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다양한 사상과 문학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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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허균의 다양한 사상과 문학세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허균의 삶과 철학

2. 허균의 문학세계 개관

3. 허균의 시 세계 분석

4. 허균소설의 특징과 세계관

5. 허균의 문장

6. 허균의 유가적 사상

7. 허균의 불교의식

8. 허균의 도가적 사상

9. 맺음말

본문내용

궁리)를 주장하는 바 거경은 심신의 수양이요 궁리는 진리의 궁구를 뜻한다. 궁리란 격물치지의 극치로서 더이상 갈 데가 없는 경지를 깨달은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자면 이기설로서 인생관과 세계관의 확립이 완성된 지혜의 최고단계로서 유물론적 세계관을 나타내고있는 것이다. 이것은 유학의 목적하는 바가 수도와 치인에 있음을 단적으로 해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진유와 위유를 설명하는데는 수도와 치인에 있음을 단적으로 해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른바 진유와 위유를 설명하는데는
“대개 일찌기 보건대 이른바 진유는 세상에 쓰이게되는 당로(唐虜)의 치(治)와 우탕문무의 공적이 사업에 나타남이 이와 같고, 세상에 쓰이지 아니하면 공맹(孔孟)의 훈(訓)과 ....의 설이 서적에 실림이 또한 이와 같으니, 비록 천만세를 지나도 이의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위유(僞儒)에 대해서는 “지금의 위유들은 유담을 농하면서 툭하면 이윤, 전설, 주공, 공자의 사업으로써 스스로 기약하고, 그 세상에 쓰이게 되면 손발을 놀리지 못하고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스스로 거두지도 못한다. 그러니 당세는 웃고 후세는 비의하게 된다. 좀 약삭빠른 자는 미리 이럴 것을 헤아리고 그 명망이 실패할 것을 두려워 한다. 그래서 문득 세상에 나가지 아니함으로써 그 졸렬함을 감추어 버린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고 보면 교산이 생각하는 바는 유학은 수(修)로 하는데만 그치지 아니하고 치인경세에까지 확대해서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으며 이가 유학의 진면목이라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봉건 통치배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그가 봉건적 윤리관에 반항함으로써 침체되어있던 유교적 봉건 질서의 테두리에서 탈출하려던 혁신적 의식의 소유자임을 나타내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특기할 점은 유교가 수천 년 동안 봉건 통치 모리배의 전유물로써 그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는 처음 형성되었을 때와는 천지간으로 멀어진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조에 들어와서는 송대의 성리학을 기본 국가이념으로 삼아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차별, 계급적 예속성은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교산이 인간평등의 기본의식을 토대로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는 것은 후세에 등장하는 실학파 즉 민중적 유물론자들의 사상을 싹틔우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허균에게서 나타나는 유학사상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이론적 학문이기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하고있는 유물론 철학인 기론적 유학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허균의 불교의식
불교는 우리민족의 의식 속에서 삼한시대 이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사회의식의 일면으로 살아있는 철학이었다. 특히 조선전기에 있어서는 불교의 세계라고 할수 있는 고려를 뒤집어엎고 새롭게 구축해 나가는 국가로서의 실천학인 유교를 강조하면서도 민중 전반에 형성되어있는 샤머니즘과 불교에 대해 강경입장을 취하는 일면 고래의 전통적 철학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명백히 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실례로 조선 전기 봉건 왕조의 주군들 중에서도 몇몇은 불교를 숭상하여 왕궁내에 불당을 건설하고 명망있는 스님을 불러다가 도(道)를 논하고 설법(說法)을 듣는 이도 있었음을 볼 때 당시의 불교는 市井佛敎의 틀을 버리고 산중불교로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불교에 의해 意識이 규정지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억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은 사찰을 위한 상속적인 토지가 둔전의 형태로 상존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 봉건 왕조의 배불 정책은 오로지 고려 말엽 풍기의 문란과 불교의 정치참여로 인한 타락상을 견제하기 위한 일 방편의 하나였지 불교를 탄압하고 척결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의 입장은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교리는 여전히 조선 민중의 교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철학성은 학자의 논리를 위한 방계철학으로서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대의 학자요, 식자며 관료배인 허균도 학문하는 자로서 불교는 한 방법의 학문이며 일맥의 철학으로 인식하고 그 논과 설, 理를 알기에 노력했음을 문장과 자료를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실제로 교산과 불교는 평생을 동행하였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불교에 대한 문답과 선답을 일삼았고 또 중들과 끊임없이 사귀었다. 그의 승가 친구들인 서산, 사명, 옥준, 송원, 해인 등 당대의 명망있는 중들은 그의 친구였거나 교우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산이 불교에 대한 관심의 시발은 세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 형 허봉의 방랑에 의한 불가에 대한 관심.
둘째, 부질 없는 속세에 대한 반발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현혹
셋째, 무한한 학문에 대한 탐구욕으로 인한 철학적 접근.
1600년 임자승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가 부처를 믿는 것은 아니다. 그 문장을 즐겨서 읽어본 것으로 한가함을 메우기 위해서이다. 작은 고을도 꾀하여 얻지 못하면서 이에 부처라는 것을 꾀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불교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익히기 위함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서산대사에게 가르침을 구하는 1602년의 편지에서 “남과 나, 그리고 만물이 모두 공이다”라고 할 만큼 깊이 있는 순리를 설법하는 것으로 보아 글을 익히기 위함만은 아님을 잘 알 수 있다. 이어서 부안군수로 있을 적에는 자신의 거처에 부처의 상을 모시기도 하였으며 <이화불조찬>에 보면 한호에게 <반야심경>을 금서로 필사케 하고, 이정에게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미륵불과 관음보살, 달마대사, 육조대사 유마힐 거사, 방온거사를 그리게 하여 거기다가 찬을 짓고 거실 벽에다 걸어두고 ‘선문법보’라 이름짓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문장을 위함이거나 현실의 도피를 위해 관심을 두거나 흥미를 갖는 정도에서 지나 불교에 심취하여 공덕을 짓는 독실한 신도의 모습이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선에 깊숙이 빠져들기도 하였다.
1606년 송운대사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그는 어렵다는 능가경도 통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는 보시업도 여러차례 하면서 인연을 만들고 있다. 그러면서 간혹 각 도의 명망있는 스님에게 현지를 주며 참선의 중요함을 논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삼척부사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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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8.12
  • 저작시기20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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