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기
제2기
제3기
제2기
제3기
본문내용
것으로 어떤 한측면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민족주의\'세력과 \'
국제주의\'세력이 간신히 서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한 시기라고 하겠다.
이 시기는 정규적이고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이렇다할 정도로 크게 손상시킴이 없이
민족적 감정을 현저히 확대,심화시키는 것을 허용할 만큼 강력한 국제질서 내지 구
조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19세기에 들어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져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궤도를 따라 발전 할 수 있었다고 말할수 있
겠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19세기 전시기를 통하여 민족적인 세력들이 민
족이 국가를 이룰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더욱 성공적으로 관철시켜 나아갔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제주의 세력이 다수의 민족적 경제권들을 단일한 세계경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제1기에서 시작된 과정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의 다른 시각에서 보
자면, 제 2기의 질서는 정치적 민족주의의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호소력과 국제경제
메카니즘의 비밀스럽고 전제적인 운영 사이에 타협을 이룬 체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이같은 타협들이 붕괴되고 그러한 타협들의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비현실성과 취
약점들이 드러난 것이 이 제 2기의 마지막 대목의 특징을 이루었다.
19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적인 민족주의의 창시자는 루쏘이다. 루쏘는 군
주
개인이나 지배계급이 곧 민족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담하게도 국
가 내지 민족(nation)을 인민(people)과 동일시했으며 이것이 프랑스혁명과 미국혁
명의 기초원리가 되었다. 상당한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국민공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 대신에 모든 남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채
택하고자 했던 자꼬뱅 헌법은 결코 시행되지 못했으며 \'제3신분\'(Third Estate)을
구성했던 재산과 체면을 갖춘 중산계급은 19세기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대중에 대해
뿌리깊은 공포감과 불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기 중산계급의
민족주의는 18세기에는 전혀 낯설게 느껴졌을 민주적이고 잠재적으로 대중적인 성향
을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프리드리히에서 나폴레옹에로의 이행과 상응하
여, 지적인 면세어는 기번으로부터 버크로, 또는 괘테와 레씽으로부터 헤르더와 쉴
러로의 이행이 있었다. 게몽주의 운동의 세계주의는 낭만주의 운동의 민족주의로 대
체된 것으로 이는 인민과 연결되는 새로운 민족개념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국제관게는 군주가 아닌 민족 내지 국민의 총체적인 이해관계나 야심 또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절대군주의 소멸과 더불어 국제관계 및 국제법상의 편의를 위해 민족 자체를 인격
화할 필요가 생겨났다. 19세기 사람들은 당시 그들이 이해하던 대로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열렬히 몰두하고 있었고, 민족주의는 그 양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이해
되었다. 그러나 첫째 어째서 민족들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군주들의 철저한 개인주의
보다 덜 이기적이고 평화에 대해 덜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둘째 어째서 민
족은 자제심과 명예심이라는 군주다운 기품을 과시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러한
기품 못지 않게 군주다운 속성인 침략성이라든지 탐욕 등을 발휘할 것으로는 생각되
지 않았는가, 세째 어째서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를 약속하는 징검다리라고 생각되었
는가, 그리고 끝으로 민족주의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극치라기보다 차라리 그 부
정에 가깝다는 점이 어째서 거의 인식되지 못했을까 하는 점들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
이 질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으로서는 19세기의 민족주의는 적어도 1870년대까지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세력이 간신히 서로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한 시기라고 하겠다.
이 시기는 정규적이고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이렇다할 정도로 크게 손상시킴이 없이
민족적 감정을 현저히 확대,심화시키는 것을 허용할 만큼 강력한 국제질서 내지 구
조를 확립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19세기에 들어서는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타협이 이루어져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궤도를 따라 발전 할 수 있었다고 말할수 있
겠다. 그리하여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19세기 전시기를 통하여 민족적인 세력들이 민
족이 국가를 이룰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더욱 성공적으로 관철시켜 나아갔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제주의 세력이 다수의 민족적 경제권들을 단일한 세계경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제1기에서 시작된 과정을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
의 다른 시각에서 보
자면, 제 2기의 질서는 정치적 민족주의의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호소력과 국제경제
메카니즘의 비밀스럽고 전제적인 운영 사이에 타협을 이룬 체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 이같은 타협들이 붕괴되고 그러한 타협들의 밑바닥에 감춰져 있던 비현실성과 취
약점들이 드러난 것이 이 제 2기의 마지막 대목의 특징을 이루었다.
19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적인 민족주의의 창시자는 루쏘이다. 루쏘는 군
주
개인이나 지배계급이 곧 민족의 구체적 표현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담하게도 국
가 내지 민족(nation)을 인민(people)과 동일시했으며 이것이 프랑스혁명과 미국혁
명의 기초원리가 되었다. 상당한 정도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국민공회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 대신에 모든 남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채
택하고자 했던 자꼬뱅 헌법은 결코 시행되지 못했으며 \'제3신분\'(Third Estate)을
구성했던 재산과 체면을 갖춘 중산계급은 19세기의 대부분의 기간동안 대중에 대해
뿌리깊은 공포감과 불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시기 중산계급의
민족주의는 18세기에는 전혀 낯설게 느껴졌을 민주적이고 잠재적으로 대중적인 성향
을 애초부터 내포하고 있었다. 한편 프리드리히에서 나폴레옹에로의 이행과 상응하
여, 지적인 면세어는 기번으로부터 버크로, 또는 괘테와 레씽으로부터 헤르더와 쉴
러로의 이행이 있었다. 게몽주의 운동의 세계주의는 낭만주의 운동의 민족주의로 대
체된 것으로 이는 인민과 연결되는 새로운 민족개념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국제관게는 군주가 아닌 민족 내지 국민의 총체적인 이해관계나 야심 또는
감정에 의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절대군주의 소멸과 더불어 국제관계 및 국제법상의 편의를 위해 민족 자체를 인격
화할 필요가 생겨났다. 19세기 사람들은 당시 그들이 이해하던 대로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에 열렬히 몰두하고 있었고, 민족주의는 그 양자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이해
되었다. 그러나 첫째 어째서 민족들의 철저한 개인주의는 군주들의 철저한 개인주의
보다 덜 이기적이고 평화에 대해 덜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둘째 어째서 민
족은 자제심과 명예심이라는 군주다운 기품을 과시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그러한
기품 못지 않게 군주다운 속성인 침략성이라든지 탐욕 등을 발휘할 것으로는 생각되
지 않았는가, 세째 어째서 민족주의는 국제주의를 약속하는 징검다리라고 생각되었
는가, 그리고 끝으로 민족주의가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의 극치라기보다 차라리 그 부
정에 가깝다는 점이 어째서 거의 인식되지 못했을까 하는 점들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
이 질문에 대한 첫번째 대답으로서는 19세기의 민족주의는 적어도 1870년대까지는
자유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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