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논의의 접근방법
(1) 구조적 접근방법
(2) 기능론적 접근방법
2. 태국 국왕의 리더십 형성 배경
(1) 농경사회의 전통
(2) 불교와 통치이념
(3) 신분사회의 전통
3. 정치적 상황과 왕의 리더십
(1) 입헌혁명으로 인한 왕의 지위
(2) 싸릿 집권 후의 왕의 지위
(3) 왕의 개인적인 활동과 왕의 지위
(1) 구조적 접근방법
(2) 기능론적 접근방법
2. 태국 국왕의 리더십 형성 배경
(1) 농경사회의 전통
(2) 불교와 통치이념
(3) 신분사회의 전통
3. 정치적 상황과 왕의 리더십
(1) 입헌혁명으로 인한 왕의 지위
(2) 싸릿 집권 후의 왕의 지위
(3) 왕의 개인적인 활동과 왕의 지위
본문내용
거의 없다. 농경사회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태국사람들은 농경사회의 특징과 같이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태국사람들은 변화와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느린 성향이 있다. 또한 농촌사회는 인간생활의 생존과 관련된 기본적인 것을 생산하는 사회이어서 전통적으로 자급자족 사회이었다. 이러한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주민들의 교류가 그들만의 사회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중앙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향이 있다. 농경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오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태국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치라는 중앙에서 일어나는 일은 멀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농촌사회의 보아온 것을 종합하자면, 태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해오고, 지금도 하고 있는 농업은 태국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점에 있어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변화가 적고 관습에 의존하는 논경사회의 전통은 예전부터 태국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져온 국왕의 대한 존경심, 탐마라차에 대한 이상을 유지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2) 불교와 통치이념
1) 태국사회에서 불교의 역할
가. 사회적 역할
태국에서의 불교는 13세기 말 람캄행 왕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때 도입된 불교의 종류는 소승불교이다. 그리고 1990년도 태국교육부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전 태국국민의 약 95.4%가 상좌부불교를 믿으며,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 3.7%를 믿는다고 한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금까지도 태국사람들에게 불교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에 도입된 불교는 현재까지도 태국사회의 사회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사회의 구성원의 대다수가 불교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운영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은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태국사람들의 삶 속부터 시작된다. 태국사람들은 집집마다 불단을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새벽마다 탁발나온 승려가 들고 있는 그릇에 승려 일인당 한 끼니 분의 음식을 준다. 그리고 옛날부터 사원은 태국사람에게 있어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한 생활의 중심지였다. 또한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 외에 스승, 상담자, 새로운 문물의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간의 다리역할 등의 기능을 하였다. 즉, 태국사람에게 있어서 불교란, 그들에 삶 속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나. 불교와 정치문화
태국사회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는 불교는 태국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오랫동안 민족고유의 문화형성에 가장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불교가 정치적 문화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태국의 불교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엄격한 불교적 계율에 속박되어 있고, 개인의 해탈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소승불교의 성격으로 인해, 태국사람들은 사회문제나 민중구제 같은 집단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태국사람들은 개인적인 사고방식의 바탕 위에서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정치에 있어서 정치적 무관심을 형성하는데 한 이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국인의 의식은 불교사상에서의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내용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낳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라는 것이다. 또한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자신이나 후손에게 되돌아온다고 생각하여 공덕을 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그래서인지 태국에서 반국가 행위나 불발쿠데타 등으로 역모를 꾀한 중죄인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죄악을 두려워하여 극형에 처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의 정신으로 용서한다.
2)통치이념
가. 탐마라차
탐마라차라는 개념은 쑤코타이 시대에 등장한 개념이다. 우선 쑤코타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자. 쑤코타이시대에는 온정주의적 통치가 이루어 졌다. 쑤코타이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삼고 국왕이 마치 자식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국가를 통치했다. 예를 들자면, 왕은 직접 자신의 백성에게 불교 관련된 것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의 영위를 위하여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왕에 대해서 백성들은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온정주의적 통치를 하였던 쑤코타이시대에, 태국사람들은 법을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여기고 그를 탐마라차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법은 불교에서 나오는 시법이다. 시법은 국왕이 이상적으로 준수해야 할 10가지의 통치덕목을 언급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정, 온화, 노력, 불노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왕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갖게 되며, 법을 거슬러서 불법을 저지르는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 당하게 된다. 실제로 법을 어기는 왕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일이 정당화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탐마라차의 통치이념은 오늘날까지도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태국 사람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기 때문에 불교적 원칙으로 통치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서는 쑤코타이시대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태국사람들은 쑤코타이 시대의 통치가 이상적인 통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국사람들은 가부장적인 왕의 통치 하에서 국민들은 평화를 누렸고 국가는 번영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태국국민들의 생각 때문인지, 쑤코타이시대 이후의 태국의 국왕들은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국민들 역시 탐마라차를 원하고 탐마라차일때 왕의 정당성을 인정해준다. 그 노력으로서 한가지 예는, 쑤코타이시대 이후의 태국의 국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승가를 후원함으로써 법을 행하는 탐마라차로서 인정받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승가를 후원하는 방법으로는 사원 건축, 토지하사, 우기가 끝난 후의 가사전달 의식 등이 있다.
나. 테와랏
테와랏이라는 개념은 아유타야 왕국
지금까지 농촌사회의 보아온 것을 종합하자면, 태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해오고, 지금도 하고 있는 농업은 태국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점에 있어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변화가 적고 관습에 의존하는 논경사회의 전통은 예전부터 태국사람들의 마음속에 가져온 국왕의 대한 존경심, 탐마라차에 대한 이상을 유지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이다.
(2) 불교와 통치이념
1) 태국사회에서 불교의 역할
가. 사회적 역할
태국에서의 불교는 13세기 말 람캄행 왕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때 도입된 불교의 종류는 소승불교이다. 그리고 1990년도 태국교육부 종교국의 통계에 의하면 전 태국국민의 약 95.4%가 상좌부불교를 믿으며, 그 다음으로는 이슬람교 3.7%를 믿는다고 한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금까지도 태국사람들에게 불교라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13세기에 도입된 불교는 현재까지도 태국사회의 사회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사회의 구성원의 대다수가 불교적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모든 것을 행하게 되기 때문에, 사회운영에 있어서 불교의 역할은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불교의 사회적 영향력은 태국사람들의 삶 속부터 시작된다. 태국사람들은 집집마다 불단을 만들어 두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새벽마다 탁발나온 승려가 들고 있는 그릇에 승려 일인당 한 끼니 분의 음식을 준다. 그리고 옛날부터 사원은 태국사람에게 있어 학교, 병원, 재판소, 오락장, 놀이터, 여행객을 위한 여관, 복지관, 집회장, 박물관, 양로원, 고아원, 장례식장 등의 기능을 한 생활의 중심지였다. 또한 승려는 종교적인 역할 외에 스승, 상담자, 새로운 문물의 전달자, 재판관, 의료인, 정부와 국민간의 다리역할 등의 기능을 하였다. 즉, 태국사람에게 있어서 불교란, 그들에 삶 속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나. 불교와 정치문화
태국사회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는 불교는 태국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오랫동안 민족고유의 문화형성에 가장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당연히 불교가 정치적 문화의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태국의 불교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소승불교이다. 소승불교는 엄격한 불교적 계율에 속박되어 있고, 개인의 해탈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소승불교의 성격으로 인해, 태국사람들은 사회문제나 민중구제 같은 집단적인 문제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태국사람들은 개인적인 사고방식의 바탕 위에서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정치에 있어서 정치적 무관심을 형성하는데 한 이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국인의 의식은 불교사상에서의 윤회와 업보에 대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의 내용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낳고, 악한 일을 하는 것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라는 것이다. 또한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자신이나 후손에게 되돌아온다고 생각하여 공덕을 쌓는 일에 정성을 다 한다. 그래서인지 태국에서 반국가 행위나 불발쿠데타 등으로 역모를 꾀한 중죄인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인 죄악을 두려워하여 극형에 처하지 않고 관용과 자비의 정신으로 용서한다.
2)통치이념
가. 탐마라차
탐마라차라는 개념은 쑤코타이 시대에 등장한 개념이다. 우선 쑤코타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보자. 쑤코타이시대에는 온정주의적 통치가 이루어 졌다. 쑤코타이는 가정을 기본단위로 삼고 국왕이 마치 자식을 다스리는 것과 같이 국가를 통치했다. 예를 들자면, 왕은 직접 자신의 백성에게 불교 관련된 것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국왕은 백성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생활의 영위를 위하여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왕에 대해서 백성들은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온정주의적 통치를 하였던 쑤코타이시대에, 태국사람들은 법을 법에 따라 정의롭게 통치하는 왕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여기고 그를 탐마라차라고 불렀다. 여기서의 법은 불교에서 나오는 시법이다. 시법은 국왕이 이상적으로 준수해야 할 10가지의 통치덕목을 언급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공정, 온화, 노력, 불노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왕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갖게 되며, 법을 거슬러서 불법을 저지르는 왕은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 당하게 된다. 실제로 법을 어기는 왕의 통치권을 거부하는 일이 정당화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탐마라차의 통치이념은 오늘날까지도 이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태국 사람의 대부분이 불교를 믿기 때문에 불교적 원칙으로 통치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서는 쑤코타이시대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태국사람들은 쑤코타이 시대의 통치가 이상적인 통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국사람들은 가부장적인 왕의 통치 하에서 국민들은 평화를 누렸고 국가는 번영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태국국민들의 생각 때문인지, 쑤코타이시대 이후의 태국의 국왕들은 탐마라차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국민들 역시 탐마라차를 원하고 탐마라차일때 왕의 정당성을 인정해준다. 그 노력으로서 한가지 예는, 쑤코타이시대 이후의 태국의 국왕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승가를 후원함으로써 법을 행하는 탐마라차로서 인정받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승가를 후원하는 방법으로는 사원 건축, 토지하사, 우기가 끝난 후의 가사전달 의식 등이 있다.
나. 테와랏
테와랏이라는 개념은 아유타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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