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위헌법률심사제 일반
1. 위헌법률심사제의 의의
2. 위헌법률심사제의 연혁
3. 위헌법률심사제의 이론적 근거
1) 헌법의 최고법규성의 보장
2) 의회에 대한 불신
3) 권력분립의 원리
4. 위헌법률심사제의 유형
1) 심사기관의 성격을 기준으로 한 분류
2) 심사작용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분류
Ⅱ. 위헌심사제도의 법적 전개
1. 위헌심사제도의 원류
2. 아테네인들의 상위규범과 하위규범
3. 중세의 자연법사상
Ⅲ. 각국의 위헌법률심사제도
1. 영국
1) 사법심사의 시도 : 의사 본함 사건
2) 사법심사의 실패
2. 미국
1) 쿠크의 영향
2) 마버리판결의 의의
3) 새로운 쟁점의 등장 : 헌법해석의 문제
3. 독일
1) 불리한 여건 속의 출발
2) 국사재판제도 : 헌법재판제도의 근원
3) 헌법재판소제도의 정착
4. 한국
1) 위헌심사제도의 도입
2) 제3공화국의 사법심사
3) 위헌심사제도로의 회복
4) 현행헌법상의 위헌심사제도
1. 위헌법률심사제의 의의
2. 위헌법률심사제의 연혁
3. 위헌법률심사제의 이론적 근거
1) 헌법의 최고법규성의 보장
2) 의회에 대한 불신
3) 권력분립의 원리
4. 위헌법률심사제의 유형
1) 심사기관의 성격을 기준으로 한 분류
2) 심사작용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분류
Ⅱ. 위헌심사제도의 법적 전개
1. 위헌심사제도의 원류
2. 아테네인들의 상위규범과 하위규범
3. 중세의 자연법사상
Ⅲ. 각국의 위헌법률심사제도
1. 영국
1) 사법심사의 시도 : 의사 본함 사건
2) 사법심사의 실패
2. 미국
1) 쿠크의 영향
2) 마버리판결의 의의
3) 새로운 쟁점의 등장 : 헌법해석의 문제
3. 독일
1) 불리한 여건 속의 출발
2) 국사재판제도 : 헌법재판제도의 근원
3) 헌법재판소제도의 정착
4. 한국
1) 위헌심사제도의 도입
2) 제3공화국의 사법심사
3) 위헌심사제도로의 회복
4) 현행헌법상의 위헌심사제도
본문내용
률에 맞추어 제정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단순히 법률제정자에 대한 경고의 뜻을 지닌 것일 뿐 헌법에 어긋나는 법률의 법적 효력을 부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즉, 헌법과 법률이 충돌을 빚는다고 해도 그것이 곧 그 법률의 무효를 선언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그는 위헌심사와 같은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중세의 자연법사상
중세에 이르러서는 군권을 상회하는 상위법 곧 자연법이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유권적인 기구가 없음으로 해서 제도화될 수는 없었지만, 거의 사법심사에 가까운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연법은 세속의 최고권력에 제약을 가하며, 교황과 황제, 지배자와 주권적 인민 심지어 인간사회 전체를 지배하는데, 제정법이나 혹은 여하한 권한행위도 관습이나 혹은 인민전체의 결의도 이 자연법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와 같은 불멸의 영원한 원칙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무효이며, 어느 누구도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상위규범으로서의 자연법 관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비록 사상적으로 지배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상위규범을 근거로 해서 실정법과 군권행사의 효력과 타당성을 심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던 것도 아니고 또 갖추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따라서 위헌심사에 관한 한 중세는 우리에게 사상적인 면에서의 자료만을 제공하여 줄 뿐 실정법이나 군권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심사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좀 더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합리성과 올바른 이성을 근거로 실정법을 심사하는 사레가 하나씩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첫 사례가 영국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후세의 사법적 위헌심사제도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본함사건이며. 이 사건의판결에서 쿠크판사는 획기적인 내용의 주장을 내놓아서 영국내외에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Ⅲ. 각국의 위헌법률심사제도
1. 영국
1) 사법심사의 시도 : 의사 본함 사건
위헌심사와 관련하여 어떤 형태로든간에 후세에 영향을 끼친 고려한다면 영국에서 있었던 본함 사건의 판례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물론 판결 당시 영국 조야(朝野)의 거센 반발로 말미암아 확고한 선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내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610년 이 소송사건에서 쿠크 재판장이 내린 판결이유는 위헌심사에 관한한 특별한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영국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이 판결이유는 사법심사에 관한 법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정치사적 의의 때문에 이를 각별하게 취급하는 데에 이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판결이유 속에 담겨진 취지는 비록 영국 내에서는 수용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미국에서는 영본국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지배를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함에 있어 법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여 준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1915년 뉴욕주 변호사회의 연보는 과장된 표현이 없지 않지만, “요컨대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인의 보편적 권리와 기타 여러 권리를 침해하는 의회제정법률의 무효를 주장한 쿠크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법률가들의 혁명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 사법심사의 실패
쿠크의 커먼로 우위의 사상, 즉 코몬 로는 하나의 상위규범으로서 의회나 국왕의 의사를 능가하여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상은 이미 지적했던 대로 서로 다른 의도를 지닌 두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당시 제임스 1세의 치하에서 절대군주와 그를 둘러싼 왕당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절대군주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신흥의 의회세력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그리고 정치적 여건하에서 커먼로를 근거로 해서 의회제정법률을 사법적으로 심사해야 한다는 쿠크의 주장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서도 차례로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커먼로의 우월을 내세워 국왕의 왕권행위와 의회의 입법행위를 그 커먼로의 테두리 안에 묶어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절정에 달해 있는 절대군주의 세력과 상승일로에 있는 의회세력을 한꺼번에 견제하려던 쿠크의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항상 국왕편에 서서 국왕의 수족으로 구실해왔다는 과거의 오명 때문에 당시만 해도 커먼로법원에 대한 일반 영국인들의 신뢰가 두텁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 둘째 국왕이나 의회 같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부터 동시에 심한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을 또한 들 수 있겠다.
2. 미국
1) 쿠크의 영향
본함 사건의 판결에서 쿠크가 주장했던 바는 법원의 판례로서의 특별히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판결이유가 담고 있었던 사상만은 후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영국에서보다도 미국에서 그러했고, 커먼로의 우월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보다도 사법심사의 확립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의 사법적 위헌심사를 일컬어 쿠크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독립하여 성문화된 연방헌법이 채택하기 전에 이처럼 쿠크의 영향을 받아 법원이 법률의 유효여부를 심사한 예가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또한 부인할 수 없겠다. 즉, “무엇이 악법인가에 관한 자기나름의 소견 이외에 아무런 방향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법관들은 입법권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무제한한 입법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 당시에 흔히 쓰던 용어인 자연적 정의처럼 대체로 모호한 내용의 상위규범을 내세워 제정법률을 무효로 선언하는 경우, 그러한 판단이 다분히 법관 개인의 주
3. 중세의 자연법사상
중세에 이르러서는 군권을 상회하는 상위법 곧 자연법이 있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유권적인 기구가 없음으로 해서 제도화될 수는 없었지만, 거의 사법심사에 가까운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자연법은 세속의 최고권력에 제약을 가하며, 교황과 황제, 지배자와 주권적 인민 심지어 인간사회 전체를 지배하는데, 제정법이나 혹은 여하한 권한행위도 관습이나 혹은 인민전체의 결의도 이 자연법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와 같은 불멸의 영원한 원칙에 위배되는 어떠한 것도 무효이며, 어느 누구도 구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중세는 상위규범으로서의 자연법 관념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였다. 그러나 비록 사상적으로 지배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있어서는 상위규범을 근거로 해서 실정법과 군권행사의 효력과 타당성을 심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었던 것도 아니고 또 갖추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따라서 위헌심사에 관한 한 중세는 우리에게 사상적인 면에서의 자료만을 제공하여 줄 뿐 실정법이나 군권행사에 대한 구체적인 심사의 사례를 보여 주는 것은 아니라 하겠다. 결국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좀 더 오랜 세월을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근세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합리성과 올바른 이성을 근거로 실정법을 심사하는 사레가 하나씩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첫 사례가 영국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후세의 사법적 위헌심사제도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본함사건이며. 이 사건의판결에서 쿠크판사는 획기적인 내용의 주장을 내놓아서 영국내외에 많은 논란과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Ⅲ. 각국의 위헌법률심사제도
1. 영국
1) 사법심사의 시도 : 의사 본함 사건
위헌심사와 관련하여 어떤 형태로든간에 후세에 영향을 끼친 고려한다면 영국에서 있었던 본함 사건의 판례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물론 판결 당시 영국 조야(朝野)의 거센 반발로 말미암아 확고한 선례로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국내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1610년 이 소송사건에서 쿠크 재판장이 내린 판결이유는 위헌심사에 관한한 특별한 의의를 지닌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영국에서와는 대조적으로 미국에서는 이 판결이유는 사법심사에 관한 법이론적 근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의 정치사적 의의 때문에 이를 각별하게 취급하는 데에 이론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판결이유 속에 담겨진 취지는 비록 영국 내에서는 수용되지 못하였을지라도 미국에서는 영본국 의회가 제정한 법률의 지배를 거부하고, 결과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함에 있어 법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여 준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1915년 뉴욕주 변호사회의 연보는 과장된 표현이 없지 않지만, “요컨대 미국의 독립혁명은 영국인의 보편적 권리와 기타 여러 권리를 침해하는 의회제정법률의 무효를 주장한 쿠크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기 위한 법률가들의 혁명이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2) 사법심사의 실패
쿠크의 커먼로 우위의 사상, 즉 코몬 로는 하나의 상위규범으로서 의회나 국왕의 의사를 능가하여 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사상은 이미 지적했던 대로 서로 다른 의도를 지닌 두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당시 제임스 1세의 치하에서 절대군주와 그를 둘러싼 왕당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절대군주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시민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신흥의 의회세력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그리고 정치적 여건하에서 커먼로를 근거로 해서 의회제정법률을 사법적으로 심사해야 한다는 쿠크의 주장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서도 차례로 거부되기에 이르렀다.
요컨대 커먼로의 우월을 내세워 국왕의 왕권행위와 의회의 입법행위를 그 커먼로의 테두리 안에 묶어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절정에 달해 있는 절대군주의 세력과 상승일로에 있는 의회세력을 한꺼번에 견제하려던 쿠크의 기도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항상 국왕편에 서서 국왕의 수족으로 구실해왔다는 과거의 오명 때문에 당시만 해도 커먼로법원에 대한 일반 영국인들의 신뢰가 두텁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 둘째 국왕이나 의회 같은 강력한 정치세력으로부터 동시에 심한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을 또한 들 수 있겠다.
2. 미국
1) 쿠크의 영향
본함 사건의 판결에서 쿠크가 주장했던 바는 법원의 판례로서의 특별히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판결이유가 담고 있었던 사상만은 후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영국에서보다도 미국에서 그러했고, 커먼로의 우월성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보다도 사법심사의 확립에 있어서 그러했다. 그런 뜻에서 미국의 사법적 위헌심사를 일컬어 쿠크의 유산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미국이 독립하여 성문화된 연방헌법이 채택하기 전에 이처럼 쿠크의 영향을 받아 법원이 법률의 유효여부를 심사한 예가 적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도 또한 부인할 수 없겠다. 즉, “무엇이 악법인가에 관한 자기나름의 소견 이외에 아무런 방향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법관들은 입법권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무제한한 입법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그 당시에 흔히 쓰던 용어인 자연적 정의처럼 대체로 모호한 내용의 상위규범을 내세워 제정법률을 무효로 선언하는 경우, 그러한 판단이 다분히 법관 개인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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