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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디어의 역사
(해방이후~70년대)
Ⅰ. 8·15광복과 언론
1. 일본의 패망과 언론의 자유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게 되자 한국은 36년간의 일본식민지정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은 곧 한국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일본세력 대신 복에는 소련군, 그리고 남에는 미국군이 진주하여 장차 민간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군정이 실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첫째, 일본의 세력을 대체할 만한 강력하고 조직적인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점과, 둘째, 태평양전쟁의 주요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완전한 정치적인 타결을 보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이같이 해서 남한에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의지배를 받게 되었다.
2. 미군정의 언론정책
군정책임자는 미 제 24군 사령관 하지중장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한 언론자유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식민정책 당시 실시되었던 모든 언론관계법을 폐기했고 누구나 원하면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군정의 언론시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문의 발행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꿈으로써 누구나 원하면 신문을 낼 수 있도록 했다.
② 신문의 자유는 좌익지 경우에도 해당이 되어 한동안 좌익지와 우익지의 나립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국가이면서도 이같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노선에 통조하는 좌익지를 허용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는 첫째, 미국이 공산국가인 소련과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소련과의 완전한 결렬보다는 타협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과, 둘째, 언론자유는 어느 한편에 편파적일 수 없다는 원칙에 입각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같은 좌익지 허용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미국과 연합국에 의해 패망하게 되자 일본은 맥아더사령부의 지배(1945~1953)를 받게 되었데 맥아더사령부는 한국의 경우와 같이 좌익계 내지는 공산계 신문을 허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아까하다와 같은 공산계 신문은 한국동란과 함께 맥아더사령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③ 신문을 포함한 언론의 자유도 사회질서와 치안을 방해하게 되면 제재를 받도록 되었다.
3. 좌익지와 우익지의 대립
앞서 말한 미군정의 언론정책은 결국 신문의 홍수현상과 좌익지ㅘ 우익지의 심각한 대립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서 우익지라 함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지지하는 신문이고, 좌익지라고
(해방이후~70년대)
Ⅰ. 8·15광복과 언론
1. 일본의 패망과 언론의 자유
일본이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게 되자 한국은 36년간의 일본식민지정책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은 곧 한국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는 일본세력 대신 복에는 소련군, 그리고 남에는 미국군이 진주하여 장차 민간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군정이 실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첫째, 일본의 세력을 대체할 만한 강력하고 조직적인 정치세력이 없었다는 점과, 둘째, 태평양전쟁의 주요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완전한 정치적인 타결을 보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이같이 해서 남한에는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의지배를 받게 되었다.
2. 미군정의 언론정책
군정책임자는 미 제 24군 사령관 하지중장이었다. 그는 한국에 대한 언론자유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식민정책 당시 실시되었던 모든 언론관계법을 폐기했고 누구나 원하면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했다.
미군정의 언론시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신문의 발행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꿈으로써 누구나 원하면 신문을 낼 수 있도록 했다.
② 신문의 자유는 좌익지 경우에도 해당이 되어 한동안 좌익지와 우익지의 나립시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미국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국가이면서도 이같이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 노선에 통조하는 좌익지를 허용하게 된 이유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는 첫째, 미국이 공산국가인 소련과 동맹관계에 있었으며 소련과의 완전한 결렬보다는 타협을 바라고 있었다는 점과, 둘째, 언론자유는 어느 한편에 편파적일 수 없다는 원칙에 입각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같은 좌익지 허용은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미국과 연합국에 의해 패망하게 되자 일본은 맥아더사령부의 지배(1945~1953)를 받게 되었데 맥아더사령부는 한국의 경우와 같이 좌익계 내지는 공산계 신문을 허용했다. 그러나 일본에 있어서 아까하다와 같은 공산계 신문은 한국동란과 함께 맥아더사령부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③ 신문을 포함한 언론의 자유도 사회질서와 치안을 방해하게 되면 제재를 받도록 되었다.
3. 좌익지와 우익지의 대립
앞서 말한 미군정의 언론정책은 결국 신문의 홍수현상과 좌익지ㅘ 우익지의 심각한 대립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서 우익지라 함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의 정부를 수립할 것을 지지하는 신문이고, 좌익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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