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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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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우리나라전통의복
1. 왕실의 복식 남자
1) 면복
2) 조복
3) 상복
4) 융복
5) 군복
2. 왕실의 복식 여자
1) 대삼
2) 치적의
3) 적의
4) 국의
5) 노의
6) 장삼
7) 원삼
8) 당의
9) 활옷

Ⅲ. 우리나라전통음식

Ⅳ. 우리나라전통주(전통술)
1. 조선시대의 술
1) 탁주
2) 홍주와 백주
3) 감주
4) 소주
5) 혼양주
6) 약용소주
7) 약용약주
2. 일제하의 술
3. 해방 후의 술

Ⅴ. 우리나라전통악기
1. 관악기
2. 현악기
3. 타악기

Ⅵ. 우리나라전통혼례
1. 전통혼례의 유래와 변천
2. 전통혼례의 절차
1) 의혼
2) 납채
3) 납폐
4) 친영
5) 폐백

참고문헌

본문내용

민족의 삶 속에서 소화되고 변용된 것도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대체로 전통 문화는 전근대 사회에서 발생한 문화적 유산으로, 외래문화는 근대 이후 들어온 서구 문화로 이해되고 있다. 앞으로 서구 문화를 어떻게 문화적으로 흡수하고 소화하느냐에 따라 서구 문화도 전통 문화 가운데 제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백여 년 동안의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돌이켜볼 때, 전통 문화는 서구 문화와 여러 방식으로 갈등을 일으켜 왔다. 첫 번째는 조선 후기 기독교의 유입으로 발생한 마찰이었으며, 두 번째는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하여 민족 전통을 말살하려 했기 때문에 생긴 저항이었고, 세 번째는 해방 뒤 미국 중심 문화의 유입과 근대화로 빚어진 전통 문화의 붕괴 위기였다. 지난 백여 년의 역사는 전통 문화의 올바른 계승과 서구 문화의 선별적 수용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문화의 계승과 수용에 대한 자각이 움튼 것은 1960년대 이후의 일이다. 해방 이후 미국 문화의 급속한 유입은 전통적 가치관과 갈등을 일으켰다. 더욱이 60년대부터 본격화된 산업화와 근대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유럽의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많은 불합리와 부작용을 낳으면서 다분히 인위적이고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급격한 산업화는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 위기를 몰고 왔다. 그 결과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통 문화의 계승과 서구 문화의 수용, 그리고 문화적 주체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Ⅱ. 우리나라전통의복
조선시대에 이르러 삼국시대 이래의 우리 복식을 이 시대에 꽃피워 아름다운 한복 양식을 완성하였다. 조선 왕조는 중국보다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신분과 계급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복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치밀하게 정해져 있었다. 고려 말 저고리가 짧아지면서 고름이 생겨 근세 한복의 모양새가 성립되어 조선 초기 양식이 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피폐해져 복식 생활이 곤궁해졌으므로 큰 변화가 왔으나 영조와 정조 이후 조선 중, 후기에는 사치풍조가 있어 한복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하였다. 권위적이고 여유있어 보이는 갓, 도포 차림의 남자 옷과 짧고 꼭 끼는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 거창한 머리 모양에서 알 수 있다. 한편 내외법이 강화되어 여자는 외출할 때 반드시 쓰개치마와 장옷을 썼다. 여자의 치마 여밈으로 양반과 상민을 엄격히 가려 왼쪽은 양반, 오른쪽은 기생의 차림새가 되었다.
1. 왕실의 복식 남자
1) 면복
왕이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나 초하루, 동지, 조회, 수책, 왕비를 맞을 때 입는 법복이다. 머리에 면류관을 쓰고 곤복을 입는다. 곤복은 곤의, 상(치마), 중단, 폐슬, 혁대, 패옥, 대대, 수, 적말(붉은 버선), 적석(붉은 신), 규로 이루어진다.
2) 조복
왕이 신하의 조현(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뵙는 일을 이르던 말.)을 받을 때 입던 옷이다. 머리에 원유관(고종 이후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는데 흰 버선과 검은 신을 신는 점이 면복과 다르다.
3) 상복
왕이 평소 집무 볼 때 입던 옷이다. 익선관포, 황룡포, 홍룡포, 자적룡포, 자적단령 등이 있다.
4) 융복
왕이 능에 갈 때나 거동을 할 때, 국난을 당했을 때 입는 옷이다. 머리에 흑립을 쓰고 철릭을 입으며 광사대를 매고 화를 신고 검을 찬다.
5) 군복
머리에 전립을 쓰고 동달이와 전복을 입은 다음 광대와 전대를 띠고 화를 신으며 지휘봉인 등채를 든다.
2. 왕실의 복식 여자
1) 대삼
조선 초기 명나라에서 사여받은 왕비의 대례복이다. 머리에는 칠적관을 썼다.
2) 치적의
조선 중기 왕비와 왕세자 빈의 법복이다.
3) 적의
국말 고종이 황제가 되고 왕비가 황후로 불렸다. 황후와 황태자빈의 법복이 되었다.
4) 국의
친잠례 때 왕비는 국의를 입었다. 친잠례란 왕비가 직조를 장려하는 의미로 누에를 치고 누에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말한다.
5) 노의
중궁, 빈궁의 법복인 적의 다음 가는 예복이다. 4품 이상 정처의 예복으로 착용되었다. 머리는 떠구지 머리나 큰머리를 한다.
6) 장삼
비빈을 위시하여 상궁 나인에 이르기까지 입었다. 조선 전반기에는 매우 중요한 예복이었다가 중, 후기에 이르러 원삼과 당의로 집약되면서 없어져 갔다. 왕비, 세자빈은 홍장삼을. 공주, 옹주, 상궁, 대군부인, 5품 이하의 정처는 녹장삼을 입었다. 상궁의 예복은 남장삼, 시녀의 대례복은 흑장삼이었다.
7) 원삼
왕비의 상복으로 조선 후기까지 녹원삼을 착용하였으나 광무 원년부터 계급이 승격되면서 황후는 황색, 왕비는 홍색, 비빈은 자색, 옹주는 초록색을 착용하였고, 민간에서는 족두리에 녹색 원삼을 혼례복으로 착용하였다.
8) 당의
소례복으로서 궁에서는 평상시에도 흔히 입고 사는 것이었기도 하다.
9) 활옷
공주나 옹주 또는 상류층의 혼례복이었으나 점차 널리 퍼져 혼례 시 서민에게도 허용하여 착용하였다.
Ⅲ. 우리나라전통음식
김치는 삼국시대부터 섭취해온 우리 민족 고유의 슬기를 발휘한 걸작음식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신문왕이 왕비를 맞을 때 잔치를 하기 위해 신부집에 보낸 폐백 음식으로 술, 쌀, 기름, 포(脯) 꿀, 장, 식해가 있었는데 이중 소금을 사용한 발효식품인 장, 젓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법주사 경내의 돌항아리는 신라 시대의 김치독임을 알려져 신라시대에도 김치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식해는 어패류, 수조육류, 채소 또는 이러한 식품을 섞어서 절인 것 등을 총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시대에 실시하던 채소절임은 오늘날의 김치의 원조이다. 절임법으로 ①소금에만 절인 것 ② 소금과 쌀밥 또는 쌀죽을 섞어서 절인 것 ③ 소금과 술지게미를 섞은 것에 절인 것 ④ 소금과 식초를 섞어서 절인 것 ⑤ 장에 절인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절임류를 해형 김치라고 한다. 이와 같은 채소 절임법을 백제사람이 술 빚기와 함게 일본에 전수하였다는 기록이 일본의 정창원문서(752년경)와 연희식(901-922년경)에 있다. 일본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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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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