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작가 소개
2. 손님 간단 소개 - 등장 인물, 작품 배경,
3. 소설 분석
- 1) 「손님」의 시점이 주는 의미
2) 지노귀굿의 의미와 형상화
4.. 기억과 망각의 복원 작용
- 1) 작품 내의 기억과 망각작용
2) 작품 외적인 기억과 망각 작용 - 황석영 작가의 기억, 우리 민족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
5. 결론
2. 손님 간단 소개 - 등장 인물, 작품 배경,
3. 소설 분석
- 1) 「손님」의 시점이 주는 의미
2) 지노귀굿의 의미와 형상화
4.. 기억과 망각의 복원 작용
- 1) 작품 내의 기억과 망각작용
2) 작품 외적인 기억과 망각 작용 - 황석영 작가의 기억, 우리 민족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
5. 결론
본문내용
암울하고 북한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낙후된 인상을 받았어요. 신천에는 \'미제 양민학살 기념관\'이 있고 군(郡) 전역에 걸쳐서 학살장소를 보존하고 있어서 더욱 어두웠습니다. 안내원이 격앙된 어조로 전쟁시기의 미군의 만행에 대하여 치를 떨며 설명하고 그 물적 증거물들을 보여주는 식이었지요. 남한에서의 좌우대립에 의한 농촌공동체의 파괴에 대하여 어릴 적부터 지겹도록 듣고 보아온 나로서는 분노보다는 죽은이들의 신발이라든가 옷가지, 또는 머리카락 따위 물건들의 생생한 보존과 인형으로 만들어놓은 참상의 실감나는 재현 등에 소름이 끼쳤어요. 더구나 끔찍한 것은 전 군민의 4분지 1에 해당하는 3만 5천여명을 학살했다는 것이지요. 몇번의 방문 중에 알게 되었지만 황해도에는 본토박이들이 많이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함경도나 평안도에서 이주시킨 사람들이 많았어요. 북한에서 월남자가 가장 많이 나온 지역이라는 겁니다. 미군은 남한에서도 그랬고 북한지역의 곳곳에서 양민학살을 저질렀지만 이 지역에서만은 머무를 시간이 없이 곧바로 만주의 국경지대를 향하여 북진했고, 중국군이 참전하자 일제히 후퇴했다고 전사(戰史)에 나와 있어서 이건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 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중략)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 작품은 방북 경험이 있는 황석영 작가 개인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된 창작행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민족 모두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작용을 일으킨다.
<우리 민족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특정한 공동작용으로 구성된다. 북한이 사회주의 이념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집단 정체성의 구축)로 신천 학살 사건을 미국에 의한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이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것을 망각하는 것처럼, ‘역사’는 집단적 기억의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망각의 역사를 배제시키면서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소재일 뿐만 아니라 기억에서 생략되어야 할 것, 다시 말해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들을 걸러내는 일종의 필터 기능도 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에서 기억을 위해 망각을 ‘망각’하는 것은 ―현재의 관점에 매여 있는 한―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불가피한 과거의 기억 망각 방식 자체가, 위의 예에서 보듯이 강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문규 외,『기억과 망각』,p.168
「손님」은 이러한 ‘역사’에 의해 망각된 ‘역사’를 복원하는 작용을 하며 그 과정을 그려낸다. 신천 학살 사건에 대해 무관심했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기억 복원의 작용을 한다. 그 기억과 망각의 복원작용은 여러 화자의 눈을 빌린 다양한 시점으로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 민족끼리 벌어진 광기의 학살 현장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이러한 객관성의 확보와 기억과 망각의 복원이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내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이해와 화해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Ⅴ. 결론
이 작품의 제목이 <손님>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굿을 통해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모속의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황석영,『손님』中 작가의 말, p.262
황석영 역시 서쪽에서 온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손님으로 나타내고 그 굿을 통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통해 발생한 사건의 민족적 아픔을 치유하고 해소시키기 위해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보인다.
두 번째로, 서로에게 ‘손님’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민족사적 비애를 뜻한다. 류요한은 고향의 땅을 피로 물들이고 그의 가족인 류요섭 역시 자신의 형의 살육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요한이 죽고 난 뒤 요섭은 단지 고향 방문단, ‘손님’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 할 뿐이다. 사람에게 고향이란 정신적인 어머니의 품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서로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이웃사촌이었던 서로를 살육했던 류요한과 그의 주변은 모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이며 정신적으로 떠돌이일 뿐이다. 이것은 분단국가인 우리의 민족사적 비애이다.
작가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냄으로써, 이제야 겨우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한반도에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가 열려나가기를 희망한다. <손님>은 황석영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방북취재, 대작가의 선 굵은 서사구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손님>은 형식적인 면에서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얼개을 차용하여 작가가 새로이 구성한, 리얼리즘의 틀을 깨고 나온 리얼리즘이라 할 만하다.
< 참고문헌 >
최규진, 「황석영의 『손님』 연구」, 2008
강미자, 「황석영의 『손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연구」, 2006
이기자, 「한국 분단 소설의 한 연구 : 윤흥길의 『장마』와 황석영의 『손님』의
비교를 중심으로」, 2004
그래서 베를린에 돌아가자마자 여러 가지 자료를 뒤지기도 하고 황해도 지역에서 월남한 해외동포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나는 베를린에서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사가 격변하는 현장에 있으면서 더욱 확신하게 된 생각이 있었지요. \'나는 내 방식으로 세계를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현실주의적 생각을 동아시아적 형식에 담는다\'는 생각입니다. (중략)
망명지를 뉴욕으로 옮긴 뒤에 통일운동 활동으로 알게 된 신천 출신 어느 목사에게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자료를 통해 가졌던 의구심이 옳은 것으로 드러난 겁니다. 진실은 그 끔찍한 학살이 \'우리들끼리\'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내면적인 죄의식과 두려움이 지금도 그치지 않는 광적인 증오의 뿌리가 되었던 셈입니다. 북이 이 사건을 \'미제\'라는 원인제공자에게 돌린 것은 자신들 체제의 봉합과 해소를 위해서였을 겁니다.
이 작품은 방북 경험이 있는 황석영 작가 개인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된 창작행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민족 모두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작용을 일으킨다.
<우리 민족의 기억과 망각의 복원>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특정한 공동작용으로 구성된다. 북한이 사회주의 이념을 굳건히 하려는 의도(집단 정체성의 구축)로 신천 학살 사건을 미국에 의한 사건으로 정의하면서 그것이 민족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것을 망각하는 것처럼, ‘역사’는 집단적 기억의 이면에 있는 또 다른 망각의 역사를 배제시키면서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과거는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소재일 뿐만 아니라 기억에서 생략되어야 할 것, 다시 말해 기억에 장애를 일으키는 것들을 걸러내는 일종의 필터 기능도 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통한 정체성의 형성에서 기억을 위해 망각을 ‘망각’하는 것은 ―현재의 관점에 매여 있는 한― 불가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불가피한 과거의 기억 망각 방식 자체가, 위의 예에서 보듯이 강한 이데올로기적 특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문규 외,『기억과 망각』,p.168
「손님」은 이러한 ‘역사’에 의해 망각된 ‘역사’를 복원하는 작용을 하며 그 과정을 그려낸다. 신천 학살 사건에 대해 무관심했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기억 복원의 작용을 한다. 그 기억과 망각의 복원작용은 여러 화자의 눈을 빌린 다양한 시점으로 객관성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우리 민족끼리 벌어진 광기의 학살 현장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이러한 객관성의 확보와 기억과 망각의 복원이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내려내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이해와 화해로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Ⅴ. 결론
이 작품의 제목이 <손님>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굿을 통해서 그 뜻을 엿볼 수 있다.
천연두를 서병(西病)으로 파악하고 이를 막아내고자 했던 중세의 조선 민중들이 ‘마마’또는 ‘손님’이라 부르면서 ‘손님굿’이라는 모속의 형식을 만들어낸 것에 착안해서 나는 이들 기독교와 맑스주의를 ‘손님’으로 규정했다. 황석영,『손님』中 작가의 말, p.262
황석영 역시 서쪽에서 온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손님으로 나타내고 그 굿을 통해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통해 발생한 사건의 민족적 아픔을 치유하고 해소시키기 위해 이 소설을 집필했다고 보인다.
두 번째로, 서로에게 ‘손님’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민족사적 비애를 뜻한다. 류요한은 고향의 땅을 피로 물들이고 그의 가족인 류요섭 역시 자신의 형의 살육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다. 요한이 죽고 난 뒤 요섭은 단지 고향 방문단, ‘손님’의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 할 뿐이다. 사람에게 고향이란 정신적인 어머니의 품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서로의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이웃사촌이었던 서로를 살육했던 류요한과 그의 주변은 모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이며 정신적으로 떠돌이일 뿐이다. 이것은 분단국가인 우리의 민족사적 비애이다.
작가는 1950년 황해도 신천 대학살사건을 배경으로 이땅에 들어와 엄청난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고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이 두가지 이데올로기와 그 소용돌이에 휩쓸렸던 인간군상들의 원한과 해원을 그려냄으로써, 이제야 겨우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한반도에 화해와 상생의 새 세기가 열려나가기를 희망한다. <손님>은 황석영만이 경험할 수 있었던 방북취재, 대작가의 선 굵은 서사구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실험정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손님>은 형식적인 면에서 황해도 진지노귀굿의 얼개을 차용하여 작가가 새로이 구성한, 리얼리즘의 틀을 깨고 나온 리얼리즘이라 할 만하다.
< 참고문헌 >
최규진, 「황석영의 『손님』 연구」, 2008
강미자, 「황석영의 『손님』에 대한 탈식민주의적 연구」, 2006
이기자, 「한국 분단 소설의 한 연구 : 윤흥길의 『장마』와 황석영의 『손님』의
비교를 중심으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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