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
ⓑ윤봉길 의거(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
1934년
진단 학회 조직(1934년 한국의 역사·언어·문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한 학술단체.)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금메달 획득.
1938년
한글 교육 금지령.
1940년
민족 말살 정책 강화, 한국 광복군(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결성.#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天),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죄로 몰아 투옥한 사건.)
1945년
8.15 광복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 대한제국 ■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일컬어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하였으나, 외세(外勢)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사회·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나라의 정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을 차례로 독점하고,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윤봉길 의거(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大阪]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
1934년
진단 학회 조직(1934년 한국의 역사·언어·문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조직한 학술단체.)
1936년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금메달 획득.
1938년
한글 교육 금지령.
1940년
민족 말살 정책 강화, 한국 광복군(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조직된 항일군대) 결성.#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天),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이 취임.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 관계자를 죄로 몰아 투옥한 사건.)
1945년
8.15 광복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시모노세키 조약). 이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였다. 고종은 이에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였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옹립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시킨 후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였다(→을미사변).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된다. 이때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고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시켰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및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 대한제국 ■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연호를 광무(光武), 왕을 황제(皇帝)라 일컬어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하였으나, 외세(外勢)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사회·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나라의 정세는 어쩔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권을 차례로 독점하고, 1910년에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주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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