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운동의 정의
1. 운동의 개념
2. 운동의 일반적 성격
Ⅲ. 학생운동의 약사
1. 제1기(79년 10.26 - 83년 12월 유화조치)
2. 제2기(84년 - 85년)
3. 제3기(86년 - 87년)
4. 제4기(88년 - 91년 5월 투쟁)
5. 제5기(91년 하반기 - 92년 대선)
Ⅳ. 70년대의 학생운동
Ⅴ. 80년대의 학생운동
1. 80년 - 83년, 폭압기
1) 80년의 희망과 절망
2) 81년의 국풍81과 대학가
3) 82년, 불타는 부산미문화원
4) 83년, 저 침묵의 바다에 거센 파도가
2. 84년 - 86년 대중운동으로의 발전
1) 84년, 부활된 총학생회
2) 85년, 전학련과 삼민투
3) 86년, 민민투와 자민투 그리고 건대항쟁
3. 87년 6월의 함성
4. 88년 제2기 전대협 - 통일의 깃발을 올리며
5. 89년 제3기 전대협 - 임종석과 임수경
Ⅵ. 90년대의 학생운동
Ⅶ. 결론
참고문헌
Ⅱ. 운동의 정의
1. 운동의 개념
2. 운동의 일반적 성격
Ⅲ. 학생운동의 약사
1. 제1기(79년 10.26 - 83년 12월 유화조치)
2. 제2기(84년 - 85년)
3. 제3기(86년 - 87년)
4. 제4기(88년 - 91년 5월 투쟁)
5. 제5기(91년 하반기 - 92년 대선)
Ⅳ. 70년대의 학생운동
Ⅴ. 80년대의 학생운동
1. 80년 - 83년, 폭압기
1) 80년의 희망과 절망
2) 81년의 국풍81과 대학가
3) 82년, 불타는 부산미문화원
4) 83년, 저 침묵의 바다에 거센 파도가
2. 84년 - 86년 대중운동으로의 발전
1) 84년, 부활된 총학생회
2) 85년, 전학련과 삼민투
3) 86년, 민민투와 자민투 그리고 건대항쟁
3. 87년 6월의 함성
4. 88년 제2기 전대협 - 통일의 깃발을 올리며
5. 89년 제3기 전대협 - 임종석과 임수경
Ⅵ. 90년대의 학생운동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기군의 선거공약에서 남북학생회담이 처음 제시되었다. 이후 제2기 전대협은 6.10 남북학생회담을 북측에 제안하고 전대협 산하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조통위)’를 구성하고 6.10 남북학생회담 준비에 들어간다. 특히 5월 들어서 “조국통일”을 외치며 투신한 조성만 열사의 사건을 계기로 조국통일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어 간다. 6월 10일 연세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2만여 학생이 모여 6.10민주화 투쟁 1주기 기념대회 및 판문점 출정식을 가졌다.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세워 뛰어 내리고, 뒷산을 타고 넘어오는 등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때부터 전대협이 주도하는 집회는 원천봉쇄가 되더라도 기기묘묘한 진입방법을 동원해서 반드시 사수한다는 기풍이 생겼다. 6월 10일 당일 홍제동, 서울역, 임진각 등에서 판문점으로 가려는 학생들과 경찰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결국 6.10회담은 성사되지 못하고 전대협은 8월 15일 제2차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한다. 8월 8일 고려대에서 발족식을 가진 1기 통일선봉대는 전국을 돌며 국토순례를 하여 8월 15일 다시 전국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대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통일운동은 이후 전대협과 학생운동의 가장 중요한 방향을 이루고 있다.
5. 89년 제3기 전대협 - 임종석과 임수경
89년의 제3기 전대협은 임종석(한양대 총학생회장)의장과 임수경(외국어대 용인 배움터)대표로 집약될 수 있다. 전대협 6년사에 있어서 가장 모범으로 평가받고 많은 충격을 주었던 3기 전대협은 환상의 진입과 영광의 탈출이라는 일화로 유명하다. 6월 29일 평양축전참가 출정식이 벌어지는 한양대에 경찰의 원천봉쇄를 비웃으며 학생들은 뚝섬 역에서 지하철을 세우고 철길을 달려 한양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29일 밤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다음날 경찰은 학내로 임종석의장을 잡으러 진입한다. 그러나 전대협 지도부는 한 명도 잡히지 않고 남대협(현재의 남총련)의 전투조인 오월대의 호위아래 한양대를 무사히 빠져나와 다음날 외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기동력을 보인다. 이후 임종석의장은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고 경찰의 경계망을 조롱하며 전국을 다녔다.
Ⅵ. 90년대의 학생운동
첫째, 90년대 학생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총련’으로 상징되는 전국단위 학생운동 조직을 주도하는 학생들의 사상적인 경직성과 이론적 자기쇄신 능력의 결여이다. 80년대 중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주역이었던 함운경씨는 “한총련은 정체불명의 사상에 붙들려 현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이는 운동방식의 문제보다 근본적인 사상과 이념이 잘못됐음을 드러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현재 한총련 지도부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무능한 집단”이라고 보면서 96년의 연세대 사건이 학생운동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었는데도 ‘항쟁정신 계승‘ 운운하는 등 현실을 보는 눈이 전혀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학생들은 다른 사회집단과는 달리 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는 전업학습자이나 청년특유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안고 사는 이념 집단이므로 학생운동에게 있어서 이념은 운동의 방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90년대 학생운동이 갖는 여러 가지 모습은 일차적으로는 운동의 지도그룹이 견지하는 이념이나 노선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학생운동권은 다른 사회운동권과 마찬가지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한 민족해방(NL) 계열 학생운동은 한반도에는 여전히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으며, 북한이 건재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완고하게 반미투쟁을 강조하는 그룹은 “사회주의는 붕괴하였다고 하더라도 주체사상은 제3세계에서 민족중심적 사상으로서 탄탄한 사회주의를 유지해가는 사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권력의 정당성이 높아질수록 “사상전에서 지배세력에게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투쟁일변도의 사고나 개량주의나 타협주의애 대한 극도의 공포심은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섬으로 남아서 체제유지를 사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90년대 북한의 공식논리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완고한 반미, 반제국주의, 민족중심주의 사고는 90년대의 변화된 정치사회 정세 속에서 일반 학생들의 동의를 점점 더 얻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이들의 고립은 이들의 사상적인 비타협성과 완고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이념을 교정할 수 있는 동력이 내부에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의 독단성과도 무관한 것은 아닌데, 90년대라는 개방되고 민주화된 사회에서의 학생운동에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독단성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80년대 중반이후 학생운동 진영의 독서 패턴은 이미 상당히 경직화되었다. 마르크스의 중요 텍스트 학습에서 시작된 독서패턴은 급기야는 소련의 공식 교과서 독해로 경직화되었으며, 민족해방 계열의 학생들은 이제 마르크스, 레닌 도 생략한 체 북한의 교과서만 읽기 시작하였다. 운동이 하나의 정파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특정의 정파는 자신의 노선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분야의 서적과 문헌 만 읽기 시작하였고, 왜 그 입론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수 있는 반대의 논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급기야는 후배 학생들도 아예 책 보다는 짧은 팜플렛만을 주로 읽으면서, 학과의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았다. 선배들은 후배 학생들이 여러 가지 다른 시각을 가진 책들을 읽음으로서 사고가 흔들리거나 운동의 노선에 대해 회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러한 두려움은 교조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80년대의 팜플렛 문화는 이렇듯 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더 부정적인 형태로 대학사회에 착근하여 학생들의 사고패턴을 획일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렇게 되어 90년대 학생운동은 6, 70년대의 젊은이들이 가졌던 인문주의 전통, 비판적 전통, 젊은이다운 고민과 방항을 거의 갖지 않은 경직된 존재로 변했으며 오로지 독백만을 반복하는 젊은이답지 않은
5. 89년 제3기 전대협 - 임종석과 임수경
89년의 제3기 전대협은 임종석(한양대 총학생회장)의장과 임수경(외국어대 용인 배움터)대표로 집약될 수 있다. 전대협 6년사에 있어서 가장 모범으로 평가받고 많은 충격을 주었던 3기 전대협은 환상의 진입과 영광의 탈출이라는 일화로 유명하다. 6월 29일 평양축전참가 출정식이 벌어지는 한양대에 경찰의 원천봉쇄를 비웃으며 학생들은 뚝섬 역에서 지하철을 세우고 철길을 달려 한양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29일 밤 전대협 대표 임수경이 평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다음날 경찰은 학내로 임종석의장을 잡으러 진입한다. 그러나 전대협 지도부는 한 명도 잡히지 않고 남대협(현재의 남총련)의 전투조인 오월대의 호위아래 한양대를 무사히 빠져나와 다음날 외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기동력을 보인다. 이후 임종석의장은 홍길동이라는 별명을 얻고 경찰의 경계망을 조롱하며 전국을 다녔다.
Ⅵ. 90년대의 학생운동
첫째, 90년대 학생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한총련’으로 상징되는 전국단위 학생운동 조직을 주도하는 학생들의 사상적인 경직성과 이론적 자기쇄신 능력의 결여이다. 80년대 중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의 주역이었던 함운경씨는 “한총련은 정체불명의 사상에 붙들려 현실을 망각하고 있으며, 이는 운동방식의 문제보다 근본적인 사상과 이념이 잘못됐음을 드러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현재 한총련 지도부는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무능한 집단”이라고 보면서 96년의 연세대 사건이 학생운동 전체를 궁지에 몰아넣었는데도 ‘항쟁정신 계승‘ 운운하는 등 현실을 보는 눈이 전혀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학생들은 다른 사회집단과는 달리 생활에 근거를 두지 않는 전업학습자이나 청년특유의 희망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안고 사는 이념 집단이므로 학생운동에게 있어서 이념은 운동의 방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90년대 학생운동이 갖는 여러 가지 모습은 일차적으로는 운동의 지도그룹이 견지하는 이념이나 노선을 반영하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학생운동권은 다른 사회운동권과 마찬가지로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학생운동의 주류를 형성한 민족해방(NL) 계열 학생운동은 한반도에는 여전히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으며, 북한이 건재하고 있는 현실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들 중 가장 완고하게 반미투쟁을 강조하는 그룹은 “사회주의는 붕괴하였다고 하더라도 주체사상은 제3세계에서 민족중심적 사상으로서 탄탄한 사회주의를 유지해가는 사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문민정부의 등장으로 권력의 정당성이 높아질수록 “사상전에서 지배세력에게 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투쟁일변도의 사고나 개량주의나 타협주의애 대한 극도의 공포심은 사실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섬으로 남아서 체제유지를 사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90년대 북한의 공식논리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완고한 반미, 반제국주의, 민족중심주의 사고는 90년대의 변화된 정치사회 정세 속에서 일반 학생들의 동의를 점점 더 얻지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이들의 고립은 이들의 사상적인 비타협성과 완고함을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문제는 그러한 이념을 교정할 수 있는 동력이 내부에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주체사상의 독단성과도 무관한 것은 아닌데, 90년대라는 개방되고 민주화된 사회에서의 학생운동에서 역설적으로 그러한 독단성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80년대 중반이후 학생운동 진영의 독서 패턴은 이미 상당히 경직화되었다. 마르크스의 중요 텍스트 학습에서 시작된 독서패턴은 급기야는 소련의 공식 교과서 독해로 경직화되었으며, 민족해방 계열의 학생들은 이제 마르크스, 레닌 도 생략한 체 북한의 교과서만 읽기 시작하였다. 운동이 하나의 정파로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특정의 정파는 자신의 노선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분야의 서적과 문헌 만 읽기 시작하였고, 왜 그 입론이 정당한가를 판단할 수 있는 반대의 논리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급기야는 후배 학생들도 아예 책 보다는 짧은 팜플렛만을 주로 읽으면서, 학과의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내용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았다. 선배들은 후배 학생들이 여러 가지 다른 시각을 가진 책들을 읽음으로서 사고가 흔들리거나 운동의 노선에 대해 회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러한 두려움은 교조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80년대의 팜플렛 문화는 이렇듯 90년대 들어서는 더욱 더 부정적인 형태로 대학사회에 착근하여 학생들의 사고패턴을 획일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렇게 되어 90년대 학생운동은 6, 70년대의 젊은이들이 가졌던 인문주의 전통, 비판적 전통, 젊은이다운 고민과 방항을 거의 갖지 않은 경직된 존재로 변했으며 오로지 독백만을 반복하는 젊은이답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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