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그리고 이 상징체계가 갖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 말하였는데 이는, 봉황의 가슴에 있는 2개의 구멍을 포함한 뚜껑에 나 있는 12개의 연기구멍으로 향훈이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가무와 음악으로 천지를 아우르고 신과 인간, 왕과 백성, 남과 여, 귀족과 평민 모두가 한데 어울려 주인이 되는 세상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비록 신분제 사회였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나마 신, 인간, 사회가 모두 하나가 되는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봉황을 중심으로 한 이 향로를 통해 형상화해냈던 것이다.
뚜껑에 표현된 다른 형상들도 살펴보면 산중의 신선들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도 하며, 머리를 감고, 말을 타고 달리거나 수렵을 즐기기도 한다. 74곳(41곳의 능선을 가진 산과 화생중인 33곳의 산)의 봉우리와 봉황, 다리부분의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39마리의 동물과 악사 산중의 신선 등 16인의 인물상이 표현되고 있다. 이밖에도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산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 되어 낙하하는 폭포, 낚시터가 된 잔잔한 물결까지 나타낸 호수가 있다. 또 향로의 노신을 싸고 있는 연꽃잎들에는 두 신선과 물고기 먹는 수달,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생물, 물가의 생활과 밀접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슴과 학등 26마리의 동물이 보여 결국 이 향로 전체에는 신선으로 보이는 인물 18인, 동물 65마리가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여러 상징들로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관도 이루고, 한편으로는 음의 정점인 수중세계의 용, 그 위의 지상세계, 다시 천상세계로 나누어 양의 정점인 봉황에 이르기까지 동양 전통의 음양설을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어 내고 있기도 하다.
말머리를 약간 틀어서, 이 백제 대향로를 통해 그 당시의 최첨단 금속공예기술 또한 엿볼 수 있다. 향로에선 용받침과 몸체, 뚜껑과 새장식 등 세군데의 연결부분을 제외하고는 단 한 군데도 이어 붙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74개의 산봉우리와 18명의 사람, 백가지가 넘는 등장물들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금속연구가 이호관 씨는 밀랍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석고나 부드러운 진흙을 부어 새로 형틀을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정교한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백제의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석결과 이 향로의 원형은 '실랍 주조법'으로 만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먼저 밀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산모양의 밀랍을 덧붙인다. 산이 완성되면 따로 만들어 둔 장식을 붙이고 틀이 완성되면 그 위에 주물토를 입힌다. 그리고 용기에 담아 가열하면 밀랍은 녹아 내리고 주물토 사이에 빈 공간이 남아 거푸집이 완성된다. 그리고 쇳물을 붓는 과정에서 가스가 생겨 매끈하지 못한 표면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800-900도로 예열을 한다. 구리와 주석을 주로 하고 여기에 아연성분까지 첨가하여 7세기 후반 당시 중국보다 더 앞선 최첨단의 금속기술로 문양을 더욱 섬세하게 재현하였다. 또한 향로 표면에는 10에서 20마이크론 정도의 일정한 두께로 정교하게 금도금이 돼 있는데 이는 그 때의 도금기법인 수은아말감법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당시 최고최첨단의 금속공예기술이 백제 대향로가 1300년 동안 땅에 묻혀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Ⅲ. 결론
성왕 때 사비천도를 준비하면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520년대 후반에서 530년대 전반기 사이로 추정된다. 이 향로는 천도와 함께 사비에 세워진 신궁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유적지는 본래 사비의 신궁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신궁은 성왕 말기에 있었던 제사체계의 변화로 한 때 방치되기도 했지만 위덕왕 때 신불양립의 정책에 따라 567년 신궁사로 개편되었으며, 백제대향로는 이곳 신궁에서 계속 사용되다가 백제가 멸망할 때 부속건물 중 하나인 공방터의 수조에 황급히 매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훗날을 기약했던 백제왕의 상징인 향로는 그렇게 잿더미에 묻혔고 1300년 동안 깊은 잠을 자야 했다. 백제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삼국 중에서도 가장 적은 편이다. 흔히 백제를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백제 대향로는 사료와 유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다양하고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준다.
요컨데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 그리고 그 제조기술은 오히려 중국을 뛰어 넘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신선사상이라는 동양인의 사고체계를 형성한 장엄한 두바퀴가 불꽃처럼 어우러져 성취된 백체인들의 세련된 공예문화요, 화생예술인 것이다.
‘백제인들은 코즈머폴리턴 환경조건에 대하여 적응의 폭이 넓어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생물. 생물지리학의 입장에서는 둘 이상의 대륙에 걸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다.’
마지막으로 서정록 저자가 <백제금동대향로>의 머릿글에 올린 첫 문장이 생각난다. 약간 파격적인 비유이기는 하나, 어쩐지 백제의 특성이 묻어나는 듯도 하다.
<참고문헌>
1.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백제, 1999, 통천문화사
2.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시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사리감, 1996, 통천문화사
3.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2001, 학고재
4. 정종목, 역사스페셜, 2000, 효형출판
5. 최몽룡 외, 백제를 다시보다, 1998, 도서출판 주류성
<참고사이트>
1. http://www.keriss.re.kr/~skyblue/history/a/a-2/a22/b-2c-kum287.htm 삽입그림
2. http://www.gift45.com/special/incenseburner/insenseburner.htm 삽입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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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에 표현된 다른 형상들도 살펴보면 산중의 신선들은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낚시도 하며, 머리를 감고, 말을 타고 달리거나 수렵을 즐기기도 한다. 74곳(41곳의 능선을 가진 산과 화생중인 33곳의 산)의 봉우리와 봉황, 다리부분의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39마리의 동물과 악사 산중의 신선 등 16인의 인물상이 표현되고 있다. 이밖에도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산중턱을 가르며 난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 되어 낙하하는 폭포, 낚시터가 된 잔잔한 물결까지 나타낸 호수가 있다. 또 향로의 노신을 싸고 있는 연꽃잎들에는 두 신선과 물고기 먹는 수달, 날개 달린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생물, 물가의 생활과 밀접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슴과 학등 26마리의 동물이 보여 결국 이 향로 전체에는 신선으로 보이는 인물 18인, 동물 65마리가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여러 상징들로 만물의 생명이 연꽃에서 탄생한다는 불교의 연화화생관도 이루고, 한편으로는 음의 정점인 수중세계의 용, 그 위의 지상세계, 다시 천상세계로 나누어 양의 정점인 봉황에 이르기까지 동양 전통의 음양설을 적용하여 하나의 우주를 이루어 내고 있기도 하다.
말머리를 약간 틀어서, 이 백제 대향로를 통해 그 당시의 최첨단 금속공예기술 또한 엿볼 수 있다. 향로에선 용받침과 몸체, 뚜껑과 새장식 등 세군데의 연결부분을 제외하고는 단 한 군데도 이어 붙인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74개의 산봉우리와 18명의 사람, 백가지가 넘는 등장물들이 한 덩어리로 만들어진 것이다. 금속연구가 이호관 씨는 밀랍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석고나 부드러운 진흙을 부어 새로 형틀을 만들지 않으면 그렇게 정교한 모양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백제의 기술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분석결과 이 향로의 원형은 '실랍 주조법'으로 만들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먼저 밀랍으로 틀을 만들고 그 위에 산모양의 밀랍을 덧붙인다. 산이 완성되면 따로 만들어 둔 장식을 붙이고 틀이 완성되면 그 위에 주물토를 입힌다. 그리고 용기에 담아 가열하면 밀랍은 녹아 내리고 주물토 사이에 빈 공간이 남아 거푸집이 완성된다. 그리고 쇳물을 붓는 과정에서 가스가 생겨 매끈하지 못한 표면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800-900도로 예열을 한다. 구리와 주석을 주로 하고 여기에 아연성분까지 첨가하여 7세기 후반 당시 중국보다 더 앞선 최첨단의 금속기술로 문양을 더욱 섬세하게 재현하였다. 또한 향로 표면에는 10에서 20마이크론 정도의 일정한 두께로 정교하게 금도금이 돼 있는데 이는 그 때의 도금기법인 수은아말감법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당시 최고최첨단의 금속공예기술이 백제 대향로가 1300년 동안 땅에 묻혀 완벽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었던 것이다.
Ⅲ. 결론
성왕 때 사비천도를 준비하면서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향로의 제작연대는 520년대 후반에서 530년대 전반기 사이로 추정된다. 이 향로는 천도와 함께 사비에 세워진 신궁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향로가 발굴된 부여 능산리 유적지는 본래 사비의 신궁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신궁은 성왕 말기에 있었던 제사체계의 변화로 한 때 방치되기도 했지만 위덕왕 때 신불양립의 정책에 따라 567년 신궁사로 개편되었으며, 백제대향로는 이곳 신궁에서 계속 사용되다가 백제가 멸망할 때 부속건물 중 하나인 공방터의 수조에 황급히 매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훗날을 기약했던 백제왕의 상징인 향로는 그렇게 잿더미에 묻혔고 1300년 동안 깊은 잠을 자야 했다. 백제에 관한 기록이나 유물은 삼국 중에서도 가장 적은 편이다. 흔히 백제를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 백제 대향로는 사료와 유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다양하고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준다.
요컨데 백제금동대향로는 중국향로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였으되 조형성이나 회화적인 구도, 그리고 그 제조기술은 오히려 중국을 뛰어 넘는 탁월한 예술적 감각과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 향로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7세기초에 백제인들의 정신세계와 예술적 역량이 함축되어 이루어진 백제공예품의 진수라 할 것이다. 그리고 불교와 신선사상이라는 동양인의 사고체계를 형성한 장엄한 두바퀴가 불꽃처럼 어우러져 성취된 백체인들의 세련된 공예문화요, 화생예술인 것이다.
‘백제인들은 코즈머폴리턴 환경조건에 대하여 적응의 폭이 넓어 넓은 지역에 분포하는 생물. 생물지리학의 입장에서는 둘 이상의 대륙에 걸쳐 있는 것을 말한다.
이다.’
마지막으로 서정록 저자가 <백제금동대향로>의 머릿글에 올린 첫 문장이 생각난다. 약간 파격적인 비유이기는 하나, 어쩐지 백제의 특성이 묻어나는 듯도 하다.
<참고문헌>
1.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백제, 1999, 통천문화사
2. 국립청주박물관, 특별전시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사리감, 1996, 통천문화사
3. 서정록, 백제금동대향로, 2001, 학고재
4. 정종목, 역사스페셜, 2000, 효형출판
5. 최몽룡 외, 백제를 다시보다, 1998, 도서출판 주류성
<참고사이트>
1. http://www.keriss.re.kr/~skyblue/history/a/a-2/a22/b-2c-kum287.htm 삽입그림
2. http://www.gift45.com/special/incenseburner/insenseburner.htm 삽입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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