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Ⅰ. 머리말
Ⅱ. 본 론
1. 김영삼 정권의 탄생 배경
2. 역사바로세우기
3. 부정부패척결
4. 정치개혁
1)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
2) 선거제도의 합리적 개선
3) 선거공영제와 법정선거비용
4) 지방자치의 전면실시
5. 군개혁
1) 하나회의 숙청
2) 인사관리제도 개선
3) 율곡사업 및 군수조달제도 개선
6. 세계화시대의 외교
1)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2) 정상외교확대
3) 경제외교
7.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
8. 경제개혁
1) 신경제
2) 금융실명제
3) 부동산실명제
4) 금융자율화
9. 문민정부의 날개없는 추락
1) 한보사건
2) IMF
Ⅲ. 맺은말
Ⅰ. 머리말
Ⅱ. 본 론
1. 김영삼 정권의 탄생 배경
2. 역사바로세우기
3. 부정부패척결
4. 정치개혁
1) 정치자금의 투명성 확보
2) 선거제도의 합리적 개선
3) 선거공영제와 법정선거비용
4) 지방자치의 전면실시
5. 군개혁
1) 하나회의 숙청
2) 인사관리제도 개선
3) 율곡사업 및 군수조달제도 개선
6. 세계화시대의 외교
1)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
2) 정상외교확대
3) 경제외교
7. 남북통일을 위한 노력
8. 경제개혁
1) 신경제
2) 금융실명제
3) 부동산실명제
4) 금융자율화
9. 문민정부의 날개없는 추락
1) 한보사건
2) IMF
Ⅲ. 맺은말
본문내용
적인 정치 타격을 입혔으며, 김영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위와 같이 김현철은 국가의 주요업무에 관여하면서 퇴임 후 부친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김현철은 이권청탁 댓가 및 활동비로 66억1천만원 수수, 조세 포탈혐의로 징역 3년 벌금 14억4천만원 추징금 5억2천4백만원의 선고를 받았지만 99년 4월 9일 파가 환송되었다. 김현철이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을 마치 전리품 처럼 생각하고 국민을 업신여기는 정치 풍토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 IMF
정경유착 한국경제의 뿌리깊은 고질병이 마침내 곪아 터졌다. 97년 1월 한보그룹은 빛을 10조원이나 지고 무너졌고, 한보의 침몰은 제일은행 등 금융기관을 파산직전까지 몰고 갔다. 곧 이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부도로 치달았고, 이어 한국경제를 일거에 휘청거리게 만드는 대형사건이 터지는데 재벌순위 8위인 기아가 부도위기에 몰리고, 제일은행은 기아의 부도유예협약 1997년 4월 21일 부실기업의 연쇄적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만든 금융기관 협약으로 원래 이름은 부실징후기업의 정상화 촉진과 부실채권의 효율적 정리를 위한 금융기관 협약이다.
에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에 돈을 준 금융기관들은 한국을 투자 위험국으로 지목했다. 이때부터 외환 위기설이 정계에 나 돌았는데 당시 고건 총리는 외환위기설을 전면 부인했다.
10월 중순부터는 외국계 신용은행들은 잇달아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고, 외국 금융기관들은 우리나라 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다. 한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팔아치움으로 해서 주가는 400선으로 추락했다. 11월에는 해태, 뉴코아가 화의를 신청함으로써 대기업 연쇄부도설이 현실로 나타났다. 11월 3일 한국은행은 10월말 현재 외환보유고가 305억달러라고 발표했다. 이는 끊임없이 나도는 외환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함이였다. 이 무렵 종금사들은 외화 차입금을 갚기 위해 한국은행으로부터 수억달러씩 자금을 빌리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11월 13일 종금사들은 한은이 외환 부도를 막든지 부도를 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항복선언을 해버렸다. 이에 급박해진 한은은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34억달러를 방출했다. 또 이 사이에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갚기 위해 100억달러를 빼냈다. 11월 말 가용외환보유고는 72억 6천만달러뿐이였다. 11월 6일 경제 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한은총재는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밀도 높게 의논했다. 우선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IMF에 문을 두드리라고 종용했다. 13일 경제 부총리는 IMF 캉드쉬 총재의 방한을 요청하여 만나게 되고 김영삼 대통령도 이쯤 외환위기의 급박성을 인정했다. 주가는 500선 아래로 떨어졌고 환율은 연일 제한폭까지 상승하여 거래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는 11월 19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상하 2.25%인 환율의 하루 변동폭을 10%로 확대했으나 적용 첫날 역시 거래중단사태가 빚어졌다. 19일 새로 취임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21일 IMF에 구제 금융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미, 일 등 선진국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지만 IMF행 선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내부적으로 위기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론 위기를 감추자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 같은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의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국정의 통솔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불러온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IMF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게 돌아갔다.
Ⅲ. 맺은말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 정치인이다. 과거 권위주의 행정체제의 유산이 잔존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욕구를 수용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체제 전반의 대세를 개혁적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인사의 결정권도 자신이 갖고 있고 정책의 최종결정권도 자신에게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민정부라고 불리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민주화 개혁을 시도하지만, 임기 말 아시아 국가 전반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원조를 요청하는 치욕적인 실정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후임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정권교체를 초래하면서 퇴임하였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인 면에서는 그 출발선으로부터 다소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중들의 기대와 달리 권위주의와 다를 바 없는 자의적인 권력행사와 경제 개혁의 실패는 점점 국민의 지지도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부 또한 국민의 지지도에 따라 개혁 의지를 상실하면서 실질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엄밀한 평가는 좀 더 시일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참 고 문 헌>
현대정당정치의 이해, 심지연편저, 백산서당, 2004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최장집, 나남출판, 1996
김영삼제국과 IMF 신탁통치, 김종찬, 하나로, 1998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 까지 1.2 동아일보사, 1999
문민정부의 개혁, 김찬수, 한줄기, 1995
문민정부 1천 2백일, 주돈식, 사람과 책, 1997
YS의 44가지 잘못, 정기남, 비전21, 1996
김성호취재비록: 문민정부의 소통령 김현철 파일 김성호, 민미디어, 2000
한국경제 1998.2.25일자
중앙일보 1993.3.5일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http://www.nec.go.kr/
네이버백과사전 http://www.naver.com/
위와 같이 김현철은 국가의 주요업무에 관여하면서 퇴임 후 부친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였다. 김현철은 이권청탁 댓가 및 활동비로 66억1천만원 수수, 조세 포탈혐의로 징역 3년 벌금 14억4천만원 추징금 5억2천4백만원의 선고를 받았지만 99년 4월 9일 파가 환송되었다. 김현철이 이러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을 마치 전리품 처럼 생각하고 국민을 업신여기는 정치 풍토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 IMF
정경유착 한국경제의 뿌리깊은 고질병이 마침내 곪아 터졌다. 97년 1월 한보그룹은 빛을 10조원이나 지고 무너졌고, 한보의 침몰은 제일은행 등 금융기관을 파산직전까지 몰고 갔다. 곧 이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굴지의 기업이 부도로 치달았고, 이어 한국경제를 일거에 휘청거리게 만드는 대형사건이 터지는데 재벌순위 8위인 기아가 부도위기에 몰리고, 제일은행은 기아의 부도유예협약 1997년 4월 21일 부실기업의 연쇄적 부도사태를 막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여 만든 금융기관 협약으로 원래 이름은 부실징후기업의 정상화 촉진과 부실채권의 효율적 정리를 위한 금융기관 협약이다.
에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에 돈을 준 금융기관들은 한국을 투자 위험국으로 지목했다. 이때부터 외환 위기설이 정계에 나 돌았는데 당시 고건 총리는 외환위기설을 전면 부인했다.
10월 중순부터는 외국계 신용은행들은 잇달아 한국의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했고, 외국 금융기관들은 우리나라 은행과 종금사에 대한 자금 공급을 완전히 중단했다. 한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팔아치움으로 해서 주가는 400선으로 추락했다. 11월에는 해태, 뉴코아가 화의를 신청함으로써 대기업 연쇄부도설이 현실로 나타났다. 11월 3일 한국은행은 10월말 현재 외환보유고가 305억달러라고 발표했다. 이는 끊임없이 나도는 외환위기설을 잠재우기 위함이였다. 이 무렵 종금사들은 외화 차입금을 갚기 위해 한국은행으로부터 수억달러씩 자금을 빌리는 급박한 상황에 내몰렸다. 11월 13일 종금사들은 한은이 외환 부도를 막든지 부도를 내든지 알아서 하라는 항복선언을 해버렸다. 이에 급박해진 한은은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34억달러를 방출했다. 또 이 사이에 만기가 돌아온 외채를 갚기 위해 100억달러를 빼냈다. 11월 말 가용외환보유고는 72억 6천만달러뿐이였다. 11월 6일 경제 부총리와 청와대 경제수석, 한은총재는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밀도 높게 의논했다. 우선은 외국으로부터 돈을 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IMF에 문을 두드리라고 종용했다. 13일 경제 부총리는 IMF 캉드쉬 총재의 방한을 요청하여 만나게 되고 김영삼 대통령도 이쯤 외환위기의 급박성을 인정했다. 주가는 500선 아래로 떨어졌고 환율은 연일 제한폭까지 상승하여 거래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는 11월 19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상하 2.25%인 환율의 하루 변동폭을 10%로 확대했으나 적용 첫날 역시 거래중단사태가 빚어졌다. 19일 새로 취임한 임창렬 경제부총리는 21일 IMF에 구제 금융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때부터 미, 일 등 선진국이 한국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고 나섰지만 IMF행 선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내부적으로 위기대책을 진행하되 대외적으론 위기를 감추자는" 구시대적 발상으로 외환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이 같은 전략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경제 정책을 직접적으로 담당한 재정경제원이나 한국은행 등의 경제 관료들의 잘못이 크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국정의 통솔자로서 그 책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을 불러온 ‘역사에 남는 대통령’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IMF체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그에 대한 원망과 비난은 고스란히 문민정부에게 돌아갔다.
Ⅲ. 맺은말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친 정치인이다. 과거 권위주의 행정체제의 유산이 잔존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욕구를 수용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고 체제 전반의 대세를 개혁적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그러나 인사의 결정권도 자신이 갖고 있고 정책의 최종결정권도 자신에게 있는데 이러한 것들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은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민정부라고 불리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민주화 개혁을 시도하지만, 임기 말 아시아 국가 전반에 들이닥친 경제위기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의 원조를 요청하는 치욕적인 실정으로 국민의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후임 대통령 선거에서 여야 정권교체를 초래하면서 퇴임하였다.
결론적으로 김영삼 정부는 형식적, 절차적인 면에서는 그 출발선으로부터 다소 진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대중들의 기대와 달리 권위주의와 다를 바 없는 자의적인 권력행사와 경제 개혁의 실패는 점점 국민의 지지도의 하락을 가져왔고 정부 또한 국민의 지지도에 따라 개혁 의지를 상실하면서 실질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이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엄밀한 평가는 좀 더 시일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참 고 문 헌>
현대정당정치의 이해, 심지연편저, 백산서당, 2004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최장집, 나남출판, 1996
김영삼제국과 IMF 신탁통치, 김종찬, 하나로, 1998
잃어버린 5년 칼국수에서 IMF 까지 1.2 동아일보사, 1999
문민정부의 개혁, 김찬수, 한줄기, 1995
문민정부 1천 2백일, 주돈식, 사람과 책, 1997
YS의 44가지 잘못, 정기남, 비전21, 1996
김성호취재비록: 문민정부의 소통령 김현철 파일 김성호, 민미디어, 2000
한국경제 1998.2.25일자
중앙일보 1993.3.5일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http://www.nec.go.kr/
네이버백과사전 http://ww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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