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조선(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
Ⅱ. 조선(조선시대)의 과거제도
1. 종류
2. 형식
3. 방법
4. 선발제도
Ⅲ. 조선(조선시대)의 토지제도(과전법 시행)
1. 과전법 규정
2. 전시과와 과전법의 공통점과 차이점
Ⅳ. 조선(조선시대)의 신분제도
1. 양반
2. 중인
3. 상민
4. 천민
Ⅴ. 조선(조선시대)의 군역과 군사제도
Ⅵ. 조선(조선시대)의 궁중예복
Ⅶ. 조선(조선시대)의 건축
참고문헌
Ⅱ. 조선(조선시대)의 과거제도
1. 종류
2. 형식
3. 방법
4. 선발제도
Ⅲ. 조선(조선시대)의 토지제도(과전법 시행)
1. 과전법 규정
2. 전시과와 과전법의 공통점과 차이점
Ⅳ. 조선(조선시대)의 신분제도
1. 양반
2. 중인
3. 상민
4. 천민
Ⅴ. 조선(조선시대)의 군역과 군사제도
Ⅵ. 조선(조선시대)의 궁중예복
Ⅶ. 조선(조선시대)의 건축
참고문헌
본문내용
녀자와 큰 차이가 없는 옷차림을 하였다. 즉 하반신은 4~5가지 속곳을 갖추어 입고 상의로는 저고리 삼작(三作)을 입었다. 저고리 삼작이란 속적삼속저고리저고리, 이 세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양반집 부녀자라면 절대로 속살이 비치지 않도록 이를 다 갖추어 입는 것이 당연하다.
비빈과 왕녀들은 노랑저고리가 정식이었고, 속저고리는 분홍색, 저녁에 침전에 들 때도 보통 분홍저고리를 입는다고 한다. 요즘은 누구나 겹치마에 치마폭도 넓게 해 입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 이상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궁중에서 입는 치마는 스란이든 대란이든, 또는 상궁들의 남치마까지도 일반인들의 치마보다 넓게 만들어 입었다. 예복용은 겹치마로 만들고, 비빈이나 공주옹주 등은 금박단을 댄 스란치마나 대란치마를 입는다. 궁중예복용 치마는 청홍 두 벌을 이중으로 겹쳐 입고, 위에 입은 치마 밑으로 안에 입은 치마의 스란단에 보이게 입었다. 또 치마가 잘 퍼지도록 너른바지, 서양의 페티코트와 비슷한 개념의 무지기치마나 대숨치마를 겹겹이 입어 치마가 풍성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퍼지게 하였다.
치마의 색은 다홍이나 남색이 일반적이고, 자주치마는 왕실 왕비 외에는 입을 수 없는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치마색이었다. 그 일례로서 영친왕의 생모 엄비가 정실 대우를 받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를 모신 상궁들의 대답이 \"그럼요. 용 흉배에 자디(자주)치마까지 다 입었는데…\"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 자주치마는 의례복으로만 입는다.
대봉잠(大鳳簪) 상부는 봉잠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비녀다. 영왕비가 1922년 4월 순종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 때 법복인 적의 착용시 대수에 꽂았던 봉잠이다.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한편 구중궁궐 궁녀들의 옷차림은 화려할 것 같지만, 궁중 법도가 아주 엄하기 때문에 제복과 같은 빛깔의 옷차림에 머리모양도 일정하여 개성미를 살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궁인들은 평소에는 옥색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으며, 예복으로 상궁 등은 당의나 원삼을 입을 수 있지만 금박은 하지 않는다. 또 계절에 따라 의복 종류를 바꿔 입을 때도, 웃전(上典)에서 갈아입은 후에야, 다음 계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궁궐 안에서는 계절별행사별로 어떠한 차림을 해야 하는지 머리모양과 비녀, 의복의 종류와 색깔옷감장신구에 이르기까지의 규범이 상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즉 탄일(誕日)에는 소례복인 안팎 두 벌의 스란치마와 직금(織金)당의와 세 줄 노리개를 차고 문안을 드린다든지, 여름에는 금장신구를 하지 않되 직금(織金)옷에는 괜찮다든지 하는 규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궁중복식의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왕실에서는 백성들에게 검소하게 보이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장신구는 순금이 아닌 은(銀)에 금도금(金鍍金)을 하여 사용하였다.
Ⅶ. 조선(조선시대)의 건축
조선시대의 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건축으로는 궁궐·사찰·향교·서원 등이 주종을 이루었고, 건축양식은 고려시대에 수용되었던 주심포(柱心包)와 다포(多包)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주심포는 초기에 조성된 사찰의 주요법당을 비롯하여 지방의 성곽문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다포는 궁궐의 정전(正殿)과 주요건물 및 사찰의 법당에 주로 사용되었고 중기 이후에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주심포 양식은 간략화된 익공(翼工) 양식으로 변화되어 궁궐의 침전(寢殿), 사찰의 부속건물, 향교와 서원 등의 유교적 건물, 이밖에 개인 건물 등에 사용되었다. 전반적으로 초기와 중기에는 건물 전체의 통일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었지만, 후기에는 각 부분이 강조되면서 장식화되는 성향을 보인다. 석조건축으로는 석탑·부도(浮屠)·석교(石橋)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은 사찰의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옮겨져 조성되었으며 명과 청나라의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승탑(僧塔)인 부도의 조성은 조선시대를 통해 더욱 보편화되었고, 고려말부터 유행했던 복발탑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석교는 홍예식(虹霓式)과 미식(梶式)의 2종류가 있다.
참고문헌
고석규(1998), 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김태영(1991), 조선시기 농민의 사회적 지위, 한국사시민강좌6, 일조각
박평식(1999), 조선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이범직(1994), 조선전기의 신분제, 한국사7, 한길사
윤남한(1982),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
천관우(1952),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 역사학보 3
최완기, 조선시대사의 이해
비빈과 왕녀들은 노랑저고리가 정식이었고, 속저고리는 분홍색, 저녁에 침전에 들 때도 보통 분홍저고리를 입는다고 한다. 요즘은 누구나 겹치마에 치마폭도 넓게 해 입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 이상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궁중에서 입는 치마는 스란이든 대란이든, 또는 상궁들의 남치마까지도 일반인들의 치마보다 넓게 만들어 입었다. 예복용은 겹치마로 만들고, 비빈이나 공주옹주 등은 금박단을 댄 스란치마나 대란치마를 입는다. 궁중예복용 치마는 청홍 두 벌을 이중으로 겹쳐 입고, 위에 입은 치마 밑으로 안에 입은 치마의 스란단에 보이게 입었다. 또 치마가 잘 퍼지도록 너른바지, 서양의 페티코트와 비슷한 개념의 무지기치마나 대숨치마를 겹겹이 입어 치마가 풍성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퍼지게 하였다.
치마의 색은 다홍이나 남색이 일반적이고, 자주치마는 왕실 왕비 외에는 입을 수 없는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치마색이었다. 그 일례로서 영친왕의 생모 엄비가 정실 대우를 받았느냐고 질문했을 때 그를 모신 상궁들의 대답이 \"그럼요. 용 흉배에 자디(자주)치마까지 다 입었는데…\"라고 대답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이 자주치마는 의례복으로만 입는다.
대봉잠(大鳳簪) 상부는 봉잠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비녀다. 영왕비가 1922년 4월 순종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 때 법복인 적의 착용시 대수에 꽂았던 봉잠이다.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한편 구중궁궐 궁녀들의 옷차림은 화려할 것 같지만, 궁중 법도가 아주 엄하기 때문에 제복과 같은 빛깔의 옷차림에 머리모양도 일정하여 개성미를 살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궁인들은 평소에는 옥색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으며, 예복으로 상궁 등은 당의나 원삼을 입을 수 있지만 금박은 하지 않는다. 또 계절에 따라 의복 종류를 바꿔 입을 때도, 웃전(上典)에서 갈아입은 후에야, 다음 계절 옷으로 갈아입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궁궐 안에서는 계절별행사별로 어떠한 차림을 해야 하는지 머리모양과 비녀, 의복의 종류와 색깔옷감장신구에 이르기까지의 규범이 상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즉 탄일(誕日)에는 소례복인 안팎 두 벌의 스란치마와 직금(織金)당의와 세 줄 노리개를 차고 문안을 드린다든지, 여름에는 금장신구를 하지 않되 직금(織金)옷에는 괜찮다든지 하는 규정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궁중복식의 규정보다 중요한 것은 조선 왕실에서는 백성들에게 검소하게 보이기 위하여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장신구는 순금이 아닌 은(銀)에 금도금(金鍍金)을 하여 사용하였다.
Ⅶ. 조선(조선시대)의 건축
조선시대의 건축은 크게 목조건축과 석조건축으로 나눌 수 있다. 목조건축으로는 궁궐·사찰·향교·서원 등이 주종을 이루었고, 건축양식은 고려시대에 수용되었던 주심포(柱心包)와 다포(多包)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주심포는 초기에 조성된 사찰의 주요법당을 비롯하여 지방의 성곽문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 다포는 궁궐의 정전(正殿)과 주요건물 및 사찰의 법당에 주로 사용되었고 중기 이후에 더욱 널리 사용되었다. 그리고 주심포 양식은 간략화된 익공(翼工) 양식으로 변화되어 궁궐의 침전(寢殿), 사찰의 부속건물, 향교와 서원 등의 유교적 건물, 이밖에 개인 건물 등에 사용되었다. 전반적으로 초기와 중기에는 건물 전체의 통일적인 구조에 중점을 두었지만, 후기에는 각 부분이 강조되면서 장식화되는 성향을 보인다. 석조건축으로는 석탑·부도(浮屠)·석교(石橋) 등을 들 수 있다. 석탑은 사찰의 중심지에서 외곽으로 옮겨져 조성되었으며 명과 청나라의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승탑(僧塔)인 부도의 조성은 조선시대를 통해 더욱 보편화되었고, 고려말부터 유행했던 복발탑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석교는 홍예식(虹霓式)과 미식(梶式)의 2종류가 있다.
참고문헌
고석규(1998), 19세기 조선의 향촌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김태영(1991), 조선시기 농민의 사회적 지위, 한국사시민강좌6, 일조각
박평식(1999), 조선상업사연구, 지식산업사
이범직(1994), 조선전기의 신분제, 한국사7, 한길사
윤남한(1982),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
천관우(1952),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 역사학보 3
최완기, 조선시대사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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