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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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조선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I.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배경

II.중국 조선족 자치주

III.중국 조선족자치주의 발전

IV.중국 조선족 사회의 문제점

V.조선족에 대한 중국의 정책

VI.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대책 방안

맺음말

본문내용

이더니 마침내 10월 20일 중공연변위원회(중공연변위원회)가 간도임시적부를 접수하게 된다. 새로 개편된 연변현(연변현)은 연길, 훈춘, 화룡, 왕청, 그리고 안도의 5개 현을 포함하고 간도시를 연길시(연길시)라 개칭하고 연변의 중심지로 하였다. 초대 연길현장으로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문정일(문정일)이 임명되고 군사를 담당하는 연변군분구(연변군분구)는 독립항일군 출신의 강신태(강신태)가 담당한다.
연변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연변에서는 토비를 토벌하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연변군분구의 병력은 1945년 12월 화룡현 안탄(만탄)에 있는 토비 백여명을 섬멸하고 1946년에는 화룡, 연길, 안도, 왕청 등지의 토비를 공략하니 이것을 5개월전쟁(5개월전쟁)이라 한다.
해방 후 연변에서 있었던 큰 사건의 하나가 위에서 본 해란강대유혈사건(해란강대유혈사건)의 청산 대회(청산대회)이다. 1946년 10월 연길시에 소집된 군중대회에 18명의 당 사건의 주범이 인민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7일간 계속된 청산대회에 1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으며 30여명의 증인이 당시의 참상을 보고하고 주범들을 처형한 것이다.
중공이 행한 업적의 하나가 토지개혁(토지개혁)이다. 공산당은 1946년 국민당과의 투쟁을 진행하면서 토지개혁에 착수하였다. 중앙의 지시에 따라 연변에 토지개혁공작단(토지개혁공작단)이 조직되고 마을 단위로는 농민협회(농민협회)가 조직된다. 처음 실시한 사업은 부농(부농)의 여유분을 거두어 농민협회의 이름으로 농민에게 분배한 것이다. 1947년에 실시한 2단계 작업은 공판대회(공판대회)를 열어 지주를 대중 앞에서 비판하고 이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한 것이다. 1948년 1월과 2월에 행한 토지개혁의 3단계는 대진군운동(대진군운동)이라 하여 당의 관료주의자를 숙청하고 농민에게 방자한 자를 숙청한 것이다.
일본의 굴복으로부터 모택동이 중공국가를 건립할 때까지 1945년에서 1949년까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군이 싸운 전쟁을 해방전쟁(해방전쟁)이라 한다. 당시 재중한인들은 주로 공산군에 가담하여 많은 성과를 올린다. 1947년 시작된 동만독립단(동만독립단), 1947년에 조직된 동남민주연군(동남민주연군) 제10종대의 제28사(사), 제29사, 제30사는 주로 한인들로 편성된 부대이다. 이들이 동북지방의 중요한 전투인 사평방위전쟁(사평방위전쟁), 도시공격전(도시공격전), 길림장춘해방전(길림장춘해방전), 요번전쟁(요번전쟁)
에 참가하였고, 산해관을 넘어서는 평진전쟁(평진전쟁)을 위시하여 멀리 해남도(해남도)까지 진격하였었다. 현재 70세 전후반 재중한인들은 대부분 이러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을 가졌다.
해방전쟁시 연변에서 있었던 가장 큰 전투는 왕청현에서의 격전이다. 1946년 조선의용군 3지대장인 주덕해(주덕해)가 흑룡강성 할빈에서의 전투를 끝내고 내려와 왕청에서 국민당군을 맞아 싸웠으며 국민 당군을 돈화까지 추격하여 연변에서 축출하였다. 이 전투의 공로로 주덕해는 동북인민정부 민족사무처 처장이 되었고, 또한 국민당 혁명위원회 주석인 이재심과의 정치협상에 성공하여 주덕해는 중공정부의 부주석이 된다.
1950년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기 2개월 전 동북3성에 있는 한인들이 3개 사단을 편성하여 평양에 도착한다. 항미원조(항미원조)의 이름으로 감행된 북한 후원은 병력만이 아니라 헌납운동을 전개하여 97억 6천만원을 모금하여 전투기 6대를 구입하게 하였고, 물품으로 돼지 418두 현금 15억원을 모아 북한을 원조하였다.
II.중국 조선족 자치주
1. 자치주 설립
1952년 8월 27일 연변 전구의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그리고 안도현 등 5현 1시의 인구 71만 명의 대표자 300명이 대회를 가졌으니 이것이 제1기 인민대표회의이다. 300명의 대표는 지구별, 계층별, 민족별로 고려해 선정된 사람들이다. 5일간 계속된 대표자대회에서 자치구 법률인 두 조례가 채택되었으니, 하나는 “길림성 연변 조선민족자치구 각족각계급 인민 대표회 조직조례”이고, 하나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 조직조례”이다. 동 대회는 주덕해를 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하고 부주석에 한족등 온곡과 조선족 최채를 선출하고 정부위원, 법원장, 감찰원장등을 포함한 32명의 협상위원을 선정했다.
9월 3일 3만여 명의 시민이 인민광장에 모여 자치구 경축대회를 개최했고, 이곳에서 인민대표회 대표 주덕해가 연변조선족자치구 인민정부를 선포했다. 감격에 들뜬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고 시가 행진을 벌이며 자치구를 경축했다.
중국 국무원은 1954년 4월에 제정한 신헌법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아니라 자치주로 비준한다. 동 비준에 따라 동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기 인민대표회가 소집되고 이곳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선언되고, 주덕해가 주장으로 선축되었으며 17명으로 구성된 주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연변자치주가 성립될 당시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아도현이 포함되었고 인구는 85만4천여 명이었으며, 그 중 조선족이 53만 명으로 전체의 62%를 점유했다. 그후 1958년 10월 돈화현이 연변자치주에 편입되었고, 1965년 5월에 도문진이 연변자치주에 편입되었다.1985년 5월 도문진,훈춘현, 돈화현, 화룡현이 현에서 시로 승격하고 연길현이 용정시로 승격해 연변에는 현재 6개 시 2개 현을 포함하게 되었다.
중국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외에 장백조선족자치현과 8개의 자치진, 34개의 자치향이 있다.
2.자치주 현황
① 연변의 자연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한 주로 총면적이 42,700㎢이니, 이것은 길림성 총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자치주는 동경 127도 27분과 131도 18분 사이와 북위 41도 59분과 44도30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자치주의 동은 러시아 연해주의 핫산지역과 접경하고 그 길이는 232,7km가 된다. 자치주의 남부는 북한의 함경북도 양강도와 접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522,5km나 된다. 북은 흑룡강성과 접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지세는 대체로 서부가 높고 동부가 낮으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으며 동남으로 경사를 이루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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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12
  • 저작시기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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