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
Ⅲ.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봉기
Ⅳ.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경과
1. 동학농민운동의 경과 1
2. 동학농민운동의 경과 2
Ⅴ.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성과
Ⅵ.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교훈
1. 주체적 이유
2. 객관적 이유
Ⅶ. 결론
참고문헌
Ⅱ.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
Ⅲ.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봉기
Ⅳ.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경과
1. 동학농민운동의 경과 1
2. 동학농민운동의 경과 2
Ⅴ.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성과
Ⅵ.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혁명)의 교훈
1. 주체적 이유
2. 객관적 이유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을 농민혁명과 차단시켜보는 견해는 이 사건의 역사성에 주목한다. 즉, 후자의 경우 조선후기 이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반봉건 저항과 일제의 침략에 따른 식민지화의 위기라는 상황이 사건을 유발한 가장 주요한 원인이며, 동학은 운동의 조직화에 기여했을 뿐 주체는 아니라고 한다. 동학사상을 면밀히 겸도한 최근의 한 연구는 동학사상이 결코 농민전쟁의 지도이념이 될 수 없는 ‘정치적 공통성’의 사상이었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당연히 농민층이고, 그 밖에 소상품생산자나 소상인이 가담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체가 농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농민 내부에서 부농이 주도했느냐 빈농이 주도했느냐는 논란의 촛점이 되었다. 부농주도설은 부르주아적 변혁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부농주도설은 부농의 존재 유무와 전개과정에서 부농이 공격당하던 사정을 들어 비판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 곡물수출로 인한 곡물상품화가 진전되면서 부농이 성장하고 있었고, 1890년 이후 봉건지주층이 지주제를 강화함으로써 수출로 인한 부농의 잉여저축을 저지하려 함으로써 잉여의 획득문제를 놓고 상호대립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농민군의 지도부에도 부농이나 상농층이 다수 끼어있다는 몇몇 연구자의 성과는 이 문제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국근대사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위치 설정문제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동학농민운동이 근대를 지향한다기 보다 ‘반봉건’, ‘반자본주의’, ‘반식민주의’를 동시에 주장하는 근대상을 추구했다고 보기도 한다. 일종의 농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셈인데, 근대로의 이행기의 운동이 결코 역사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친 비약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변혁운동이었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당시의 역사적 조건으로 보아 당연히 근대적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연구는 그동안 수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고, 100주년에 이르러서도 통일된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금 학계의 실정이다. 최근 들어 농민혁명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오히려 농민전쟁으로 부르는 쪽이 우세하다. 혁명으로 성공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것은 그 만큼 이 방면의 연구자가 많고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연구에서 1894년 한 해 일어난 사건으로만 시각을 한정하여 그 의미를 왜소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00년 전 동학농민운동을 지금 되새기려는 이유는 그 사건의 현재적 의미와 그에서 얻는 교훈에 있다. 최근의 동학농민운동의 연구 붐이 결코 ‘복고적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민족운동 과정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발전하여야 한다. 현재의 우리는 바로 이 같은 과거의 연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ⅰ.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서경
ⅱ. 신형식·이배용(1997),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이화여대출판부,
ⅲ. 이상식, 동학농민혁명과 광주·전남,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사업추진위원회
ⅳ. 정찬호, 동학농민운동에 나타난 서민대중의식, 한국교원대학교
ⅴ. 정진각(1978), 동학농민전쟁의 성격,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ⅵ. 황선희(2002), 동학혁명인가, 농민전쟁인가, 동학학보3, 동학학회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당연히 농민층이고, 그 밖에 소상품생산자나 소상인이 가담하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의 주체가 농민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농민 내부에서 부농이 주도했느냐 빈농이 주도했느냐는 논란의 촛점이 되었다. 부농주도설은 부르주아적 변혁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부농주도설은 부농의 존재 유무와 전개과정에서 부농이 공격당하던 사정을 들어 비판하였다. 그러나 개항 후 곡물수출로 인한 곡물상품화가 진전되면서 부농이 성장하고 있었고, 1890년 이후 봉건지주층이 지주제를 강화함으로써 수출로 인한 부농의 잉여저축을 저지하려 함으로써 잉여의 획득문제를 놓고 상호대립하게 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농민군의 지도부에도 부농이나 상농층이 다수 끼어있다는 몇몇 연구자의 성과는 이 문제를 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한국근대사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위치 설정문제에 대한 논란도 있다. 일부 연구자는 동학농민운동이 근대를 지향한다기 보다 ‘반봉건’, ‘반자본주의’, ‘반식민주의’를 동시에 주장하는 근대상을 추구했다고 보기도 한다. 일종의 농민적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셈인데, 근대로의 이행기의 운동이 결코 역사적 조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친 비약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학농민운동은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변혁운동이었고, 그것이 성공했다면 당시의 역사적 조건으로 보아 당연히 근대적 민족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연구는 그동안 수많은 논쟁점을 안고 있고, 100주년에 이르러서도 통일된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금 학계의 실정이다. 최근 들어 농민혁명이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학계에서는 오히려 농민전쟁으로 부르는 쪽이 우세하다. 혁명으로 성공할 수 있는 논리를 갖추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 혁명일 수 있는가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것은 그 만큼 이 방면의 연구자가 많고 연구자들의 역사인식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연구에서 1894년 한 해 일어난 사건으로만 시각을 한정하여 그 의미를 왜소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100년 전 동학농민운동을 지금 되새기려는 이유는 그 사건의 현재적 의미와 그에서 얻는 교훈에 있다. 최근의 동학농민운동의 연구 붐이 결코 ‘복고적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의 정신적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대민족운동 과정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발전하여야 한다. 현재의 우리는 바로 이 같은 과거의 연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ⅰ. 동학농민혁명과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서경
ⅱ. 신형식·이배용(1997),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이화여대출판부,
ⅲ. 이상식, 동학농민혁명과 광주·전남,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사업추진위원회
ⅳ. 정찬호, 동학농민운동에 나타난 서민대중의식, 한국교원대학교
ⅴ. 정진각(1978), 동학농민전쟁의 성격, 한양대 석사학위논문
ⅵ. 황선희(2002), 동학혁명인가, 농민전쟁인가, 동학학보3, 동학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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