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1.1 가단(歌壇)의 정의
-1.2 호남가단의 형성
2. 본론
-2.1 면앙정가단
-2.2 성산가단-주요인물 및 그 형성을 중심으로
-2.3 호남가단 시의 특징
-2.4 호남가단의 대표문인과 작품-송순과 정철
-2.5 그 밖의 호남시인들과 작품들
3. 결론
4. 참고문헌
-1.1 가단(歌壇)의 정의
-1.2 호남가단의 형성
2. 본론
-2.1 면앙정가단
-2.2 성산가단-주요인물 및 그 형성을 중심으로
-2.3 호남가단 시의 특징
-2.4 호남가단의 대표문인과 작품-송순과 정철
-2.5 그 밖의 호남시인들과 작품들
3. 결론
4. 참고문헌
본문내용
전통 속에서 이룩되었으니, 이 작품은 정극인의 <상춘곡>에 나타나는 자연에 대한 완상과 흥취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며, 정철의 <성산별곡>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국어의 아름다움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솜씨를 보여줌으로써 호남 시가문학이 장차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예견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같은 책, pp.248-250.
2.4.4 호남가단과 정철
불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집불통의 송강, 야심만만한 정치가,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가사문학의 집대성, 당대 인격자들과 평생의 우위를 다진, 수많은 수식어를 나열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그가 바로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정철의 유년은 앞으로 전개될 숱한 우여곡절을 깊숙이 간직한 채, 부모대에 이르러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궁궐에 드나들었다. 특히 인종의 배 다른 동생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친교가 두터워, 벗하며 놀기도 했으니 크게 부러울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더군다나 훗날 인종이 왕에 오른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뜸으로써, 문정왕후 소생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유년시절 그와의 친교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왕실과 인연을 맺은 누이 중 막내 누이의 남편이며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이 을사사화로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면서 정철의 집안이 윤임 계열의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터라 집안 전체가 모진 고난과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한창 자라나는 나이에 놓여 있던 정철의 정서적 충격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컸을 것이다. 훗날 그가 중앙 정치 무대에서 파란곡절을 헤쳐 나가는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든 권력의 중심부에서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성장기의 경험들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철의 가족은 유배에서 풀려나 부친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정철의 나이는 16세였으며, 27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때 정철의 새로운 인생은 사촌 김윤제와의 극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윤제는 잠시 벼슬을 그만 두고 성산 맞은편에 환벽당을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한가롭게 보내고 있던 어느 여름날, 졸음에 겨워 잠시 눈을 붙이노라니, 앞개울에서 한 마리의 용이 이리저리 노니는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해 개울가에 내려가 보니, 순천에 살고 있는 형을 만나러 가던 중 날씨가 너무 더워 정철이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그는 정철의 영특함,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 순천행을 만류시키고 자기 문하에 두고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마침 김윤제의 종질인 서하 김성원도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이어서 훗날 시가문학이 집대성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된 서하당 주인인 김성원과 동문수학의 인연을 맺기도 한다. 김윤제와의 만남으로 본격적인 배움의 길이 열리고, 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그의 외손녀와 결혼도 하게 되고, 그에게 일부 재산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게 되기도 한다. 또한 송강은 학문적 형성 과정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하서 김인후(1510~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석천 임억령(1496~1568), 면앙정 송순(1493~1582)에게 학문적 영향은 물론 이들의 인품과 생활태도까지도 귀감을 삼을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정철의 청년성장기의 주변 화경이나 풍토, 수학, 교우관계는 그의 지성과 감성을 순화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리한 절망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내게 되며 송장에 있어서 이곳 생활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자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청춘의 꿈과 희망을 갖게 했으며,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담금질하던 텃밭이요, 훗날 어지러운 현실의 풍파에서 머물 때마다 고뇌와 갈등을 치유하고 위안을 얻던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김영성, 앞의 논문, pp.13-14.
2.4.5 정철과 그의 문학
정철이 생존, 활동했던 16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왕조건국과 함께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 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지어내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기된 시기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른바 사림이라는 사회세력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여,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집권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정철이 바로 사림 출신이다.
사림세력의 형성 및 집권 이후의 동향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는 엄청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 다른 사대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士禍)와 당쟁이야말로 그 격변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나간 태풍의 눈이었다.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는 신흥하는 사림세력에 대해 기존의 훈구세력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 결과하고 할 수 있다.
정철은 이러한 역사 현실의 일선에서 대부분의 사태를 직접 체험하며 살았던 인물이기에 파란만장한 삶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학자이며 정치가였고 문인이었다. 정철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그 뜻을 추호도 굽히지 않았기에 자신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자초하기도 하였다. 그는 강렬하게 느끼고 주체적으로 사고했으며, 지식인다운 의지와 용기로써 행동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대가 제기하는 삶과 사회 문제들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특히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치열한 정치생활로 네 번의 유배생활을 담양 청평에서 대체로 보내게 되는데 그때 지어진 작품들이며 가사문학으로 집대성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역시 이곳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자신이 겪어 나간 삶의 기록이자 대대로 공감의 지평을 열어준 사유와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같은 논문, pp.15-16.
2.4.6 정철의 대표작 <관동별곡>
금강대 맨 우층의 선학이 삿기 치니
춘풍 옥적성의 첫잠을 깨돗던디
호의 현상이 반공에 소소뜨니
서호
2.4.4 호남가단과 정철
불같은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집불통의 송강, 야심만만한 정치가, 우리 문학사 최고의 시인 가사문학의 집대성, 당대 인격자들과 평생의 우위를 다진, 수많은 수식어를 나열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그가 바로 송강 정철(1536~1593)이다.
정철의 유년은 앞으로 전개될 숱한 우여곡절을 깊숙이 간직한 채, 부모대에 이르러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으면서 궁궐에 드나들었다. 특히 인종의 배 다른 동생 경원대군(훗날 명종)과 친교가 두터워, 벗하며 놀기도 했으니 크게 부러울 것도 부족한 것도 없는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더군다나 훗날 인종이 왕에 오른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뜸으로써, 문정왕후 소생인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는 사실을 감안할 때, 유년시절 그와의 친교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왕실과 인연을 맺은 누이 중 막내 누이의 남편이며 윤임의 생질인 계림군이 을사사화로 역모의 주모자로 몰려 처형되면서 정철의 집안이 윤임 계열의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던 터라 집안 전체가 모진 고난과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한창 자라나는 나이에 놓여 있던 정철의 정서적 충격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컸을 것이다. 훗날 그가 중앙 정치 무대에서 파란곡절을 헤쳐 나가는 삶을 살면서도 어떻게든 권력의 중심부에서 있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이와 같은 성장기의 경험들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철의 가족은 유배에서 풀려나 부친 묘소가 있는 담양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때 정철의 나이는 16세였으며, 27세 때에 과거에 급제하기 전까지 약 10년간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 때 정철의 새로운 인생은 사촌 김윤제와의 극적인 만남에서부터 시작된다. 김윤제는 잠시 벼슬을 그만 두고 성산 맞은편에 환벽당을 짓고, 시와 술을 벗하며 한가롭게 보내고 있던 어느 여름날, 졸음에 겨워 잠시 눈을 붙이노라니, 앞개울에서 한 마리의 용이 이리저리 노니는 꿈을 꾸었다. 너무 생생해 개울가에 내려가 보니, 순천에 살고 있는 형을 만나러 가던 중 날씨가 너무 더워 정철이 개울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그는 정철의 영특함, 비범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 순천행을 만류시키고 자기 문하에 두고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마침 김윤제의 종질인 서하 김성원도 거기에서 공부하고 있던 중이어서 훗날 시가문학이 집대성되는 데에 영향을 미치게 된 서하당 주인인 김성원과 동문수학의 인연을 맺기도 한다. 김윤제와의 만남으로 본격적인 배움의 길이 열리고, 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그의 외손녀와 결혼도 하게 되고, 그에게 일부 재산도 물려받아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갖게 되기도 한다. 또한 송강은 학문적 형성 과정에서 당대의 석학들인 하서 김인후(1510~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석천 임억령(1496~1568), 면앙정 송순(1493~1582)에게 학문적 영향은 물론 이들의 인품과 생활태도까지도 귀감을 삼을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정철의 청년성장기의 주변 화경이나 풍토, 수학, 교우관계는 그의 지성과 감성을 순화시키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리한 절망의 고통에서 벗어나, 그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내게 되며 송장에 있어서 이곳 생활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자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청춘의 꿈과 희망을 갖게 했으며,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담금질하던 텃밭이요, 훗날 어지러운 현실의 풍파에서 머물 때마다 고뇌와 갈등을 치유하고 위안을 얻던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김영성, 앞의 논문, pp.13-14.
2.4.5 정철과 그의 문학
정철이 생존, 활동했던 16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기간은 조선왕조건국과 함께 새로운 체제 확립과 문물의 창조, 정비 등이 크게 한 단락지어내고, 바야흐로 또 다른 변화와 발전을 위한 움직임들이 다방면에 걸쳐 제기된 시기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른바 사림이라는 사회세력이 우리 역사상에 등장하여, 마침내 이 시기에 이르러 기존의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집권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사실이다. 정철이 바로 사림 출신이다.
사림세력의 형성 및 집권 이후의 동향과 관련하여 우리 역사는 엄청난 격변의 소용돌이를 겪는다. 정치적, 사회적 입장이 다른 사대부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빚어진 사화(士禍)와 당쟁이야말로 그 격변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나간 태풍의 눈이었다.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는 신흥하는 사림세력에 대해 기존의 훈구세력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한 결과하고 할 수 있다.
정철은 이러한 역사 현실의 일선에서 대부분의 사태를 직접 체험하며 살았던 인물이기에 파란만장한 삶 바로 그것이다. 그는 학자이며 정치가였고 문인이었다. 정철은 스스로가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그 뜻을 추호도 굽히지 않았기에 자신의 뜻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자초하기도 하였다. 그는 강렬하게 느끼고 주체적으로 사고했으며, 지식인다운 의지와 용기로써 행동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시대가 제기하는 삶과 사회 문제들에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특히 그가 남긴 문학 작품들은 치열한 정치생활로 네 번의 유배생활을 담양 청평에서 대체로 보내게 되는데 그때 지어진 작품들이며 가사문학으로 집대성된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역시 이곳에서 완성된 작품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자신이 겪어 나간 삶의 기록이자 대대로 공감의 지평을 열어준 사유와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같은 논문, pp.15-16.
2.4.6 정철의 대표작 <관동별곡>
금강대 맨 우층의 선학이 삿기 치니
춘풍 옥적성의 첫잠을 깨돗던디
호의 현상이 반공에 소소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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