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실학(실학사상)의 특성
Ⅲ. 실학(실학사상)의 발생배경
Ⅳ. 실학(실학사상)의 유파와 그 전개
1. 중농적 경세치용파
2. 중상적 이용후생파
3. 고증적 실사구시파
Ⅴ. 실학(실학사상)의 대표적 실학자
1. 유형원
2. 이익
1) 교육방법
2) 교과목
3. 정약용
4. 이이
Ⅵ. 실학(실학사상)의 주요내용
Ⅶ. 실학(실학사상)의 평가
참고문헌
Ⅱ. 실학(실학사상)의 특성
Ⅲ. 실학(실학사상)의 발생배경
Ⅳ. 실학(실학사상)의 유파와 그 전개
1. 중농적 경세치용파
2. 중상적 이용후생파
3. 고증적 실사구시파
Ⅴ. 실학(실학사상)의 대표적 실학자
1. 유형원
2. 이익
1) 교육방법
2) 교과목
3. 정약용
4. 이이
Ⅵ. 실학(실학사상)의 주요내용
Ⅶ. 실학(실학사상)의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나 중상적 실학자들이 상공장려와 대외교역론까지 강력 히 제시한 것은 민중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신장시키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정치사상에 있어서도 \'민\'을 중시한 것이었다. 다산은 그의 탕론에서 통치권력의 발생은 민이 원천이라고 하여 정치는 아래로부터 위로(下而上) 실시되는 것이 순서이며 천자도 민이 추대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은 民이 주체가 되어 정치권력을 행사해야 된다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지만 일종 의 민주주의적 요소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양반의 특권과 신분계급제에 대한 회의를 갖고 나아가 이의 폐지를 지향함으로써 평등·균산의 사회를 염원하고 있었다는 종래의 학설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종래의 학설에는 유수원이나 박지원·박제가 등은 양반 의 비리와 유식을 통박하였으며 따라서 양반사회의 토대인 노비제도를 궁극적으로는 철폐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지만 일시적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노비세습제의 폐지, 노비선상입역의 폐지, 노비신공의 감면 등 현실적이고 점진적인 철폐방안을 제시하였으며, 다산의 여전제 구상에 따르면 노비제도는 그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조선 전기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분제의 붕괴가 절정에 올랐다는 소위 조선 후기 신분제 붕괴론자들이 강조하고 있는 18~19세기인 조 선 후기에 있어서도 시대이념은 거의 유일한 유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들 신분제 붕괴론자들은 근대적 성 격의 하나인 평등사상이 조선 후기에도 맹아적 발아가 있었다고 보고 그러한 근대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조선의 신분제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공노비의 해방, 노비신공의 감면, 노비종모법의 시행 등으로 실학자의 개혁안이 부분적이 지만 채택되어 그 실시를 보게 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신분제 붕괴 내지는 신분 해방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학의 이상 사회로의 구현인 민본정치로의 복귀 속에서의 민의 평등을 이야기한 것이지, 다시 말해서 이른바 \'군군신신부부자자\'로 대표되는 유교이념의 실현을 염원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 민의 대리자인 임금마저도 노비를 양반으로 올려준다든지 평민을 양반으로 올려준다든지 하는 등의 행위는 절대로 할 수없었음을 밝혀 둔다.
근대지향적 성격 실학자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민본적 이상사회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여러 가지 제도적 개혁론과 상공장려, 기술수용론 등은 결과적으로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경세치용학파의 토지제도 개혁론에서 근대적 성향이 표출되었고 이용후생학파의 상공업 및 화폐경제의 발달촉구라든가 경영의 합리화, 외국무역의 주장 등에서 근대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사농공상의 분업과 전문성, 천업관·말업관을 부정하는 직업윤리관의 설정 등은 등질적 국민경제 의 성립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근대적인 요소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은 한말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학의 근대적 요소가 더욱 드러나 보이게 한 것이었다.
Ⅱ. 실학(실학사상)의 특성
실학은 조선 후기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실학은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형성되었음은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개혁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던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는 지식인 집단이 있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학이란 용어를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소산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가진 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편 실학은 유학사상에 기초하고 유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상으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중세 유학인 성리학과는 분명히 다른 학문체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이론이었고 관념철학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며 방법론에 있어서도 관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실학은 학문의 목적과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있어서 성리학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실학에서는 새롭게 등장하는 민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위한 학문체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실학은 이기론으로 대표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이나 사장학적 특성과 결부된 관료지향적 학문과도 달라 그 연구 분야가 백과전서적인 경향(傾向)을 띠고 있었다. 비록 실학이 사변적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실학자들은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존중하고 있었다.
또한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사상이었다. 실학자들이 주장한 제도개혁론은 그 일부가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어 민중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이 제안했던 개혁안 중 정치와 토지경제에 관한 이론의 상당 부분이 당시의 벌열정치 하에서는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현실 개혁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은 공리공담이 아닌 실현 가능성을 내포한 사회발전을 위한 이론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실학(실학사상)의 발생배경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에도 도덕적 명분만을 고집하는 성리학은, 뒤떨어진 기술문화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학문활동에 대하여 일부 선각적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Ⅳ. 실학(실학사상)의 유파와 그 전개
1. 중농적 경세치용파
반계수록을 저술하여 중농주의적 제도개혁론을 전개시킨 유형원의 학풍을 발전시켜 경세치용의 학파를 형성시킨 중심적 인물이 성호 이익(1681-1763)이었다. 남인 계열의 이익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생애를 바친 학자로서 대표적 저서가 <성호사설>이다. 특히 그는 <藿憂錄곽우록>에서 중농사상에 의거한 토지개혁, 즉 한전론을 주장하여 개인의 토지 점유를 제한하고, 관료와 토호들에 의한 토지 겸병의 금지를 역설하였다. 신분제도에 관해서도 양반과 농민 사이의 신분적 장벽을 타파할 것과 노비신분을 점차 해방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정조·순조 때의 다산 정약
근대지향적 성격 실학자들은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민본적 이상사회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여러 가지 제도적 개혁론과 상공장려, 기술수용론 등은 결과적으로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경세치용학파의 토지제도 개혁론에서 근대적 성향이 표출되었고 이용후생학파의 상공업 및 화폐경제의 발달촉구라든가 경영의 합리화, 외국무역의 주장 등에서 근대지향성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또한 사농공상의 분업과 전문성, 천업관·말업관을 부정하는 직업윤리관의 설정 등은 등질적 국민경제 의 성립을 지향한다는 면에서 근대적인 요소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은 한말 개화파 사상가들에게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실학의 근대적 요소가 더욱 드러나 보이게 한 것이었다.
Ⅱ. 실학(실학사상)의 특성
실학은 조선 후기의 독특한 사상체계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실학은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 사회에서 형성되었음은 물론 조선 후기 사회의 개혁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삼고 있었던 학문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시대에서나 자신이 살고 있던 사회의 개혁을 시도하는 지식인 집단이 있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다. 실학이란 용어를 중세사회 해체기로서의 조선 후기의 역사적 소산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그 가진 바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편 실학은 유학사상에 기초하고 유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상으로 파악될 수는 있을지언정, 중세 유학인 성리학과는 분명히 다른 학문체계로 파악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양반 사대부 중심의 이론이었고 관념철학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며 방법론에 있어서도 관념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실학은 학문의 목적과 연구 분야 및 방법론에 있어서 성리학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내 주고 있다. 즉 실학에서는 새롭게 등장하는 민중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위한 학문체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그런가 하면 실학은 이기론으로 대표되는 관념철학으로서의 성리학이나 사장학적 특성과 결부된 관료지향적 학문과도 달라 그 연구 분야가 백과전서적인 경향(傾向)을 띠고 있었다. 비록 실학이 사변적 요소를 전혀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실학자들은 경험적이며 실험적인 방법을 존중하고 있었다.
또한 실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발전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사상이었다. 실학자들이 주장한 제도개혁론은 그 일부가 국가의 정책에 반영되어 민중생활의 향상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실학자들이 제안했던 개혁안 중 정치와 토지경제에 관한 이론의 상당 부분이 당시의 벌열정치 하에서는 수용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현실 개혁에 대한 기여는 제한적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실학은 공리공담이 아닌 실현 가능성을 내포한 사회발전을 위한 이론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Ⅲ. 실학(실학사상)의 발생배경
왜란과 호란을 겪은 후에도 도덕적 명분만을 고집하는 성리학은, 뒤떨어진 기술문화와 사회적인 폐단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학문활동에 대하여 일부 선각적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반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Ⅳ. 실학(실학사상)의 유파와 그 전개
1. 중농적 경세치용파
반계수록을 저술하여 중농주의적 제도개혁론을 전개시킨 유형원의 학풍을 발전시켜 경세치용의 학파를 형성시킨 중심적 인물이 성호 이익(1681-1763)이었다. 남인 계열의 이익은 일생 동안 벼슬을 하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에 생애를 바친 학자로서 대표적 저서가 <성호사설>이다. 특히 그는 <藿憂錄곽우록>에서 중농사상에 의거한 토지개혁, 즉 한전론을 주장하여 개인의 토지 점유를 제한하고, 관료와 토호들에 의한 토지 겸병의 금지를 역설하였다. 신분제도에 관해서도 양반과 농민 사이의 신분적 장벽을 타파할 것과 노비신분을 점차 해방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정조·순조 때의 다산 정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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