16년(594)으로 고증되었다. 융천사 지은 10구체 향가이다. 세 화랑이 풍악에 놀러 가려고 할 때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心大星:신라 또는 왕을 상징하는 별)을 범하였다. 그때 노래를 지어 부르니 성괴(星怪)가 사라지고, 일본병이 환국하여 도리어 경사스러웠다는 배경 설화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언어와 사실을 동일시하려는 주술적 상징이 담겨 있다. 나타난 혜성이 없다고 함으로써 혜성을 사라지게 할 수 이따고 믿는 고대인의의식이 바탕이 되고 있으며, 이 노래를 지은 융천사의 이름이 천사(天師)인 것으로 보아 하늘의 일을 관장하는 전문관이자 주술사였다고 보아진다. 무속적인 전통이 불교적으로 고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녜 ㅅ
한편 서동요의 해석을 어학적으로, 구비문학적인 면에서 다시 고찰하여 ‘서동에 의해 개작되기 이전의 노래, 즉 <마노래>가’ 있었음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은 동요의 일반 유형을 재구해보기도 했다.(엄국현, <서동요 연구>, <<한국문학 논총 11집>>, 1990.10.)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얼어 두고
마 퉁방을
밤에 도깨를 안고 가다.
여기서의 공주는 ‘바리공주’ ‘칠공주’ 등 서사무가 속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창자나 지역적 특성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부분으로 본다. 마 퉁방이란 ‘마를 보관하는 방’이란 의미로 마의 생김새가 남성 상징으로 파악되며, 이 경우 남성 상징과 연결시켜 대립소로서 ‘도깨’ 즉, 마를 담는 바구니의 일종으로 해석한다. 일상적 여성의 생활공간일 수 있는 마 퉁방이 여성의 은밀한 성적 유희의 장소로서도 파악되어질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보였다. 더구나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통혼이 있을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이 작품을 민요로 보게 만드는 이유이다.
善花公主(선화공주)니믄
그지 얼어 두고 : 이 부분의 일반적 해석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맛바 서방을 정해 사랑을 나누고 있다‘는 정도
바 몰 안고 가다.
4. 풍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 향가로서 당시의 승려인 양지(良志)와 관련된 노래이다. 그가 영묘사(靈竗寺)에 장륙존상(丈六尊像)을 조각할 때에 장안의 남녀들이 진흙을 운반하여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양지는 가문을 알 수 없는 신분이고, 지팡이와 자루를 보내 동냥을 했다고 하듯이 일반 백성 단골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며 스스로 장인 노릇을 했다. 풍요라는 명칭은 민요라는 의미이지 개별 작품의 명칭은 아니다. 노동요로서 불교적인 내용과 서민들의 애환을 두루 담고 있다.
풍요(風謠) [또는 공덕가(功德歌)]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셔럽다라 오다 서럽더라
셔럽다 의내여 서럽다 내 친구들이여
功德 닷라 오다 공덕 닦으로 오다
‘서럽더라’의 해석 :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1. 원하지 않은 노동에 동원되는 괴로움을 하소연하고 있다.
2. 불교적인 의미에서 인생이 무상하다.
5. 헌화가
순정공이 강릉 태수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그의 부인 수로가 바닷가 절벽 위에 핀 철죽을 탐낼 적에, 위험한 일이므로 아무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소를 끌고 가던 한 노인이 나서서 꽃을 꺾어 바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헌화가(獻花歌)
견우노옹
딛배 바회 짓붉은 바위가에
자온손 암쇼 노시고 잡고 가던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 안디 붓리샤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곶 것가 받리다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민요의 기본 형식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용에게 잡혀갔다는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수로부인을 무당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라 헌화가와 해가를 굿에서 불렀을 굿노래, 즉 무가로 보기도 한다.
한편, 조동일의 경우 좀더 상세한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당시 경주 변방에 민심이 소란하자 순정공은 힘으로 다스리고, 부인으로 굿을 다스리기 위해 함께 갔을 것이라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동해안 지역을 돌며 굿을 여러 번 했을 것이며, ‘꽃거리’라고 이름 짓고 싶은 곳에서는 헌화가를 부르고, ‘용거리’라고 할 대목에서는 해가를 불렀을 것으로 추정한다. 헌화가는 상층 굿에 이미 수용된 노래이고 해가는 현장에서 채집되어 한번 부르고 만 하층민들의 토속적인 무가이기 때문에 헌화가는 향가로 남고 해가는 한역되어 단순히 자료로 기록되기만 했다는 견해이다.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불교를 최고 이념으로 삼고, 유교에 입각한 제도와 관습을 채택하기도 했다. 아울러 무속의 전통을 함께 이어 융합을 꾀했으며, 특히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을 때는 굿을 했을 것으로 보아진다.
6. 처용가
굿노래이면서 연극의 대사이기도 한 작품이다. 처용이 굿을 했고, 헌강왕도 왕이 차차웅이던 시기의 기능을 재현하고자 했다.
긔 래
밤 드리 노니다가
드러 자리 보곤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 내해다마
아 엇디릿고.
① 이 노래는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에 실려 있다. 처용은 용왕의 아들로 경주에 들어가 예쁜 아내를 얻고 급간 벼슬을 하였다. 밤에 그의 아내가 역신과 함께 동침하는 것을 보고 이 노래를 불렀더니 그 역신이 물러났다고 한다. 뒤에 처용의 화상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하여 문신門神이 되었다. 처용의 이야기는 뒤에 처용무, 처용희 등으로 극화되었으며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이 노래와 춤이 지속되었고, 12월 그믐에 잡귀를 몰아내는 나례 때에 처용놀이를 하기도 했다. 처용랑 망해사 설화에는 망해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와 그리고 몇 차례에 걸쳐 나라가 망할 것을 신이 미리 예고했지만 왕과 신하들은 방탕한 생활에 젖어 끝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② 처용가의 원초적 모습은 歌가 아니라 ‘말’이다 : 처용가의 원초적인 모습은 ‘歌’가 아니라 입에서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허탈감에 싸인 ‘말’이었으리라는 증거로 그것이 ‘歌’로 체계화되고 난 후에도 시가적인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병욱 교수는 처용가에는 시적인 수사도, 긴장도, 내포도 그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7. 혜성가
창작 년대는 신라 진평왕 16년(594)으로 고증되었다. 융천사 지은 10구체 향가이다. 세 화랑이 풍악에 놀러 가려고 할 때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心大星:신라 또는 왕을 상징하는 별)을 범하였다. 그때 노래를 지어 부르니 성괴(星怪)가 사라지고, 일본병이 환국하여 도리어 경사스러웠다는 배경 설화를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언어와 사실을 동일시하려는 주술적 상징이 담겨 있다. 나타난 혜성이 없다고 함으로써 혜성을 사라지게 할 수 이따고 믿는 고대인의의식이 바탕이 되고 있으며, 이 노래를 지은 융천사의 이름이 천사(天師)인 것으로 보아 하늘의 일을 관장하는 전문관이자 주술사였다고 보아진다. 무속적인 전통이 불교적으로 고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녜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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