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화기의 문체의 존재 양상과 함의
1. 국한문체(國漢文體) 등장의 배경과 의미
2. 한글 전용론과 그 이념적 배경
Ⅱ. 개화기의 시조
Ⅲ. 개화기의 배재학당 교육
1. 한문
2. 영어
3. 교양교육
Ⅳ. 개화기의 극장문화
Ⅴ. 개화기의 서양과수 재배기술
1. 전통 과일재배 기술의 발전
2. 개화기 서양 과일재배 기술의 도입
참고문헌
1. 국한문체(國漢文體) 등장의 배경과 의미
2. 한글 전용론과 그 이념적 배경
Ⅱ. 개화기의 시조
Ⅲ. 개화기의 배재학당 교육
1. 한문
2. 영어
3. 교양교육
Ⅳ. 개화기의 극장문화
Ⅴ. 개화기의 서양과수 재배기술
1. 전통 과일재배 기술의 발전
2. 개화기 서양 과일재배 기술의 도입
참고문헌
본문내용
도처에 수업 적병들 쥐 숨 듯이.(설상검, 1909. 1. 13)
을 밋을 것가 못 밋을 손 이로다
밋을 만 사시절도 전혀 밋들 못거니
믈며 교사인심 이 세상에 엇지 을.(물시인, 1909. 2. 3)
곱흔 우라면 산채야소 엇더며
쓰러진 집 닐으킬 제 큰 재목만 소용되랴
아마도 남녀로소 일심되면 무소부위.(합중력, 1909. 7. 15)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생략된 부분에 올 만한 말이 무엇인지를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위의 작품들에서도 각각 는구나, 밋을소냐, 리라가 생략된 것으로 추리해 낼 수 있다. 위의 예에서처럼 대부분의 작품들은 완결되지 않은 채 끝맺는다. 그러나 네 마디만 채우면 마지막 마디의 문장 성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생략되는 현상은 앞서 지적한 시가의 시화 현상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 이미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본질을 이전한 상태에서 굳이 시조창의 관습을 존중하고 계승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시조는 본래 가곡으로 불리어진 노래다. 조선조 후기에 와서 시조라는 새로운 창의 관습이 생겨났다. 그러나 가곡과 시조는 단지 노랫말만 같을 뿐, 그 체계나 곡조는 대단히 이질적이다. 종장의 마지막 마디가 생략되는 것은 그 이질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시조는 북전(北殿)이라는 창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전창의 형식이 시조의 노랫말을 다 용해시키지 못한 데서 마지막 마디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가곡은 시조에 비해 훨씬 높은 격조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시조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조 후기의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은 사실은 가곡집으로서, 작품의 종장 마지막 마디가 완전히 표기되어 있다. 반면에 남훈태평가와 이세보의 풍아에는 이것이 생략된 것이 일반적이다. 가곡원류 발문에서 박효관은 창이 타락함을 개탄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가곡집을 엮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타락한 창은 바로 시조창을 일컫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 시조창으로 불리어지는 노랫말이 고시조 작품이라는 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화기의 시조가 시조창의 관습에 따라 종장 마지막 마디를 생략한 채로 표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창으로는 불리어지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시조창의 경우 약 1분 정도의 시간에 한 장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창법으로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긴 개화기 시조 작품을 소화하기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개화기 시조에서 종장의 마지막 마디가 생략된 것은 가창을 전제로 창작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표기법 자체의 관습을 존중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표기 방식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분행을 하고 구두점을 표기한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시조를 세 줄로 나누어 적고, 처음 두 줄에는 반 줄이 끝날 때, 마지막 줄에서는 첫 토막 및 반 줄이 끝날 때 쉼표를 찍었으며, 한 줄이 끝날 때에는 마침표를 찍었다.
간밤에 비오더니, 봄 소식이 완연하다.
무령 화류들도, 러 퓌엿.
엇지타, 이천만의 뎌 인중은, 잠줄을.(화류절, 1909. 4. 4)
세상사들아, 소로로 가지마라.
당당 너른 길이, 녜로부터 잇것마는.
어지타, 시속인심은, 소로로만.(대로행, 1909. 7. 1)
이는 율격의 짜임새를 명학하게 인식한 증거라 하겠다. 이러한 배려는 신문 독자가 글을 읽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지, 노랫말을 일정한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데 필요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 속에 있는 문자에는 음성적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구술하는 말에는 반드시 이러저러한 억양이나 목소리의 어조가 있다. 아무런 억양도 없이 목소리로 말할 수는 없다. 문자화된 텍스트에서 구두법은 목소리의 어조를 지시하기 위한 표시이다.
이밖에도 4행이라는 파격을 보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의 형태시와 유사한 행배열을 보이는 작품도 있어, 개화기의 시조가 독서물로 전환해 갔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한편 개화기 시조는 형태상의 변모와 함께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에서도 전대 시조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시조의 본류는 역시 사대부의 그것에 있다. 사대부의 시조는 가사 및 한시와 더불어 그들만의 세계를 확인하고 발견하는 글쓰기 행위였다. 그러나 가사는 일정한 곡조에 얹어서 부르기에는 지나친 장형이었고, 한시는 구어와 문어의 불일치로 인해 창작과 향유에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에 시조는 짓고 부르기에 가장 적절한 시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소리의 묘운을 살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대부 문학은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을 동시에 구유하고 있었다. 사대부(士大夫)라는 말 자체가 이미 사와 대부라는 두 가지 성격의 삶을 내포한 합성어이듯이, 그들의 문학 또한 이에서 평행하게 두 가지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성격이란 다름 아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영역이며, 시조는 이 두 가지 영역에 동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로서의 삶에 관심이 있을 때는 합일화의 시조로, 대부로서의 삶에 관심이 있을 때는 객관화의 시조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지향이 모순적이지 않고,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역군은이샷다와 같은 표현이다. 이러한 작품은 사대부들이 강호한정(江湖閑情)의 한쪽 세계에서도 다른 한쪽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지향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경우 대부분은 주자학적 체제에 대한 주자학적 세계관의 대응으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다. 고려 말엽이나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일군의 작품들이 우국충정의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경우에도 그 순응적인 태도는 마찬가지이다. 중세적 가치 체계 속에서 체제에 대한 비판이란 곧 방외인으로의 전락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의 시조에는 현실 비판과 저항 의식이 3백여 편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화단
흉중에 불이 나셔 오장이 다 간다
황혜암을 에 맛나 불 약을 무러보니
우국으로 난 불이니 부국면(1890. 1. 9)
한반도
한반도 금수강산 례의지방 분명다
신성 단군셔 셰
을 밋을 것가 못 밋을 손 이로다
밋을 만 사시절도 전혀 밋들 못거니
믈며 교사인심 이 세상에 엇지 을.(물시인, 1909. 2. 3)
곱흔 우라면 산채야소 엇더며
쓰러진 집 닐으킬 제 큰 재목만 소용되랴
아마도 남녀로소 일심되면 무소부위.(합중력, 1909. 7. 15)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생략된 부분에 올 만한 말이 무엇인지를 문맥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위의 작품들에서도 각각 는구나, 밋을소냐, 리라가 생략된 것으로 추리해 낼 수 있다. 위의 예에서처럼 대부분의 작품들은 완결되지 않은 채 끝맺는다. 그러나 네 마디만 채우면 마지막 마디의 문장 성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생략되는 현상은 앞서 지적한 시가의 시화 현상과 모순될 수밖에 없다. 이미 노래하는 시에서 읽는 시로 본질을 이전한 상태에서 굳이 시조창의 관습을 존중하고 계승할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시조는 본래 가곡으로 불리어진 노래다. 조선조 후기에 와서 시조라는 새로운 창의 관습이 생겨났다. 그러나 가곡과 시조는 단지 노랫말만 같을 뿐, 그 체계나 곡조는 대단히 이질적이다. 종장의 마지막 마디가 생략되는 것은 그 이질성을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시조는 북전(北殿)이라는 창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전창의 형식이 시조의 노랫말을 다 용해시키지 못한 데서 마지막 마디가 생략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가곡은 시조에 비해 훨씬 높은 격조를 가진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시조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조선조 후기의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은 사실은 가곡집으로서, 작품의 종장 마지막 마디가 완전히 표기되어 있다. 반면에 남훈태평가와 이세보의 풍아에는 이것이 생략된 것이 일반적이다. 가곡원류 발문에서 박효관은 창이 타락함을 개탄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으로 가곡집을 엮는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타락한 창은 바로 시조창을 일컫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오늘날에 시조창으로 불리어지는 노랫말이 고시조 작품이라는 데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개화기의 시조가 시조창의 관습에 따라 종장 마지막 마디를 생략한 채로 표기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창으로는 불리어지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시조창의 경우 약 1분 정도의 시간에 한 장을 부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러한 창법으로는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긴 개화기 시조 작품을 소화하기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개화기 시조에서 종장의 마지막 마디가 생략된 것은 가창을 전제로 창작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표기법 자체의 관습을 존중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표기 방식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분행을 하고 구두점을 표기한 점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시조를 세 줄로 나누어 적고, 처음 두 줄에는 반 줄이 끝날 때, 마지막 줄에서는 첫 토막 및 반 줄이 끝날 때 쉼표를 찍었으며, 한 줄이 끝날 때에는 마침표를 찍었다.
간밤에 비오더니, 봄 소식이 완연하다.
무령 화류들도, 러 퓌엿.
엇지타, 이천만의 뎌 인중은, 잠줄을.(화류절, 1909. 4. 4)
세상사들아, 소로로 가지마라.
당당 너른 길이, 녜로부터 잇것마는.
어지타, 시속인심은, 소로로만.(대로행, 1909. 7. 1)
이는 율격의 짜임새를 명학하게 인식한 증거라 하겠다. 이러한 배려는 신문 독자가 글을 읽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지, 노랫말을 일정한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데 필요한 것은 아니다. 텍스트 속에 있는 문자에는 음성적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구술하는 말에는 반드시 이러저러한 억양이나 목소리의 어조가 있다. 아무런 억양도 없이 목소리로 말할 수는 없다. 문자화된 텍스트에서 구두법은 목소리의 어조를 지시하기 위한 표시이다.
이밖에도 4행이라는 파격을 보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의 형태시와 유사한 행배열을 보이는 작품도 있어, 개화기의 시조가 독서물로 전환해 갔다는 점을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한편 개화기 시조는 형태상의 변모와 함께 현실을 인식하는 태도에서도 전대 시조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시조의 본류는 역시 사대부의 그것에 있다. 사대부의 시조는 가사 및 한시와 더불어 그들만의 세계를 확인하고 발견하는 글쓰기 행위였다. 그러나 가사는 일정한 곡조에 얹어서 부르기에는 지나친 장형이었고, 한시는 구어와 문어의 불일치로 인해 창작과 향유에서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반면에 시조는 짓고 부르기에 가장 적절한 시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소리의 묘운을 살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사대부 문학은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을 동시에 구유하고 있었다. 사대부(士大夫)라는 말 자체가 이미 사와 대부라는 두 가지 성격의 삶을 내포한 합성어이듯이, 그들의 문학 또한 이에서 평행하게 두 가지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성격이란 다름 아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영역이며, 시조는 이 두 가지 영역에 동시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사로서의 삶에 관심이 있을 때는 합일화의 시조로, 대부로서의 삶에 관심이 있을 때는 객관화의 시조로 귀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지향이 모순적이지 않고,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적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역군은이샷다와 같은 표현이다. 이러한 작품은 사대부들이 강호한정(江湖閑情)의 한쪽 세계에서도 다른 한쪽을 끊임없이 의식하고 지향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경우 대부분은 주자학적 체제에 대한 주자학적 세계관의 대응으로 순응적인 태도를 보인다. 고려 말엽이나 조선 후기에 나타나는 일군의 작품들이 우국충정의 주제 의식을 보여주는 경우에도 그 순응적인 태도는 마찬가지이다. 중세적 가치 체계 속에서 체제에 대한 비판이란 곧 방외인으로의 전락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매일신보의 시조에는 현실 비판과 저항 의식이 3백여 편에 이르는 거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소화단
흉중에 불이 나셔 오장이 다 간다
황혜암을 에 맛나 불 약을 무러보니
우국으로 난 불이니 부국면(1890. 1. 9)
한반도
한반도 금수강산 례의지방 분명다
신성 단군셔 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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