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진 체계를 보여준다. 베버는 사회구조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던 시각을 상호 작용에 관한 조금 더 역동적인 분석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근대 사회의 사회 계층에 대해서 탐구하기 전에 베버가 근대 서유럽 사회의 기원과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베버는 사회계층은 각각 독특한 지배 체계 내에서 존재한다고 설명하면서 그 지배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계급과 계층의 구분은 기본적으로 맑스와 베버의 차이로 알려져 있다. 맑스는 두 가지 계급으로 분류했지만 그 한계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버는 맑스와 달리 필연적 역사 법칙보다는 인간 역사의 개연성을 중시했기에 사회 계층과 변동에 대해서도 한층 더 유연한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버의 사회학은 고전 사회학자 중에서 가장 폭넓은 영향력을 자랑한다. 그의 방법론은 현대 사회학의 기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가치에 대한 탐구와 이념형의 분류, 그리고 인과적 분석은 점차적으로 사회학의 관심이 사회구조에서 개인까지 확장하는 과정을 보이는 듯 하다.
●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를 읽고나서
베버는 이 책(원래는 두 편의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왜 당시 독일의 자본소유자 경영자 숙련노동자등 산업인력의 주축부분에서 프로테스탄트 인구비율이 현저히 높은가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베버는, 얼핏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는 해석, 즉 금욕적 성격이 강한 카톨릭은 세속적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식의 견해를, 당시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카톨릭보다 훨씬 더 비세속적이었다는 이유로, 일축하고, 그 근본이유를 순수한 종교적 관점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다른 어떤 시점에서도 노동이 Beruf(독일말의 ‘직업’은 ‘부름 받음’이란 뜻으로 글쎄 우리말로는 ‘소명’이라고나 할까)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이 ‘직업’에 대한 새로운 에토스가 생겨났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즉 노동이 신성하면 그 대가인 돈도 신성하다는 것. ‘자본주의 정신’이란 이 ‘직업’ 즉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축적되거나 낭비되지 않고 철저히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라야 바로 이 ‘자본주의 정신’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루터의 직업관 즉 ‘직업노동은 이웃사랑의 외적표현’이고, 따라서 ‘노동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그런 생각을 베버는 힘과 운명에 복종하라는 카톨릭 쪽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평가하고, ‘예정론’의 칼뱅주의를 네덜란드 프랑스 또 영국 자본주의의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정론’(나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고차원적’ 교리이지만)에 따르려면, 일단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직업노동’의 명령에 따르며,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거부함으로써 구원에의 확신을 얻게 되는데, 바로 이 soli Deo gloria(모든 것이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의 절실함이 칼뱅주의 힘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베버의 평가다.(수도사들은 금욕적인 방법의 삶았고, 금욕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그들은 더욱 더 일상생활에서 멀어져 갔지만, 칼뱅주의는 세속적 직업생활 안에서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금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세속 직업에 열심히 일하게 된다. 루터교에서는 '상실된 은총'을 참회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찾을 수 있으니 칼뱅주의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동인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즉 칼뱅주의의 예정설만이 매우 탁월한 심리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어지는 경건주의, 웨슬리, 청교도주의,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로 이어지는 베버의 이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읽기만 했을 뿐이다. -
책의 후반부는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내용이다.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기본사상과 경제적 일상생활 사이의 관련성을 청교도주의의 대표적 저술가 벡스터의 저서를 바탕으로 풀어나간다. 백스터가 죄악시한 것은 화폐와 재물에 대한 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재산을 갖고 휴식하는 것’과 ‘부를 향락하며 태만과 정욕에 빠져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단순히 금욕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도 신이 지정한 ‘삶의 목적’이다.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즉 벡스터에 따르면 ‘직업의무의 행사’로서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영주의 고상한 방종과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모두 금욕주의가 증오하는 것이지만,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윤리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이상과 같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기독교적 금욕정신에서 탄생한 것임을 증명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신에게 봉사하는 부의 추구에서 긍정적인 요인만을 보았던 것은 아니고, 가장 경건한 퀘이커 교도나 감리교인 사이에서조차 재산이 증대되면서 욕정과 자만 또 교만함에 빠지는 현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지만 그 정신은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라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글을 맺는데, 정신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떻게 보면 뭐든지 초심을 지키기는 힘든 것 같다. 언제나 처음시작과 그 끝의 모습이 같기는 힘들듯이. 좋은 동기로 시작된 모든 행위들과 역사의 사건은 언제나 변질되어오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럴땐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책을 읽고 쌩뚱맞게 이런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었을땐 참 이사람 똑똑하고 말을 잘하는것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논문집이라고 하는 이책을 보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이런쪽으로 생각했다는게 놀랍기도 했다.
참고자료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베버지음, 박성수 옮김. (주)문예출판사
● 막스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를 읽고나서
베버는 이 책(원래는 두 편의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왜 당시 독일의 자본소유자 경영자 숙련노동자등 산업인력의 주축부분에서 프로테스탄트 인구비율이 현저히 높은가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베버는, 얼핏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는 해석, 즉 금욕적 성격이 강한 카톨릭은 세속적 재물에 대한 관심이 적어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식의 견해를, 당시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은 카톨릭보다 훨씬 더 비세속적이었다는 이유로, 일축하고, 그 근본이유를 순수한 종교적 관점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다른 어떤 시점에서도 노동이 Beruf(독일말의 ‘직업’은 ‘부름 받음’이란 뜻으로 글쎄 우리말로는 ‘소명’이라고나 할까)로 이해되지 않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이 ‘직업’에 대한 새로운 에토스가 생겨났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즉 노동이 신성하면 그 대가인 돈도 신성하다는 것. ‘자본주의 정신’이란 이 ‘직업’ 즉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려는 정신적 태도’이다. 탐욕과 무한한 이윤추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축적되거나 낭비되지 않고 철저히 합리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돈이라야 바로 이 ‘자본주의 정신’에 해당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루터의 직업관 즉 ‘직업노동은 이웃사랑의 외적표현’이고, 따라서 ‘노동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그런 생각을 베버는 힘과 운명에 복종하라는 카톨릭 쪽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라 평가하고, ‘예정론’의 칼뱅주의를 네덜란드 프랑스 또 영국 자본주의의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정론’(나 개인적으로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고차원적’ 교리이지만)에 따르려면, 일단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고, ‘직업노동’의 명령에 따르며, 모든 의심을 악마의 유혹이라고 거부함으로써 구원에의 확신을 얻게 되는데, 바로 이 soli Deo gloria(모든 것이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하여)의 절실함이 칼뱅주의 힘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베버의 평가다.(수도사들은 금욕적인 방법의 삶았고, 금욕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그들은 더욱 더 일상생활에서 멀어져 갔지만, 칼뱅주의는 세속적 직업생활 안에서 금욕적 이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고, 그래서 금욕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 세속 직업에 열심히 일하게 된다. 루터교에서는 '상실된 은총'을 참회를 통해 언제든지 다시 찾을 수 있으니 칼뱅주의의 윤리적인 삶에 대한 동인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즉 칼뱅주의의 예정설만이 매우 탁월한 심리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어지는 경건주의, 웨슬리, 청교도주의, 감리교, 침례교, 퀘이커교로 이어지는 베버의 이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읽기만 했을 뿐이다. -
책의 후반부는 ‘금욕과 자본주의 정신’에 관한 내용이다. 베버는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기본사상과 경제적 일상생활 사이의 관련성을 청교도주의의 대표적 저술가 벡스터의 저서를 바탕으로 풀어나간다. 백스터가 죄악시한 것은 화폐와 재물에 대한 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재산을 갖고 휴식하는 것’과 ‘부를 향락하며 태만과 정욕에 빠져 거룩한 삶의 추구에서 이탈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노동’은 단순히 금욕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도 신이 지정한 ‘삶의 목적’이다.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서라면 부자가 되기 위해 노동해도 괜찮다.’ 즉 벡스터에 따르면 ‘직업의무의 행사’로서 ‘부의 추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뿐만 아니라 명령된 것이기까지 하다. “영주의 고상한 방종과 벼락부자의 과시적 허세는 모두 금욕주의가 증오하는 것이지만, 정직하게 자수성가한 부르주아는 윤리적으로 대단한 평가를 받을 만한 일이다.
이상과 같이,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이 기독교적 금욕정신에서 탄생한 것임을 증명하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신에게 봉사하는 부의 추구에서 긍정적인 요인만을 보았던 것은 아니고, 가장 경건한 퀘이커 교도나 감리교인 사이에서조차 재산이 증대되면서 욕정과 자만 또 교만함에 빠지는 현실이 있음을 지적하고, 종교의 형식은 그대로지만 그 정신은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정신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라는 '최후의 인간'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글을 맺는데, 정신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자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떻게 보면 뭐든지 초심을 지키기는 힘든 것 같다. 언제나 처음시작과 그 끝의 모습이 같기는 힘들듯이. 좋은 동기로 시작된 모든 행위들과 역사의 사건은 언제나 변질되어오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그럴땐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책을 읽고 쌩뚱맞게 이런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읽었을땐 참 이사람 똑똑하고 말을 잘하는것같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논문집이라고 하는 이책을 보니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 이런쪽으로 생각했다는게 놀랍기도 했다.
참고자료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막스베버지음, 박성수 옮김. (주)문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