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여 벼슬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신의 실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후에도 수십번 부름을 받았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재야에서 선비생활로 상소를 올리며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다.
열한 번째는 권시이다. 산림의 선비로 부름받아 국왕의 융슝한 예우를 받았다. 권시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었는데, 최명실은 “학생권시는 이름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뜻과 행실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들은 모두 시대의 훌륭한 선비라고 할 만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알아보기 쉽지 않으나 이들은 비유하자면 계곡에 핀 난초나 형산에 묻힌 박옥이 향기와 빛깔을 채 토해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털어주고 닦아주어서 광채를 더하게 한다면 어찌 뒷날 이름을 떨칠 명유가 이둘 중에서 나오지 않을지 알수 있겠습니까-인조실록 권32,14년6월 갑신”이라고 하였다. 여러차례 조정에서 부름을 받았지만 권시는 사퇴했다. 번번히 사퇴함으로 임금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대궐에 나가서 면직을 청했다. 그렇지만 임금이 물러가지 말라고 애뜻이 하자 강관들과 함께 입시해 대학연의를 강론했다. 강론뒤 면직을 청했다. 이에 임금이 나는 재주와 지혜가 미치지 못해 그대들긔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그대들이 늘 멀리 떠나려는 뜻을 품는다고 하자 권시는 “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신의 아비가 일찍이 신에게 경계하기를 ‘과거에 급제하기를 워하지 말고 벼슬하기를 원하지 말라’했으므로 신은 삼가 훈계를 지켜 일찍이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만 물러가 어리석은 저의 분수를 지키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처사다운 겸손함이 아닌가 싶다.
열두 번째는 김창흡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 시명이 이 세상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본래 자연을 사랑했으므로 짚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며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마다 문득 시를 읊조리고 머뭇거리면서 오랫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일찍이 장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밝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사이를 방랑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일찍이 주역을 읽고“ 정자와 주자가 이른 곳이라면 나또한 이를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학문적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지만 김창흡 또한 다른 처사들처럼 관직에 머물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는 부친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날 유언으로 지위가 요직이면 거하기 어려워 원망이 모이고 책임이 무거우면 맡기 어려워 재앙이 생기며 명망이 높으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훼방이 돌아오므로 고관이나 요직을 멀리 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마음에 간직하고 뼈에 새겨서 영원히 다짐한 바이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열세 번째는 민우수이다. 그의 가문은 혁혁한 명문거족이었다. 인현왕후가 고모이고 할아버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영돈령부사까지 올랐으며 작은아버지 민진원은 영조때 우의정을 지낸 노론의 거두였다. 이러한 명문대가 출신인 민우수는 젊어서부터 학문이
열한 번째는 권시이다. 산림의 선비로 부름받아 국왕의 융슝한 예우를 받았다. 권시의 학문은 높이 평가되었는데, 최명실은 “학생권시는 이름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뜻과 행실이 맑고 깨끗합니다. 이들은 모두 시대의 훌륭한 선비라고 할 만합니다. 사람은 참으로 알아보기 쉽지 않으나 이들은 비유하자면 계곡에 핀 난초나 형산에 묻힌 박옥이 향기와 빛깔을 채 토해내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털어주고 닦아주어서 광채를 더하게 한다면 어찌 뒷날 이름을 떨칠 명유가 이둘 중에서 나오지 않을지 알수 있겠습니까-인조실록 권32,14년6월 갑신”이라고 하였다. 여러차례 조정에서 부름을 받았지만 권시는 사퇴했다. 번번히 사퇴함으로 임금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대궐에 나가서 면직을 청했다. 그렇지만 임금이 물러가지 말라고 애뜻이 하자 강관들과 함께 입시해 대학연의를 강론했다. 강론뒤 면직을 청했다. 이에 임금이 나는 재주와 지혜가 미치지 못해 그대들긔 힘에 의지하고자 하는 그대들이 늘 멀리 떠나려는 뜻을 품는다고 하자 권시는 “ 조정에 있으면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지극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신의 아비가 일찍이 신에게 경계하기를 ‘과거에 급제하기를 워하지 말고 벼슬하기를 원하지 말라’했으므로 신은 삼가 훈계를 지켜 일찍이 잠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만 물러가 어리석은 저의 분수를 지키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처사다운 겸손함이 아닌가 싶다.
열두 번째는 김창흡이다. 그는 시를 잘 지어 시명이 이 세상에 으뜸이었다고 한다. 본래 자연을 사랑했으므로 짚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며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만날 때마다 문득 시를 읊조리고 머뭇거리면서 오랫동안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일찍이 장자의 글을 읽다가 마음속에 밝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때부터 세상일을 버리고는 산수사이를 방랑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일찍이 주역을 읽고“ 정자와 주자가 이른 곳이라면 나또한 이를 수 있다”라고 할 정도로 학문적 자신감이 넘쳤다. 그렇지만 김창흡 또한 다른 처사들처럼 관직에 머물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는 부친 김수항이 기사환국으로 죽음을 맞이하던 날 유언으로 지위가 요직이면 거하기 어려워 원망이 모이고 책임이 무거우면 맡기 어려워 재앙이 생기며 명망이 높으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 훼방이 돌아오므로 고관이나 요직을 멀리 하라는 것 이었는데 이러한 유지를 받들어 마음에 간직하고 뼈에 새겨서 영원히 다짐한 바이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열세 번째는 민우수이다. 그의 가문은 혁혁한 명문거족이었다. 인현왕후가 고모이고 할아버지 민유중은 숙종의 장인으로 영돈령부사까지 올랐으며 작은아버지 민진원은 영조때 우의정을 지낸 노론의 거두였다. 이러한 명문대가 출신인 민우수는 젊어서부터 학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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