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개화사상의 의미
2. 개항기의 개화파 형성
통상개화론
강화도 조약과 개항
3. 개화정책의 추진
개화파
개화정책의 전개
Ⅱ. 본 론
1. 개화사상의 의미
2. 개항기의 개화파 형성
통상개화론
강화도 조약과 개항
3. 개화정책의 추진
개화파
개화정책의 전개
본문내용
책으로는 ‘親中國結日本聯美國’ 이라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이는 러시아의 남하에 직접 위협을 받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에서의 독점적인 일본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청의 입장에서 나온 의견이었다. 고종은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대신들에게 보이면서 개화에 대한 식견을 넓힐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는 외국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기 위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고 청에는 영선사(營繕司)를 파견하였다. 신사유람단은 박정양, 홍영식 등 12명의 조사와 수행원을 합쳐6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70여일동안 일본의 정부기관과 산업세관교육군사 등의 시설을 살펴보고 귀국하여 국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보의 개화정책추진에 이바지하였다. 이 때 수행원 중에 몇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서양학문과 어학을 배웠다. 한편 청에 파견된 영선사는 국비의 강화를 위한 군기제조술의 학습이 주된 목적이었다. 김윤식이 인솔한 학도와 공장 38명은 천진에 있는 기기창(機器廠)에서 화약탄약의 제조법, 전기화학제련기계 등과 외국어를 학습하였다. 그러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지식이 부족하여 중도탈락자가 많았고, 게다가 정부의 재정지원이 부족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1년여만에 전원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시에 기기와 서적을 구입해 오고 또 천진의 공장을 데리고 와서 서울의 삼청동에 기기창을 설치하는 등 약간의 부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신지식을 토대로 해서 개화의 노선에 따라 정치개혁이 실시되었다. ㅈㅇ치개혁에 있어서 고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군사제도였다. 즉 고종 18년(181)에 과거의 구식군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금위영총융청)은 이를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으로 개편 정리하고 , 그 장(長)을 대장이라 하여 국왕의 친근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이 일본의 장교를 초빙하여다가 신식군사훈련을 가하여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였는데, 이 별기군은 국왕의 근위병과 같은 존재여서 특별한 후대를 받고 있었다. 또, 양반 자제 중 빼어난 자 100여명을 뽑아서 사관생도(士官生徒)라 이름하고 신식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장차로는 구식군대를 모두 없애려는 계획이었다. 이로 인한 자연스런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이 나중에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고종은 왕원의 강화를 위하여 군대를 강화할 필요를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한편,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행정기구는 대체로 청의 제도를 참작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通商)군물(軍物)기계(機械)선함(船艦)기연(譏沿)어학(語學)전선(典選)이용(理用)의 12사를 두어 각기 해당 사무를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행정기구는 통상이니 군물이니 기계니 선함이니 하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새 정세에 대처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정부에서는 외국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기 위하여 일본에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고 청에는 영선사(營繕司)를 파견하였다. 신사유람단은 박정양, 홍영식 등 12명의 조사와 수행원을 합쳐68명으로 구성되었는데, 70여일동안 일본의 정부기관과 산업세관교육군사 등의 시설을 살펴보고 귀국하여 국왕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보의 개화정책추진에 이바지하였다. 이 때 수행원 중에 몇은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 서양학문과 어학을 배웠다. 한편 청에 파견된 영선사는 국비의 강화를 위한 군기제조술의 학습이 주된 목적이었다. 김윤식이 인솔한 학도와 공장 38명은 천진에 있는 기기창(機器廠)에서 화약탄약의 제조법, 전기화학제련기계 등과 외국어를 학습하였다. 그러나 근대 기술에 대한 기본지식이 부족하여 중도탈락자가 많았고, 게다가 정부의 재정지원이 부족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1년여만에 전원 철수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귀국시에 기기와 서적을 구입해 오고 또 천진의 공장을 데리고 와서 서울의 삼청동에 기기창을 설치하는 등 약간의 부수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신지식을 토대로 해서 개화의 노선에 따라 정치개혁이 실시되었다. ㅈㅇ치개혁에 있어서 고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군사제도였다. 즉 고종 18년(181)에 과거의 구식군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수어청금위영총융청)은 이를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양영으로 개편 정리하고 , 그 장(長)을 대장이라 하여 국왕의 친근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는 새로이 일본의 장교를 초빙하여다가 신식군사훈련을 가하여 별기군(別技軍)을 조직하였는데, 이 별기군은 국왕의 근위병과 같은 존재여서 특별한 후대를 받고 있었다. 또, 양반 자제 중 빼어난 자 100여명을 뽑아서 사관생도(士官生徒)라 이름하고 신식무예를 배우게 하였다. 이리하여 장차로는 구식군대를 모두 없애려는 계획이었다. 이로 인한 자연스런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이 나중에 임오군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고종은 왕원의 강화를 위하여 군대를 강화할 필요를 무엇보다도 절실히 느꼈던 것 같다.
한편,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행정기구는 대체로 청의 제도를 참작하여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두고, 그 밑에 사대(事大)교린(交隣)군무(軍務)변정(邊政)통상(通商)군물(軍物)기계(機械)선함(船艦)기연(譏沿)어학(語學)전선(典選)이용(理用)의 12사를 두어 각기 해당 사무를 장악하게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행정기구는 통상이니 군물이니 기계니 선함이니 하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새 정세에 대처하여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