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하(夏) 왕조
은, 주 왕조의 시대
춘추 전국시대
진(秦) 왕조
한(漢) 나라
삼국(三國)시대)
서진(西晉) 시대
동진(東晉)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남,북조(南北朝) 시대
수 나라
당(唐) 나라
송(宋)의 문화
원(元)의 사회
은, 주 왕조의 시대
춘추 전국시대
진(秦) 왕조
한(漢) 나라
삼국(三國)시대)
서진(西晉) 시대
동진(東晉)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남,북조(南北朝) 시대
수 나라
당(唐) 나라
송(宋)의 문화
원(元)의 사회
본문내용
성된 의견에 귀를 기울여 이것을 받아들이고, 정치에 반영한 것을 들 수 있다. 태종에게 직간을 가장 잘한 위징도 이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함부로 사람의 목숨을 해치지 않았다. 게다가 당태종이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현자의 위치에 있었다면 태종의 황후인 문덕황후는 이에 못지않게 중국의 역사상 가장 후덕한 왕후로 손꼽히는 여인이었다. 당태종은 문덕왕후의 충고도 달게 받으며 덕치주의를 실행해 나갔다.
여제(女帝) 측천무후 ~ 중세는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일관된 시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숭배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권력은 하루아침에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구한 세월을 두고 조금씩 부지불식간에 쌓아지는 것이다. 당나라 말기의 측천무후도 처음엔 다만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궁녀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종의 정황후인 왕씨의 신임을 얻고 또 온갖 수단을 써서 그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오랜 세월을 허비한 결과 그 권력을 쟁취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한 줄로 기록될지라도 그것은 장구한 세월을 인내한 결과인 것이다.
개원(開元)의 治 ~ 현종 재위 45년 동안에는 두 개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처음 30년동안은 연호로 개원이라 하였고 나머지 15년은 천보라 하였다. 현종이 이렇게 연호를 개원, 천보라고 한 이유는 이것이 중국 역사상의 전성기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원의 치세때는 국내에 있어서는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환경이 좋았다는 점이다. 거슬러 올라가 무후의 시대는 무후 손에 나 대숙청에서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구세력은 크게 멸망햇고, 궁중을 근거로 한 무후, 위후의 일족, 그 동조자들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왕실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변했고, 그와 동시에 종전의 부패한 인습에서 해방되었다. 이처럼 정치를 행하는데 있어 좋은 조건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기에 현종의 치세는 그만큼 순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이 시대를 개원의 치라 칭하게 된다. 개원시대에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국외 관계도 호전을 보였다. 태종이 외국을 정복했을 때부터 당은 각 요지에 6도호부를 두고 이민족을 지배했는데, 고종 말기부터 도호부의 위력이 시들해지자 현종은 다시 강력한 절도사를 두어 병마, 재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의 수는 열 개나 되어 국위를 다시 한번 이민족 사이에 떨치게 되었다.
송(宋)의 문화
중국 역사상 송왕조는 가장 문화가 발달된 나라였다. 사상, 서화, 시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대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독립사학의 선구적인 저서로 손꼽히고 있다. 사마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사 현상에 있어 연속하는 정통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사실의 연속만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 자치통감도 그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이것은 본보기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므로 거기에는 아직 발전된 관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성에 기초를 두고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역사 인식의 자세는 구양수의 사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구양수가 편찬한 오대사기에는 천으로서 인에 참하면 인사가 어지러워진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생활현상을 하늘의 뜻이 나타난 바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의 생활, 인간성 그 본래의 의의를 말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분명하게 '독립사학'을 주장한 것은 이전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것이다. 송대의 역사학이 경학으로부터 독립된 학문으로서 자립하려한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데서 비롯된다. 과거의 사실은 성인들이 만들어 낸 것, 즉 어떤 규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추구되어야 하며, 더욱이 그것이 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높은 가치와 내면성을 추구하는 송대의 학술경향이 예술에도 반영되어 송대에는 독특한 기품의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원(元)의 사회
몽고제국은 북방초원지대와 남방 정주 지역이라는 2개의 이질적인 지방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본국과 속령이라는 형식으로 된 이 결합은 나무에 대를 갖다 붙인 꼴이었다. 그래서 후에는 이 접착 부분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분쟁으로 치닫고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원나라는 분명히 특이한 왕조였다. 중국 영토에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왕조가 중국 전체를 통치한 것은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여제(女帝) 측천무후 ~ 중세는 권력 투쟁의 장으로 일관된 시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력을 숭배했고, 이를 쟁취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권력은 하루아침에 쉽사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구한 세월을 두고 조금씩 부지불식간에 쌓아지는 것이다. 당나라 말기의 측천무후도 처음엔 다만 한 사람의 보잘 것 없는 궁녀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종의 정황후인 왕씨의 신임을 얻고 또 온갖 수단을 써서 그녀와의 싸움에서 이기기까지 오랜 세월을 허비한 결과 그 권력을 쟁취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한 줄로 기록될지라도 그것은 장구한 세월을 인내한 결과인 것이다.
개원(開元)의 治 ~ 현종 재위 45년 동안에는 두 개의 연호가 사용되었다. 처음 30년동안은 연호로 개원이라 하였고 나머지 15년은 천보라 하였다. 현종이 이렇게 연호를 개원, 천보라고 한 이유는 이것이 중국 역사상의 전성기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개원의 치세때는 국내에 있어서는 가장 안정된 시기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환경이 좋았다는 점이다. 거슬러 올라가 무후의 시대는 무후 손에 나 대숙청에서 통치에 방해가 될 만한 구세력은 크게 멸망햇고, 궁중을 근거로 한 무후, 위후의 일족, 그 동조자들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왕실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변했고, 그와 동시에 종전의 부패한 인습에서 해방되었다. 이처럼 정치를 행하는데 있어 좋은 조건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기에 현종의 치세는 그만큼 순탄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이 시대를 개원의 치라 칭하게 된다. 개원시대에는 국내뿐만이 아니라 국외 관계도 호전을 보였다. 태종이 외국을 정복했을 때부터 당은 각 요지에 6도호부를 두고 이민족을 지배했는데, 고종 말기부터 도호부의 위력이 시들해지자 현종은 다시 강력한 절도사를 두어 병마, 재정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의 수는 열 개나 되어 국위를 다시 한번 이민족 사이에 떨치게 되었다.
송(宋)의 문화
중국 역사상 송왕조는 가장 문화가 발달된 나라였다. 사상, 서화, 시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문화의 꽃을 피웠던 시대였다.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독립사학의 선구적인 저서로 손꼽히고 있다. 사마광은 그의 저서에서 역사 현상에 있어 연속하는 정통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직 사실의 연속만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물론 이 자치통감도 그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이것은 본보기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므로 거기에는 아직 발전된 관념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성에 기초를 두고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현실을 보는 역사 인식의 자세는 구양수의 사학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구양수가 편찬한 오대사기에는 천으로서 인에 참하면 인사가 어지러워진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생활현상을 하늘의 뜻이 나타난 바라고 생각하는 것은 곧 인간의 생활, 인간성 그 본래의 의의를 말살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분명하게 '독립사학'을 주장한 것은 이전의 어떤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것이다. 송대의 역사학이 경학으로부터 독립된 학문으로서 자립하려한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데서 비롯된다. 과거의 사실은 성인들이 만들어 낸 것, 즉 어떤 규범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마땅히 추구되어야 하며, 더욱이 그것이 현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높은 가치와 내면성을 추구하는 송대의 학술경향이 예술에도 반영되어 송대에는 독특한 기품의 예술을 창조함으로써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원(元)의 사회
몽고제국은 북방초원지대와 남방 정주 지역이라는 2개의 이질적인 지방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본국과 속령이라는 형식으로 된 이 결합은 나무에 대를 갖다 붙인 꼴이었다. 그래서 후에는 이 접착 부분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 분쟁으로 치닫고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원나라는 분명히 특이한 왕조였다. 중국 영토에서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왕조가 중국 전체를 통치한 것은 원나라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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