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바리데기》작품개관
2. 줄거리 요약 및 분석
3. 어두운 현대사에 대한 몽환적 묘사
4. 희망을 잉태한 절망
5. 현대사회에 필요한 생명수
6. 인간 치유의 원형과 현대적 복원
7. 마치며
2. 줄거리 요약 및 분석
3. 어두운 현대사에 대한 몽환적 묘사
4. 희망을 잉태한 절망
5. 현대사회에 필요한 생명수
6. 인간 치유의 원형과 현대적 복원
7. 마치며
본문내용
충직한 개 칠성이와의 만남이 이어진다. 바리와 마찬가지로 일곱 번째로 태어난 강아지는 칠성이란 이름을 갖게 되는데 이 부분에서 저자가 한국의 무속문화에 정통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바리의 할머니가 죽은 뒤에 항상 바리를 인도하고 지켜주는 보호신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무속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조상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관점이다. 소설 속에서 할머니는 죽은 뒤에 칠성이를 마치 전령처럼 바리에게 보내고 바리가 고난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등 마치 하느님 대리인으로 묘사된다.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주재하는 별이다.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뭇 사람들은 숫자 7이 의미하는 원형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바리 또한 그렇게 일곱 번째로 태어나서 훗날 런던으로 건너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산다. 이것이 해원이며 책의 후반부에서 바리는 딸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과 자신을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던진 이 세상 모두를 해원시키는 여정을 밟는다.
이 책을 보면서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바리가 무슬림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 9.11 테러가 일어나는 부분이었다. 아마 그 부분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바리가 우리와 똑같은 세계에서 우리와 같이 무너지는 무역센터를 보고 경악하며 살아가는 현실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은. 현실 속에서 9.11 테러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문명의 충돌이란 테제를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구체화시켜준 사건이다. 그 구체화시키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소설 속에서 9.11 사건을 겪는 순간 주인공 바리는 즉각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한편으로 소설 속 분위기를 지배하는 무속적인 것들도 동시에 현실적인 테제로 전환되어 버린다. 마냥 미신이나 전통문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것들이 바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로 변모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낄 때 문학의 힘을 절절히 깨닫는다. 소설 <바리데기>는 한국 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나는 바리를 모진 상황 속에 내던져진 우리 속에도 있는 사람, 자신이 겪은 아픔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본다. 한 개인이 노력해서 이겨낼 수 있는 영역을 한참 넘어 문명 단위로 일어나는 거대한 갈등 속에 그녀가 처한 극단적인 상황들은 결국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용서는 또 왜 이리 어렵게만 느껴지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실재가 아니며 우리가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리가 자신의 아픔은 결국 자신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함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용서할 때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그렇게 바리는 바리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런 바리의 삶을 읽는 나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 때, 곳곳에 도사린 유혹들을 뿌리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는다. 그 유혹이란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욕구이다.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열린 마음이 될 때, 타인에게도 마음이 열리게 되며 그것이 <바리데기>가 보여주는 생명수, 곧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을 가려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남을 용서하고 떠안고 가야 한다.
그러나 바리는 아직 행복하지 않다. 그녀가 마침내 남편과 상봉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가 사는 런던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바리는 임신한 배를 부여잡고 대피한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걷다가 돌아보니 알리도 울고 있었다.”
이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언제나 새로운 갈등은 항상 일어나며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시 바리의 입을 통해 말한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7. 마치며
외삼촌의 탈출은 바리의 가족을 분열시키고 그들 모두를 어둠으로 내몬다. 무당의 염력이 전해져오는 할머니와 일곱 번째 딸‘바리’ 그리고 칠성이(개)는 우리네 무속설화인 ‘바리공주’와 교차한다. 두만강을 건너 오직 생존만이 삶일 수밖에 없는 처절함에서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할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칠성이를 잃고, 하늘아래 오직 어린소녀 ‘바리’만이 거칠고 낯선 이국의 질서에 남겨진다.
북쪽에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이 겪는 좌절과 회한의 단순한 이해를 떠나 인류의 연민과 구원이라는 차원의 시야를 만들어준다. 거칠고 사나운 대륙, 중국에서의 아슬한 생활과 15세 소녀 ‘바리’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궤적이 시작되고 죽음과 삶의 교차를 반복한다. 밀항선의 밑창, 그리고 컨테이너 바닥에 숨이 멋는 40여일간은 고통이 아닌 저승과의 수없는 왕래이다.
영국 런던에 기착한 ‘바리’의 삶은 그녀의 성품과 영험한 샤먼적 역량으로 이민사회집단의 무난한 정착과 동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작품속의 종족은 유색인종 일색이다. 유일한 백인은 ‘에밀리’뿐, 그것도 흑색인종의 주술사를 연결하는 고리일뿐으로 ‘부 와 빈’ , ‘권력과 비권력’, ‘강대국과 약소국’등과 같은 양극화에 대한 이해와 해결의 접근으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바리’의 결혼과 남편의 실종,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18살 어린 아내이자 엄마의 번민과 고통은 다시금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빌려 인류의 본성과 구원을 꿴다.
“불행과 고통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 그리곤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 ‘무쇠성’을 여행한다. 굶어죽은 북선의 식구들, 죽고 죽이는 전쟁의 화신들, ‘목청껏 떠들지만 남의말을 삼켜버리는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허위를 내려다보며 서천의 하늘끝,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수를 찾는다. 그러나 생명수는? “그런게 있나”.....
인간의 고통이란 그들의
우리나라 무속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조상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관점이다. 소설 속에서 할머니는 죽은 뒤에 칠성이를 마치 전령처럼 바리에게 보내고 바리가 고난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는 등 마치 하느님 대리인으로 묘사된다. 칠성은 북두칠성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주재하는 별이다.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뭇 사람들은 숫자 7이 의미하는 원형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바리 또한 그렇게 일곱 번째로 태어나서 훗날 런던으로 건너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산다. 이것이 해원이며 책의 후반부에서 바리는 딸의 죽음을 통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과 자신을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내던진 이 세상 모두를 해원시키는 여정을 밟는다.
이 책을 보면서 인상이 깊었던 부분은 바리가 무슬림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때 9.11 테러가 일어나는 부분이었다. 아마 그 부분에서부터였을 것이다. 바리가 우리와 똑같은 세계에서 우리와 같이 무너지는 무역센터를 보고 경악하며 살아가는 현실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 것은. 현실 속에서 9.11 테러가 우리에게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굳이 말한다면 문명의 충돌이란 테제를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구체화시켜준 사건이다. 그 구체화시키는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소설 속에서 9.11 사건을 겪는 순간 주인공 바리는 즉각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다. 한편으로 소설 속 분위기를 지배하는 무속적인 것들도 동시에 현실적인 테제로 전환되어 버린다. 마냥 미신이나 전통문화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것들이 바리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현실적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는 보물창고로 변모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느낄 때 문학의 힘을 절절히 깨닫는다. 소설 <바리데기>는 한국 문학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해도 좋으리라.
나는 바리를 모진 상황 속에 내던져진 우리 속에도 있는 사람, 자신이 겪은 아픔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용서하는 사람, 그럴 수 있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본다. 한 개인이 노력해서 이겨낼 수 있는 영역을 한참 넘어 문명 단위로 일어나는 거대한 갈등 속에 그녀가 처한 극단적인 상황들은 결국 우리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용서는 또 왜 이리 어렵게만 느껴지는지를 일깨워주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실재가 아니며 우리가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리가 자신의 아픔은 결국 자신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함으로써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용서할 때의 모습에서 발견된다. 그렇게 바리는 바리 자신으로 남을 수 있었고, 그런 바리의 삶을 읽는 나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남을 수 있을 때, 곳곳에 도사린 유혹들을 뿌리치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는다. 그 유혹이란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욕구이다. 용기를 가지고 스스로에게 열린 마음이 될 때, 타인에게도 마음이 열리게 되며 그것이 <바리데기>가 보여주는 생명수, 곧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을 가려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고 남을 용서하고 떠안고 가야 한다.
그러나 바리는 아직 행복하지 않다. 그녀가 마침내 남편과 상봉한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녀가 사는 런던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바리는 임신한 배를 부여잡고 대피한다.
“내가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면서 걷다가 돌아보니 알리도 울고 있었다.”
이 문장으로 소설은 끝난다. 저자가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언제나 새로운 갈등은 항상 일어나며 우리는 죽는 그날까지 유혹을 뿌리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시 바리의 입을 통해 말한다.
“나는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기다리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늘 기대보다는 못 미치지만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7. 마치며
외삼촌의 탈출은 바리의 가족을 분열시키고 그들 모두를 어둠으로 내몬다. 무당의 염력이 전해져오는 할머니와 일곱 번째 딸‘바리’ 그리고 칠성이(개)는 우리네 무속설화인 ‘바리공주’와 교차한다. 두만강을 건너 오직 생존만이 삶일 수밖에 없는 처절함에서 어머니와 언니들, 그리고 할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칠성이를 잃고, 하늘아래 오직 어린소녀 ‘바리’만이 거칠고 낯선 이국의 질서에 남겨진다.
북쪽에 있는 우리의 피붙이들이 겪는 좌절과 회한의 단순한 이해를 떠나 인류의 연민과 구원이라는 차원의 시야를 만들어준다. 거칠고 사나운 대륙, 중국에서의 아슬한 생활과 15세 소녀 ‘바리’의 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궤적이 시작되고 죽음과 삶의 교차를 반복한다. 밀항선의 밑창, 그리고 컨테이너 바닥에 숨이 멋는 40여일간은 고통이 아닌 저승과의 수없는 왕래이다.
영국 런던에 기착한 ‘바리’의 삶은 그녀의 성품과 영험한 샤먼적 역량으로 이민사회집단의 무난한 정착과 동화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작품속의 종족은 유색인종 일색이다. 유일한 백인은 ‘에밀리’뿐, 그것도 흑색인종의 주술사를 연결하는 고리일뿐으로 ‘부 와 빈’ , ‘권력과 비권력’, ‘강대국과 약소국’등과 같은 양극화에 대한 이해와 해결의 접근으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란 생각을 갖게 한다.
‘바리’의 결혼과 남편의 실종,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18살 어린 아내이자 엄마의 번민과 고통은 다시금 ‘바리공주’설화의 환상을 빌려 인류의 본성과 구원을 꿴다.
“불행과 고통은 우리가 이미 저지른 것들이 나타나는 것”, 그리곤 ‘불바다’, ‘피바다’, ‘모래바다’, ‘무쇠성’을 여행한다. 굶어죽은 북선의 식구들, 죽고 죽이는 전쟁의 화신들, ‘목청껏 떠들지만 남의말을 삼켜버리는 아무런 의미도 전하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허위를 내려다보며 서천의 하늘끝,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수를 찾는다. 그러나 생명수는? “그런게 있나”.....
인간의 고통이란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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